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장
이 말을 들은 강서현은 자기도 모르게 손가락이 덜덜 떨려왔다.
하지만 이내 평정심을 유지하며 말했다.
“몇 년 동안 그림을 그리지 않아 디자인 감각이 많이 떨어졌어. 그러니까 미안하지만 다른 사람을 알아보도록 해.”
말을 마치고, 강서현이 막 자리에서 일어서려는데 차재욱이 그녀의 손목을 꽉 움켜쥐었다. 그는 그윽한 눈빛으로 강서현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림을 그리고 싶지 않은 거야 아니면 그리지 못하는 거야? 강서현. 너 나한테 뭐 숨기는 거 있어?”
그의 추궁에 강서현은 가슴이 저릿했다.
그녀는 차재욱 때문에 부상을 당했고 그 부상으로 인해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능력을 잃게 돼 더 이상 자신의 꿈을 이룰 수 없게 되었다.
강서현은 차재욱이 나중에 알고 마음속에 더 큰 부담을 떠안게 될까 봐 일부러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것이었다.
하지만, 그가 이혼할 때 자신한테 했던 말을 생각하면 누군가가 심장을 쥐어뜯는 듯 가슴이 아파왔다.
그는 진이나가 자기 때문에 더 이상 무대에 설 수 없기 때문에 그녀를 책임져야 한다고 했었다. 당시 강서현은 그 말을 듣고 자신도 당신 때문에 더 이상 꿈을 이룰 수 없다고 알려주고만 싶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차재욱의 마음속에 이미 다른 사람이 존재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런 비참한 방식으로 그의 동정을 얻고 싶지 않았다.
예전에 사실대로 말하지 않았으니, 지금도 여전히 말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이 일 때문에 다시 차재욱과 엮일까 봐 두려웠다.
이런 생각에 강서현은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디자인을 하려면 영감이 필요한데 미안하지만 지금은 딱히 떠오르는 게 없어. 그러니까 다른 볼 일 없으면 이만 놓아줘.”
“강서현. 4년 전 손을 심하게 다쳐서 그림을 그릴 수 없게 된 거 아니야? 누가 널 그렇게 해쳤는지 빨리 말해봐. 내가 반드시 널 대신해서 정의를 되찾을 거니까.”
그 말에 강서현은 차재욱의 손을 확 뿌리치며 입가에 비웃음을 지었다.
“정의를 되찾겠다고? 당신한테 그 말이 어울린다고 생각해? 당신 세계에 정의라는 것이 정말 존재했단 말이야? 민약 그렇다면, 당시 나한테 진이나의 방패막이가 되어달라고 부탁했을 때, 나를 속여 아이를 갖게 했을 때, 그런 다음 그 아이를 내 손에서 빼앗아갔을 때, 당신의 그 같잖은 정의는 어디에 숨어있었던 거야? 그게 아니라면 내 신분이 미천해서 나한텐 정의라는 단어가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한 거야? 이용하고 싶을 땐 이용하고, 이용 가치가 없어지면 쓰레기 버리듯 버렸으면서… 설마 내가 당신한테 고마워하라고 지금 나한테 이런 말을 하는 거야? 미안하지만 지금 당시 내 손을 이렇게 만든 사람을 찾아 법으로 처벌한다고 해도, 내 손은 다시 나아지지 않아. 그러니까 난 너에게 절대 고마워하지 않을 거야. 왜냐하면 이것들은 모두 네가 나에게 빚진 것이니까.”
이 말에 차재욱은 주먹을 불끈 움켜쥐었다.
“강서현. 네가 믿든 안 믿든, 아이는 정말 사고였어. 난 너를 함정에 빠뜨린 게 아니야. 너와 이혼할 때도 그저 어쩔 수 없이 그런 거고. 난 널 쓰레기 버리듯 버리고 싶지 않았어. 심지어 너한테 일자리까지 마련해 줬는데, 널 찾을 수가 없어서… 아무튼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든, 누가 옳든 틀렸든 당시 넌 내 아내였으니 네 손을 다치게 한 것은 다 내 잘못이야. 그러니까 나한텐 너를 도와 범인을 잡을 책임이 있고, 네 손을 치료해 줄 책임이 있어. 도대체 누가 너를 다치게 했는지 말해봐.”
그러자 강서현은 냉소를 지었다.
“자책할 필요 없어. 나랑 결혼한 건 다 진이나를 대신해 재앙을 막으려는 거였잖아. 난 내 손으로 차씨 가문의 은혜를 다 갚았으니 앞으로 다시는 내 삶을 방해하지 마.”
말을 마친 그녀는 차재욱에게 싸늘한 눈빛을 드리운 채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차재욱은 떠나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조금 전 그녀가 했던 말이 머릿속에 맴돌아 가슴이 아파왔다.
바로 그때, 그의 휴대폰이 울렸다.
김민우의 목소리가 휴대폰 너머에서 들려왔다.
“대표님. 강서현 씨가 4년 전에 손목을 다친 게 확실합니다. 물건을 들 수는 있지만 그림 같은 섬세한 작업을 요구하는 일은 할 수 없다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그 말에 차재욱은 괴로운 듯 두 눈을 감았다.
역시 그의 예상대로 강서현은 부상 때문에 꿈을 접은 것이었다.
‘그런데 손을 다친 사실을 왜 숨긴 것일까? 당시 강서현은 나를 아주 사랑했어. 무슨 일이 있으면 전부 나한테 말했었는데 왜 하필 이 일을 숨긴 것일까? 내가 그동안, 도대체 무엇을 놓친 걸까?’
“어떻게 다친 건지 알아?”
차재욱이 물었다.
“칼에 찔린 겁니다. 아마도 누군가 일부러 그런 것 같습니다. 칼이 신경을 건드려서 그런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제가 경찰서에 가서 물어보니, 그 시간대에 강서현 씨는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습니다. 누군가에게 당해 부상까지 입었는데 왜 법적 무기로 자신을 보호하지 않은 걸까요? 이건 강서현 씨 답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이 말에 차재욱은 이를 악물었다.
“어떻게 해서든 범인을 꼭 찾아야 해.”
“네. 대표님. 바로 처리하겠습니다.”
잠시 후, 그는 전화를 끊었다. 순간, 마음속에는 불길한 예감이 엄습했다.
그녀의 성격으로 누구의 소행인지 범인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고 해도 경찰에 신고하여 처리했어야 했다.
그런데 그녀는 왜 침묵을 선택했을까? 그리고, 도대체 무엇을 숨기려고 한 걸까?
이런 생각에 차재욱은 곧바로 휴대폰을 꺼내 백은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바빠?”
그의 목소리에 백은우는 미소를 지었다.
“해가 서쪽에서 떴네. 네가 먼저 나한테 전화를 하다니? 말해 봐, 무슨 일이야?”
“4년 전 일이야. 당시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고. 그래도 범인을 찾을 수 있어?”
이 말을 들은 백은우는 표정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누가 널 해친거야? 네 일이라면, 얼마가 걸리든 알아낼 수 있어.”
그러자 차재욱은 미간을 찌푸렸다.
“강서현 일이야.”
“강서현?”
백은우는 잠시 멈칫했다.
“두 사람은 이혼한 거 아니었어? 두 사람 왜 또 다시 엮인 거야?”
“4년 전 누군가가 강서현의 손을 칼로 찍고 도망가 버렸어. 그 일로 강서현은 다시는 그림을 그릴 수 없게 되어버렸고. 당시 강서현은 경찰에 신고도 하지 않고 나한테 상황을 말하지도 않았어서 너한테 혹시 범인을 찾을 수 있는지 도움을 청하고 싶어.”
그러자 백은우는 다급히 한마디 했다.
“뭐? 잠시만. 강서현 씨가 손을 그렇게 심하게 다쳤는데, 그걸 몰랐었던 거야?”
“외국에 출장을 갔었기도 하고, 말 안해줘서 몰랐어.”
“아니, 재욱아. 아무리 출장을 갔다고 해도 아내가 손목을 저렇게 심하게 다쳤는데, 돌아와서도 이상한 걸 못 느꼈어? 아니면 강서현 씨에게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었던 거야?”
백은우의 한마디 한마디는 마치 날카로운 칼날처럼 그의 마음을 갈기갈기 찔렀다.
당시 진이나가 자살 시동을 한 탓에 그는 줄곧 그녀의 곁을 지키느라 강서현에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가 돌아왔을 때, 강서현은 그저 작은 상처일 뿐이라고 말했었다. 그래서 그도 별로 신경 쓰지 않았었고.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의 그녀는 이미 징후가 있었던 것 같았다.
이런 생각에 차재욱은 주먹을 꽉 쥐었다.
“그 범인을 찾아줘. 대체 누가 강서현을 다치게 했는지 알아야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