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장
배도현은 굳은 얼굴로 송유진을 쫓아가 그녀의 팔을 거칠게 잡아챘다.
“송유진, 나 아직 너한테 가라고 안 했는데?”
그러자 송유진은 짜증이 섞인 눈빛으로 그의 손을 노려보며 짧게 말했다.
“놔.”
배도현은 차갑게 웃으며 그녀를 비꼬았다.
“왜? 네 새 남자 친구가 볼까 봐 겁나? 송유진, 너 그 사람이 누군지는 알아? 너 대체 뭘 믿고 들이대는 건데? 내가 너한테 당했던 것처럼 주씨 가문의 둘째가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당할 거 같아?”
송유진은 그를 흘겨보고 아무런 감정도 담지 않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인데?”
“상관없다니? 나 그래도 네 전 남자 친구였잖아.”
송유진은 그가 아무렇지도 않게 ‘전 남자 친구’라는 말을 꺼내는 걸 듣고 그의 뻔뻔함에 실소가 터질 뻔했다.
“전 남자 친구? 언제부터 네가 내 전 남자 친구였는데?”
배도현은 순간 말문이 막혀 표정이 굳었다.
며칠 전 그가 그녀에게 내뱉었던 말을 떠올리자 짧은 찰나 당황이 스쳤다.
하지만 이내 그는 다시 어깨를 으쓱이며 태연한 척했다.
“송유진, 주성윤 같은 사람은 네가 감당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야. 괜히 설치지 마.”
송유진은 아무 말 없이 그를 가만히 바라봤다.
참 이상한 일이었다. 예전에는 배도현과 한재혁이 참 닮아 보였었는데 지금 보니 둘이 전혀 다르다는 걸 깨달았다.
특히 한재혁이 돌아온 지금 그 차이는 더욱 선명했다.
“배도현.”
송유진의 목소리는 차가웠다.
“우리 이젠 아무 사이도 아니야. 네 입으로 직접 그렇게 말했잖아. 네가 나한테 질렸다고.”
배도현은 얼굴이 굳었고 눈빛이 흔들리더니 곧 억지를 부리며 목소리를 높였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너도 잘 알잖아. 이제 와서 나한테 그런 식으로 나오겠다는 거야?”
송유진은 입을 열려다가 문득 멀리서 걸어오는 한윤아를 보았다.
그녀는 손을 흔들며 다가오고 있었다.
“도현 씨!”
배도현은 얼어붙은 표정으로 잠시 멍하니 있다가 갑자기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한윤아의 손목을 잡아채며 말했다.
“소개할게. 여긴 한윤아, 내 여자 친구야.”
그는 이 말을 하며 송유진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녀의 표정이 일그러지거나 감정이 드러나는 순간을 잡아내려는 듯했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송유진은 담담한 얼굴로 그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배도현, 네가 지금 정말 역겹게 느껴져.”
그 말에 배도현은 숨이 턱 막혀 버렸고 갑작스러운 불안감이 그의 가슴을 짓눌렀다.
그는 무언가 말을 하려 했지만 송유진은 이미 등을 돌리고 있었다.
그녀가 떠나고 나자 배도현은 한윤아의 손을 툭 떨쳐내며 차갑게 말했다.
“먼저 가요. 난 안 데려다줄 거니까.”
한윤아는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내일 영화 보러 가기로 했잖아요. 그건...”
“그건 나중에 얘기해요. 지금은 일이 좀 있어서.”
그는 더 이상 그녀와 말을 섞지 않고 주차장 쪽으로 걸어갔다.
차에 앉은 배도현의 머릿속에는 송유진의 마지막 말이 떠나질 않았다.
‘역겨워.’
‘송유진이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지? 정말 나에게 아무런 감정도 남아 있지 않은 걸까?’
그는 답답한 가슴을 주체할 수 없었다. 손바닥으로 핸들을 쾅 내려치자 경적이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울렸다.
그때 전화가 울렸다. 배도현은 화면을 확인하고 잠시 망설이다가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수화기 너머에서 연지아의 울먹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현 오빠... 내가 잘못했어요. 제발 우리 헤어지지 마요, 네?”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갈라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지아야, 이번엔 네가 잘못한 거 맞아.”
“알아요. 앞으로는 절대 안 그럴게요. 나 오빠 정말 사랑해요. 난 오빠 없으면 안 돼요.”
연지아의 애절한 목소리는 부드럽고 간질거리는 깃털처럼 그의 감정을 흔들었다.
송유진은 한 번도 저런 목소리로 그를 부른 적이 없었다. 언제나 차분했고 언제나 냉정했다.
그런데 배도현은 머릿속에 송유진이 떠오를 때마다 견딜 수 없이 짜증이 났다.
“앞으로는 잘할 거야?”
“네, 나 정말 착하게 굴게요!”
연지아는 여전히 울먹이며 간신히 목소리를 냈다.
“알았어, 울지 마. 헤어지지 말자.”
“나도 울고 싶지 않은데 오빠를 못 본다고 생각하니까 너무 속상해요. 오빠, 나 오빠 보고 싶어요.”
“요 며칠 회사가 좀 바빠. 바쁜 일 끝나면 학교로 너 보러 갈게. 그때까지 잘 있어.”
배도현은 간신히 인내심을 유지하며 그녀를 달랬다.
‘그래, 내가 왜 이렇게 화를 내고 있지. 아직 어린애인데 조금 버릇없는 게 뭐 그리 대수야.’
연지아는 그의 말에 울음을 멈추고 활짝 웃었다.
“알겠어요. 나 착하게 있을게요. 오빠도 너무 무리하지 마요. 안 그러면 나 속상해요.”
“그래, 나 지금 회의가 있어서 이만 끊을게. 잘 있어.”
그는 차분하게 마무리하고는 그녀가 더 말을 하기 전에 통화를 끊었다.
차를 돌려 회사로 향하면서 배도현은 송유진의 차가운 표정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2층 창가에 서 있던 한재혁은 아래층을 내려다보며 옆에 앉아 있던 주성윤에게 물었다.
“배도현이랑 유진이, 둘이 무슨 관계인지 알아?”
주성윤은 잠시 망설이다 대답했다.
“형, 내가 말하는 거 듣고 화내면 안 돼.”
한재혁은 술잔을 들고 한 모금 마시며 무심하게 말했다.
“말해.”
“나도 방금 생각났는데... 혹시 유진이랑 배도현이 사귀는 거 아닐까... 싶어.”
주성윤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유리잔이 테이블 위에 세게 부딪히며 깨졌다.
그리고 유리 파편 속에서 핏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와, 대체 뭐 하는 거야!”
주성윤은 놀라 외쳤다.
하지만 한재혁은 상처 난 손을 가만히 보고는 옆에 있던 물티슈를 집어 들어 천천히 피를 닦아냈다.
“계속 얘기해.”
주성윤은 침을 삼켰다.
“형 진짜 미쳤네. 나 더는 못 말해. 갈게.”
그는 서둘러 자리를 떴다.
그런데 문 앞에 도착한 주성윤은 문득 무언가가 생각난 듯 돌아서서 말했다.
“참, 나 주말에 일이 있어서 할머니 뵈러 같이 못 가.”
주성윤이 떠난 뒤 한재혁은 휴대폰을 꺼내 번호를 눌렀다.
그리고 연결음이 두 번 울리자 상대가 전화를 받았다.
“사람 하나 조사해봐...”
한재혁의 시선은 창문 너머로 길 건너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송유진에게로 고정됐다.
그녀가 버스에 올라탈 때까지 그는 시선을 떼지 않았다.
주말에 송유진은 병원으로 아버지를 보러 갔는데 병실에 도착하자마자 병원 직원들이 아버지를 들것에 실어 이동시키는 모습을 목격했다.
“뭐 하시는 거예요? 저희 아빠를 어디로 옮기려는 겁니까?”
송유진은 급히 그들을 막아섰다.
앞장서 있던 중년 남자가 그녀를 보고는 잠시 머뭇거리다 대답했다.
“송 대표님을 청산 요양원으로 옮기라는 지시가 있었습니다.”
그 남자는 송유진의 어머니 김은숙의 비서 조명진이었다.
송유진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소리쳤다.
“아빠는 병원에서 잘 계시는데 왜 요양원으로 옮겨야 하죠?”
청산 요양원은 시설도 열악하고 환자들을 제대로 돌보지 않는 곳으로 유명했다. 그곳으로 가는 것은 사실상 죽음을 기다리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건 김 대표님의 지시입니다. 불만이 있으시면 김 대표님과 상의하시죠.”
송유진은 온몸이 굳어버렸다.
그녀는 어머니가 이렇게까지 냉정할 줄은 몰랐다. 20년 넘게 함께 살아온 남편을 이렇게 쉽게 내칠 수 있다니.
송유진은 아무것도 할 수 없어 그저 들것 위에 누워 있는 아버지를 바라봤다. 아버지는 한때 그녀의 영웅이었던 사람이었기에 이 상황이 더없이 비참하고 안타까웠다.
병원을 떠난 송유진은 택시를 타고 송씨 가문 저택으로 향했고 현관 앞에 도착해 초인종을 눌렀지만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비밀번호를 입력했지만 화면에는 ‘비밀번호 오류’라는 문구만 떴다.
6년 전 어머니와 크게 싸운 뒤 집을 나선 이후 한 번도 돌아오지 않았던 그녀는 그제야 비밀번호가 바뀌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때 장을 보고 돌아온 가정부가 그녀를 보고 물었다.
“혹시 큰아가씨세요?”
송유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네, 너무 오래 안 와서 비밀번호를 잊어버렸어요.”
가정부는 급히 문을 열어주었다.
송유진은 집 안으로 들어섰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사모님께서는 도련님과 함께 외출하셨습니다.”
가정부는 말끝을 흐리며 다소 불편한 기색을 보였다.
송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감사합니다. 여기서 기다리겠습니다.”
그녀는 소파에 앉아 어머니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가정부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큰아가씨, 혹시 앞으로 계속 이 집에 계실 건가요?”
그녀가 답하려는 순간 현관문 비밀번호 잠금이 해제되는 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