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장
열 달 동안 임신한 아이를 다른 여자가 자기 아이라고 부르는 것을 듣고도 강서현은 화를 내지 않았다. 그녀는 오히려 담담하게 한마디 할 뿐이었다.
“오늘은 칭찬을 받아 마땅합니다. 수학 경시 대회 문제를 풀었었는데 만점을 받았어요. 집에서 잘 준비하면 대상을 받을 수도 있을 거예요.”
진이나는 강서현이 차현승은 자신과 아무런 상관도 없는 아이처럼 대하는 모습을 보고 피식 웃음이 터져나왔다.
“우리 현승이는 아버지의 유전자를 물려받아 IQ가 140인 천재니까 이번 대회에서도 반드시 금메달을 딸 거예요.”
“네. 그럼 힘내세요.”
“강 선생님, 나중에 연락하기 쉽도록 전화번호 좀 알려주세요.”
강서현은 진이나의 속셈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전화번호를 추가하는 것은 학부모들의 가장 기본적인 요구 사항이기 때문에 딱히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여기에 입력해 주세요.”
진이나는 강서현에게 휴대폰을 건네며 말했다. 강서현이 휴대폰 번호를 입력하자 진이나는 주소록에 그녀의 번호를 저장한 다음 휴대폰을 껐다.
그러더니 휴대폰을 흔들며 말을 꺼냈다.
“강 선생님, 전 아들이랑 함께 외식하러 가야 해서 먼저 가볼게요. 무슨 일 있으면 문자로 연락해요.”
강서현은 진이나가 차현승을 아들이라고 부르는 것을 보고도 조금도 개의치 않고 오히려 평소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한편, 차현승은 고개를 들어 그런 강서현을 바라보았다.
다른 여자가 그를 아들이라고 불렀지만, 그녀는 뜻밖에도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그러자 화가 치밀어 오른 차현승은 진이나의 손을 꽉 잡고 다정하게 한마디 했다.
“이나 엄마. 이제 그만 말하고 빨리 밥 먹으러 가요.”
비록 엄마라는 호칭에 이름을 붙이긴 했지만 그럼에도 그토록 기다리고 있었던 호칭에, 진이나는 아주 기뻐했다. 그래서 차현승을 꽉 끌어안고 한마디 했다.
“현승아. 엄마가 맛있는 거 사줄게. 어서 선생님이랑 인사해.”
한 명은 엄마고 한 명은 선생님이었다.
차현승과 진이나의 모습을 바라보는 강서현의 마음이 전혀 아무렇지도 않다고 하면 그건 거짓말일 것이다.
차현승은 그녀가 필사적으로 낳은 아들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른 여자를 엄마라고 부르고 있었다.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지만 차씨 가문에서 쫓겨난 후부터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이 현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그녀의 아들은 앞으로 그녀와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그에겐 앞으로 새 엄마가 있을 것이고 다시는 그녀를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생각에 강서현은 그저 담담한 표정으로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입사에는 엷은 미소를 띠었다.
한편, 아무렇지도 않아하는 강서현의 모습에 진이나는 순식간에 표정이 굳어졌다.
바로 그때, 한 30대 남자가 다가와 강서현에게 말을 걸었다.
“강 선생님, 저는 윤지훈 아빠입니다. 지훈이의 학교 생활에 대해 물어보고 싶습니다.”
그 말에 강서현은 윤지훈을 힐끔 쳐다보고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한마디 했다.
“지훈이는 말도 잘 듣고 수업도 열심히 참가합니다. 하지만 수학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같으니까 정 적응이 안 된다면 일반반으로 옮기도록 하세요. 아이가 싫어하는 것을 억지로 시킬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수학은 흥미가 있어야 돌파구가 생기는 법이다. 그렇지 않으면 아주 괴로울 뿐이었다.
그 말에 윤지훈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선생님 말씀이 맞습니다. 아이 엄마가 꼭 이 반에 넣고 싶다고 해서… 천재반에 가야 출세를 한다느니 그러더라고요.”
“아이들마다 성장 궤도가 다르기 때문에 분명 지훈이에게 더 맞는 진로가 있을 거에요.”
“네. 돌아가서 아이 엄마와 상의해 보겠습니다. 강 선생님, 전화번호를 추가해도 될까요? 나중에 연락하기 편하도록 말이에요.”
그 말에 강서현은 윤지훈 아빠한테 자신의 전화번호를 알려주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나란히 서서 휴대폰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한 아이가 강서현의 뒤에서 달려오다가 실수로 그녀를 밀쳐버리고 말았다. 그 바람에 강서현이 살짝 비틀거리자, 윤지훈의 아버지가 그녀를 부축하며 물었다.
“강 선생님, 괜찮으세요?”
이를 본 진이나는 곧바로 휴대폰을 꺼내 사진 한 장을 찍었다. 그리고는 강서현을 차가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강서현. 내일 당장 학교에서 쫓아낼 거야.’
한편, 차에 올라찬 차현승은 여전히 조금 전 강서현의 태도에 화를 내고 있었다.
그 모습에 진이나는 미소를 지으며 그의 얼굴을 한 번 꼬집었다.
“화내지 마. 강서현은 원래 저런 사람이야. 너도 알잖아. 당시 네가 수족구에 걸려 열이 40도나 났을 때, 강서현에게 아무리 전화를 해도 연결이 되지 않았어. 나중에 보아하니 병원에서 다른 아이를 돌보고 있는 중이었었지. 강서현은 널 아들로 생각하지 않아. 앞으로 내가 우리 현승이한테 잘해줄게.”
이 일을 언급하자 차현승은 눈시울이 붉어졌다.
차현승은 세 살 때의 기억을 절대 잊을 수 없었다. 강서현이 출장에 가 있을 동안, 차현승은 수족구에 걸려 고열이 좀처럼 내리지 않았었다.
당시 그는 강서현이 너무 보고 싶어서 최금희에게 그녀에게 전화를 하라고 했었다. 하지만 여러 번 전화했지만 그녀는 돌아오지 않았었다.
그러다 나중에 TV에서, 강서현이 병원에서 다른 아이를 돌보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녀는 또한 차현승이 그녀에게 바이러스를 옮기면 병원에 있는 아이에게 영향을 미칠까 걱정된다고 말했었다.
남의 자식을 살뜰히 돌보고, 정작 자기 아이에게는 관심이 없다니… 세상에 어떻게 이렇게 모진 엄마가 있을 수 있겠는가?
그때, 차현승은 강서현이 콩이에게만 잘해주고 자신은 냉담하게 대한다고 생각하니, 화가 나서 숨을 헐떡였다.
진이나는 그런 모습에 의기양양하게 입술을 구부렸다.
“됐어. 현승아. 우리 맛있는 거 먹고 놀이터에 가서 놀자.”
그 말에 차현승은 조금 전의 불쾌함은 전부 잊어버리게 되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늦게까지 놀다가 집으로 들어갔다.
진이나가 막 차현승을 데리고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문이 갑자기 벌컥 열렸다.
차재욱이 한기를 머금은 채 문 앞에 서 있었다.
“재욱아. 오늘 현승이를 데리러 학교에 갔었는데 기분이 별로 좋지 않은 것 같아 놀이터에서 조금 놀다왔어. 현승이 탓을 하지 마. 그건 다 강서현이 현승이를 무시해서 그런 거야. 현승이는 아직 어리니까 친 엄마한테 무시당해 슬퍼하는 건 당연한 거야.”
진이나는 바로 차재욱에게 조금 전의 상황을 일러바쳤다.
화를 낼 거라고 생각했던 차재욱은 그저 차현승의 손을 잡고 안으로 들어갔다.
“앞으로 번거롭게 학교에 데리러 가지 마. 그럼 이만 가볼게.”
차재욱이 말했다.
그렇게 냉정한 차재욱의 모습에 진이나는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내가 집 앞까지 도착했는데, 설마 나를 문전박대할 건 아니지?’
이런 생각에 진이나는 바로 말을 이어갔다.
“재욱아. 밤에 운전하기 무서워서 그러는데 여기서 하룻밤 자고 내일 다시 돌아가면 안 돼? 게다가 현승이가 기분이 안 좋아보이는데, 현승이랑 더 같이 있고 싶어.”
그 말에 차재욱은 망설임 없이 휴대폰을 꺼내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나를 집에 데려다 주도록 해.”
그리고 그는 진이나를 그저 문밖에 세워둔 채 차현승과 함께 안으로 들어갔다.
곧, 대문이 쾅 닫혔다.
굳게 닫힌 대문을 바라보며 진이나는 화가 나 발을 동동 굴렀다. 그녀는 당장이라도 그에게 달려들어 이게 무슨 짓인지 묻고 싶었다.
하지만 행여 차재욱의 미움을 살까 봐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녀는 어부지리로 차재욱의 은인 역할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때문에 그녀는 자신이 차재욱의 심기를 건드리면 니중에 결국 그와 결혼을 하지 못하게 될까 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바로 그때, 그녀의 휴대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발신자를 확인하고, 진이나의 눈빛에는 한 줄기 어두운 빛이 나타났다.
이튿날 아침.
일찍 학교에 온 강서현은 콩이를 자리에 앉히고 강단에 앉아 오늘 수업에 필요한 자료를 정리했다. 아이들이 하나둘씩 교실로 들어와 인사를 하자 강서현 역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때, 한 여자가 안으로 뛰어들어왔다.
그녀는 기세등등하게 강서현에게 다가가 한마디 했다.
“당신이 강서현이야?”
강서현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런데 무슨 일이시죠?”
그 여자는 이를 악물었다.
“무슨 일? 너 같은 여우를 혼내주러 왔어.”
강서현이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여자는 팔을 들어 강서현의 얼굴을 가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