Webfic
더 많은 컨텐츠를 읽으려면 웹픽 앱을 여세요.

제12장

다음 순간 송유진은 한껏 들뜬 소년의 목소리를 들었다. “엄마, 다음에는 한정판으로 사 줘요. 그렇게 비싸지도 않아요. 겨우 1억 정도인데.” 그 목소리의 주인은 다름 아닌 그녀의 남동생 송연준이었다. 김은숙은 다정하게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그래, 우리 아들이 갖고 싶은 거라면 당연히 사줘야지.” “고마워요, 엄마! 역시 엄마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요!” “넌 내 아들이잖아. 내 모든 것은 다 네 거야. 내가 널 챙겨주지 않으면 누구를 챙기겠어?” “엄마, 사랑해요!” 송연준은 김은숙의 팔짱을 끼고 애교를 부렸다. 송유진은 그런 모자의 다정한 모습을 조용히 바라보았지만 전혀 놀라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김은숙은 그녀에게도 한없이 잘해주었다. 너무 잘해줘서 한때는 엄마가 아들보다 딸을 더 아낀다고 착각한 적도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동생을 위해 여러 번 엄마에게 서운함을 표현하기도 했다. 그러나 아버지가 사고를 당한 후 집안의 모든 책임이 김은숙에게 넘어갔는데 그때부터 김은숙은 점점 차가워졌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애초에 딸을 더 아낀다는 것도 착각이었을 뿐이었다. 김은숙은 거실에 앉아 있는 송유진을 발견하고 살짝 놀란 듯했지만 곧 표정을 가다듬었다. “유진아, 웬일이야? 집엔 무슨 일로 왔니?” 송유진이 일어서려는 순간 송연준이 먼저 그녀에게 뛰어와 와락 안겼다. “누나! 드디어 돌아왔네! 나 진짜 누나가 너무 보고 싶었어!” 송유진은 잠시 멈칫했지만 가만히 서서 동생의 포옹을 받아주었다. 솔직히 말하면 그녀와 송연준의 사이는 나쁘지 않았다. 비록 그녀가 몇 년 동안 집에 잘 오지 않았지만 두 사람은 종종 따로 만나기도 했으니까. 송유진은 송연준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었다. “너 이제 곧 열여덟 살인데 아직도 이러고 다녀? 창피하지도 않니?” 하지만 송연준은 개의치 않았다. “누나한테 애교 부리는 게 뭐 어때서? 누나, 이번엔 집에서 좀 지내다 가.” 김은숙은 두 남매를 조용히 바라보다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우리 연준이. 네가 산 물건들 먼저 방에 가져다 놓으렴. 엄마는 누나랑 이야기 좀 할게.” 그제야 송연준은 자신이 쇼핑한 물건들을 떠올렸다. 그는 누나에게 자랑하고 싶었지만 엄마가 날린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고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쇼핑백을 들고 아쉬운 듯이 위층으로 올라갔다. 김은숙은 환하게 웃으며 다가와 주방에 있는 도우미에게 지시했다. “아줌마, 과일 가게에서 산 포도 좀 씻어 줘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자연스럽게 송유진의 손을 잡으려 했지만 송유진은 눈에 띄지 않게 손을 피했다. 그 모습을 본 김은숙은 상처받은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유진아, 아직도 엄마한테 화난 거니?” 송유진은 그 말을 회피하고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엄마, 나 오늘 병원에 다녀왔어요.” 그 말에 허공에 있던 김은숙의 손이 잠시 굳어졌고 그녀는 송유진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짐작하고 있었다. 김은숙은 울먹이며 말했다. “엄마도 어쩔 수 없었어. 지금 회사 사정이 어려워. 그리고 네 동생도 내년에 대학 입시 준비해야 하잖니. 돈 들어갈 일이 많아.” “그렇다 해도 아빠를 청산 요양원으로 보내는 건 너무한 거 아니에요? 거긴 사실상 버려진 사람들이 가는 곳이잖아요.“ “그럼 나보고 어쩌란 말이니? 여자 혼자 이 집안을 유지하느라 얼마나 힘든데!” 김은숙은 갑자기 송유진의 손을 꽉 잡고 흐느꼈다. “너희 아빠도 네 동생을 그렇게 아꼈잖니. 아빠도 내 입장을 이해하실 거야. 우리 집은 매달 네 아빠 병원비를 감당할 형편이 안 돼.” 송유진은 무표정한 얼굴로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돈이 없다고?’ 하지만 조금 전 송연준이 들고 있던 쇼핑백 속 물건들은 하나같이 가격이 수천만 원을 넘는 명품들이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돈이 없다는 말을 믿으라는 건가? 순간 송유진은 깊은 무력감을 느꼈고 아버지를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그녀가 기억하는 부모님은 서로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이었다. 두 분은 언제나 서로에게 다정했고 함께하는 시간이 행복해 보였다. ‘하지만 고작 십여 년 만에 엄마는 어떻게 이토록 냉정해질 수 있을까? 사랑에도 유효기간이 있는 걸까?’ ‘만약 아빠가 깨어나서 사랑했던 아내가 이렇게 변해버린 모습을 본다면 어떤 기분일까?’ 그때 가사 도우미가 깨끗이 씻은 포도를 접시에 담아 가져왔다. 김은숙은 활짝 웃으며 접시를 송유진 앞으로 내밀었다. “유진아, 먹어봐. 너 이 포도를 제일 좋아하잖아.” 하지만 송유진은 고개를 살짝 저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김은숙은 순간 당황한 듯했지만 이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과일 접시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곧바로 그녀는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저녁은 해물 요리야. 집에서 먹고 가. 우리 가족이 다 같이 식사한 지 오래됐잖니.” 그러나 결국 송유진은 저녁을 함께하지 않았다. 집을 나서기 전 그녀는 김은숙을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엄마, 엄마는 아빠를 외면할 수 있어도 나는 그럴 수 없어. 그리고 난 포도를 좋아하지도 않고 해물 알레르기가 있어.” 송씨 가문을 나서며 송유진은 휴대폰을 꺼내 연락처에서 강희옥의 번호를 찾았다. 그리고 짧은 메시지를 입력해 보냈다. [아줌마, 제안하신 거 수락할게요.] 잠시 후 메시지의 읽음 표시가 뜨자 그녀는 휴대폰을 다시 집어넣었다. 그런데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그녀의 등 뒤에서 들려왔다. “혹시 유진이니?” 송유진이 뒤를 돌아보니 한재혁의 외할머니가 서 있었는데 그 분을 보자 그녀는 순간 코끝이 찡해졌다. “네, 저예요.” 한재혁의 외할머니 박영자는 반갑게 다가와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너를 못 본 지 벌써 4, 5년이야. 그래서 내가 눈이 어두워서 착각한 줄 알았어.” 송유진은 고개를 저었다. “밥 안 먹었지? 가자, 우리 집에 가서 같이 먹자.” 송유진은 거절하려다 오랜만에 뵌 할머니와 함께하고 싶어 결국 따라가기로 했다. 집에 들어서자 박영자는 흥분한 목소리로 거실을 향해 외쳤다. “재혁아, 누가 왔는지 봐봐!” 그 순간 송유진은 마음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녀는 한재혁이 이곳에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송유진은 어색하게 두 발을 오므리며 바닥을 응시했다. 만약 그가 여기 있는 걸 알았더라면 절대 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때 한재혁이 다가와 박영자가 들고 있던 장바구니를 받아 들었다. “할머니, 장은 제가 본다고 했잖아요.” “네가 뭘 알아야 맡기지. 싱싱한 걸 골라야 한다고.” “저야 잘 모르지만 아줌마랑 같이 가면 되잖아요. 할머니가 손수 가실 필요 없어요.” 김옥순은 이 집에서 20년 넘게 일한 가사 도우미였는데 송유진도 그녀가 익숙했다. 송유진은 현관에서 조용히 그들이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지켜보았는데 그 순간 그녀는 한재혁이 많이 변했다는 것을 실감했다. “유진아, 뭐해? 왜 멍하니 있어.” 한재혁이 다가와 신발장에서 슬리퍼를 꺼내 그녀 앞으로 내밀었다. 6년 전 그녀가 신었던 그 분홍색 슬리퍼와 똑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그가 신은 것은 여전히 파란색이었다. 박영자는 그녀를 흐뭇하게 바라보며 웃었다. “유진아, 너 재혁이 모르겠니? 어릴 때 네가 학교 갈 때마다 쫓아다니던 그 녀석이야. 기억 안 나?” 송유진은 당황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기억나요. 잊을 리가 있나요.” “그럼 됐지! 어서 들어와. 몇 년 만에 보는 건데 오늘 저녁은 내가 직접 차려줄 테니 기대해.” 그 말을 듣자 송유진은 얼굴이 살짝 굳었다. 그녀는 예전에 박영자가 해준 요리를 먹고 병원에 실려 간 적이 있었다. 그리고 분명 한재혁도 그 일을 기억하고 있을 터였다. 아니나 다를까 곧 한재혁이 급히 입을 열었다. “할머니, 연세도 있으신데 쉬세요. 저희가 할게요.” 그러자 박영자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 “너 요리를 할 줄 알아?” “네. 해외에 있을 때 대부분 직접 해 먹었어요.” “오, 우리 재혁이 이제 다 컸네! 직접 요리를 다 하고.” 할머니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송유진의 손을 다시 잡았다. “유진아, 너도 와서 나랑 이야기 좀 하자. 저 녀석은 주방에서 밥 준비하게 두고. 나도 얘가 만든 음식은 처음 먹어 보네.” 송유진이 대답할 틈도 없이 박영자에게 끌려 거실로 향했다. 비록 몇 년 만의 만남이었지만 박영자가 여전히 그녀를 아끼는 것이 느껴졌다. “유진아, 요즘 어떻게 지냈니? 공부하는 건 힘들지 않니?” 송유진은 살짝 목이 메었지만 밝게 웃으며 대답했다. “괜찮아요. 곧 졸업이라 그렇게 힘들지는 않아요.” “졸업하고 나서 뭘 할지 정했니?”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사실 그녀는 그동안 아무런 목표도 없이 살아왔고 미래에 대한 기대도 없었다. 박영자는 송유진을 안타까운 눈빛으로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네 아빠 일은 들었어. 하지만 그건 네 탓이 아니야. 그러니까 너무 자책하지 마.” 송유진은 고개를 숙이고 끄덕였다. 박영자는 그녀가 아버지 이야기를 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는 걸 알아차리고 화제를 돌렸다. “그래, 이제 재혁이도 돌아왔으니 앞으로 네 일도 함께 의논해 보면 어떠니? 재혁이가 많이 도와줄 거야.” 그러자 송유진은 반사적으로 주방 쪽을 바라보았다. 한재혁은 체크 무늬 앞치마를 두르고 식재료를 손질하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 배씨 가문에서 보았을 때보다 그가 돌아온 것이 훨씬 현실적으로 느껴졌다. 그런데 그때 한재혁이 갑자기 고개를 돌렸고 송유진은 깜짝 놀라 시선을 피했다. “유진아, 잠깐 와봐.” 그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 Webfic, 판권 소유

DIANZHONG TECHNOLOGY SINGAPORE PTE. LT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