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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장

교장실에서 나온 강서현의 두 손이 차갑게 식어갔다. 차재욱의 말을 신경 쓰지 않으려고 했지만, 과거의 자신 때문에, 자폐증을 가지고 태어난 콩이 때문에 차마 그러지 못했다. 그녀는 열 살 때 부모를 여의고 보육원에서 자랐지만 부모님의 가르침을 잊지 않았었다. 사람은 아무리 힘들어도 자신의 목표가 있어야 했다. 그래야 사는 보람이 있는 법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필사적으로 공부했었다. 그녀는 수학 성적이 아주 우수한 편이었다. 그래서 보육원 원장은 자발적으로 예전에 보육원에서 지냈던 선배를 찾아가 강서현에게 수학을 가르치도록 도움을 요청했었다. 그녀는 전국 수학 경시 대회에서 수상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패션 디자이너였던 어머니의 유전자를 물려받아 디자인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자신의 작품을 국제 무대에서 선보이는 것이 강서현의 오래된 꿈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뛰어난 그림 솜씨로 열여섯 살에 경성대학교 미술학부에 합격했었다. 졸업 후엔 디자인 산업에 뛰어들어 어머니의 오랜 꿈을 이어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어느날 보육원 원장이 그녀를 찾아와 강진 그룹이 보육원에 기숙사 건물을 지어주겠다고 해서 기숙사가 원래보다 덜 빠듯하고 더 많은 아이들을 수용할 수 있을 거라고 했었다. 기뻐하는 강서현을 뒤로 하고, 원장은 최금희가 보육원에서 아이를 몇 명 골라 강진 그룹에 입사시키겠다고 말했다고 했다. 그 중 한 명이 바로 강서현이었고. 하지만 당시 강진 그룹의 주요 산업은 하이 테크놀로지 제품이었기 때문에 그녀가 가고 싶어했던 디자인 분야와 전혀 어울리지 않아 거절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강진 그룹이 그동안 보육원을 후원해왔다는 생각에, 행여 자신의 거절로 인해 보육원의 지원이 물거품이 될까 봐 두려웠었다. 그래서 그녀는 잠시 꿈을 접고 강진 그룹에 입사한 것이다. 강진 그룹에서 일하는 동안, 강서현은 매일 대표님과 함께 야근을 하면서 아주 열심히 일했었다. 게다가 그녀의 총명함으로 인해 곧 회사에서 중요한 임무를 맡게 되었고 차재욱을 대신하여 많은 어려움을 해결했었다. 당시 그녀는 자신은 계속 이렇게 살아갈 거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날 밤의 그 파티 후에 우연히 차재욱과 잠자리를 가지게 되었고, 그날 밤의 잠자리 때문에 한 달 후 아이를 임신하기까지 했었다. 당시 그녀는 차재욱에게 이 사실을 알리지 않고 조용히 아이를 없애려고 했었다. 하지만, 뜻밖에도 차재욱은 그녀를 수술대에서 끌어내려 함께 가정을 꾸리면서 아이를 잘 키워보자고 약속했었다. 고아인 그녀에게 있어서, 자신의 가정을 꾸리는 것이 가장 큰 꿈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망설임 없이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결혼 후 그녀는 자신의 모든 사랑으로 차재욱과의 가정을 열심히 꾸려왔었다. 강서현은 책에서 나온, 사람은 노력과 진심을 다한다면 반드시 그에 따르는 보상을 받는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하지만 삶은 그녀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았다. 천신만고 끝에 딸을 임신한 그녀가 기쁨에 겨워 임신진단서를 들고 차재욱에게 보여주려던 순간, 차재욱은 그녀에게 이혼 합의서를 건넸다. 뿐만 아니라 가장 아꼈던 아들에게까지 버림을 받았었다. 그때의 그녀는 세상에 대한 실망이 극에 달했었다. 매일 밤 잠을 설치며 운명은 왜 항상 자신에게 이런 농담을 던지는 건지 묻기도 했었다. ‘내가 그토록 노력했는데, 그들은 여전히 왜 나를 원하지 않는 것일까?’ 그 충격은 너무나도 컸었다. 동시에 사랑하는 남편과 자신의 목숨을 걸고 낳은 아들에게 버림을 받았으니 그 고통을 어찌 이루 다 말할 수 있으랴… 때문에 강서현은 하루 종일 눈물로 밤을 지새웠었다. 그녀는 차재욱을 위해 힘들게 딸을 임신해, 그를 행복하게 해주려고 노력했지만, 그는 다른 여자 때문에 그녀와 이혼하기로 결정했었다. 아이를 없애고 차재욱과의 모든 인연을 철저하게 지우려고도 생각했었지만 그녀는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뱃속의 아이는 그녀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유일한 희망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나중에 이준을 만난 것이다. 이준은 그녀에게 그녀가 우울증에 걸렸다고, 계속 이런 상태라면 뱃속의 아이를 지킬 수 없을 것 같다고 알려줬었다. 우울증이 앓고 있는 엄마는 아이에게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차재욱이 그녀에게 가져다 준 것이었다. 그가 먼저 그녀를 배신하고 그녀에게서 아이까지 빼앗은 것이다. 또한 그녀가 다시는 꿈을 이룰 수 없게 만들었다. 그런데 이제와서 무슨 근거로 좋은 사람인 척 그녀에게 관심을 주는지 이해 할 수 없었다. 강서현은 이미 콩이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모든 원한을 내려놓은 상태였다. 차재욱이 자신과 딸에게 끼친 상처에 대해서도 따질 생각이 없었다. 그녀는 단지 딸의 병을 잘 치료하고 현재 생활을 충분히 즐기고 싶을 뿐이었다. ‘차재욱은 왜 또다시 내 생활을 방해하고 마음속의 상처를 가차없이 들춰내는 거야?’ 이런 생각에 강서현은 자신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졌다. 바로 그때, 하교 종소리가 울렸다. 강서현은 마음 속에서 끓어오르는 쓰라림을 삼키고 빠른 걸음으로 교실 문 앞에 도착했다. 그때 마침 차현승이 휴지를 들고 콩이의 콧물을 닦아주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네가 내 몸을 더럽힐까 봐 닦아주는 거야. 그게 아니었으면 신경도 안 썼을 거야.” 차현승은 콩이의 콧물을 닦아주며 한마디 했다. 거친 그의 손길에 콩이는 피부가 아려왔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차현승을 향해 씩 웃어보일 뿐이었다. 이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강서현은 괜히 머리가 복잡해졌다. 그녀는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을 다시 한번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콩이는 차현승이든 차재욱이든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모두 같은 핏줄이었다. 콩이는 마음속 깊은 곳에서 두 사람을 아주 좋아했었다. 잠시 후, 강서현은 마음을 가다듬고 콩이의 곁으로 다가갔다. “콩이야. 또 말썽을 피운 건 아니지?” 강서현은 콩이의 머리를 부드럽게 만지작거리며 한 마디 했다. 그 말에 콩이는 작은 머리를 가로저으며 차현승을 가리켰다. 차현승이 자신을 아주 잘 돌봐주었단 뜻이었다. “쳇. 누가 널 신경 쓴다고 그래?” 차현승은 차갑게 고개를 돌렸다. 겉과 속이 다른 그의 모습에 강서현은 화를 내지 않고 오히려 부드러운 말투로 한마디 했다. “고마워. 차현승 학생.” 차가우면서도 선을 넘지 않는 그녀의 행동은 마치 두 사람은 그저 평범한 선생님과 학생인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이런 그녀의 행동에 차현승은 아주 불쾌했다. 그는 코웃음을 치면서 고개도 돌리지 않고 교실을 나섰다. 하교 시간. 강서현은 아이들을 이끌고 교문 앞으로 걸어가 아이들에게 일일이 작별 인사를 고했다. 바로 그때, 진이나가 그녀의 눈앞에 나타났다. 그녀는 다른 학부모들과도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이나 씨, 그동안 잘 보이지 않던데요?” “요즘 감기 기운이 있어서 남편이 밖에 나가지 못하게 막았거든요. 저도 다른 애들한테 감기를 옮길까 봐 걱정이 됐기도 했고요.” “남편이 정말 잘해주는 것 같아요. 그나저나 결혼은 언제 하는 거예요? 우리 모두 축하주를 마시려고 기다리고 있는 중이에요.” “곧 올릴 거예요. 남편이 이미 준비하고 있어요.” 이 말을 듣고도, 강서현은 전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와 차재욱은 4년 동안 부부로 살아왔지만, 그녀와 차재욱이 부부였던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들은 혼인신고만 했을 뿐, 결혼식을 올리지 않았었다. 또한 매번 파티에 참석할 때마다 그녀는 차재욱의 아내가 아닌 비서 신분이었다. 그렇게 두 사람이 이혼한 지 일주일도 안 된 시기에 차재욱은 진이나와의 약혼을 발표했었다. 그제서야 강서현은 차재욱에게 결혼식을 올릴 시간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한 번도 자신과 결혼식을 올릴 것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런 생각에 강서현은 입꼬리를 치켜올리며 스스로를 비웃었다. 한편, 진이나는 미소를 짓고 있는 강서현을 발견하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강서현. 네가 언제까지 웃을 수 있는지 지켜보겠어.’ 잠시 후, 진이나는 강서현 앞으로 걸어가며 말을 걸었다. “강 선생님. 제 아들은 오늘도 말을 잘 들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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