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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장

여민석은 붉게 충혈된 눈으로 유소정을 노려봤다. 빙산 같은 얼굴에는 땀이 가득해 마치 방금 샤워를 마치고 나온 사람 같았다. “민석이 형, 어쩔 수 없게 됐네요!” 구정혁은 안타깝다는 듯 그를 부축해 앉히더니 손바닥을 들어 곧바로 뺨을 내려치려 했다. 눈 깜짝할 사이, 구정혁은 여민석의 뺨을 내려쳤고 분노가 극에 달한 여민석은 두 눈을 꼭 감은 뒤 있는 힘껏 구정혁의 손을 꽉 잡았다. 다시 두 눈을 뜬 그는 얇은 입술 새로 분노에 찬 소리를 질렀다. “유소정!” 분노가 가슴에 들끓자 여민석은 더 이상 앞이 어지럽지도 말을 못하지도 않았다. 되레 그에게 손이 잡힌 구정혁이 소리를 꽥꽥 지르기 시작했다. “아파, 아파! 여민석! 이거 놔, 아파죽겠네! 그게 다 도와주려고 그런 거잖아!” “날 도와주려는 거야, 아니면 누군가가 날 조롱하려는 거야?” 여민석은 구정혁의 손을 뿌리쳤다. 붉은 눈시울은 아직 가라앉지 않아 보고 있자니 섬뜩했다. 이민석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입구를 쳐다봤지만, 입구 쪽에는 이미 유소정은 보이지 않았다! 감히 날 놀려? “저기, 저기! 유미오가 형네 할아버지가 결혼하라고 한 그 사람이야?” 구정혁은 한껏 속상한 얼굴을 했다. 자신의 와이프가 여민석과 결혼을 한다니? 여민석은 잠시 숨을 고른 뒤 자리에서 일어나 긴 다리를 휘적이며 나갔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는 그 순간, 여민석은 재빨리 엘리베이터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유소정은 의외라는 얼굴로 그를 흘깃 쳐다봤다. 시선이 마주치자 그녀는 곧바로 시선을 돌렸다. 마치 아무 상관도 없는 낯선 이를 보는 듯한 눈빛이었다. 유소정은 하얗고 가는 손가락으로 1층 버튼을 누르려는데 여민석이 몸으로 막았다. 그녀의 손가락은 그의 배를 꾹 눌렀고, 딱딱한 촉감에 그녀는 귀를 붉혔다. “나랑 같이 가!” 여민석은 어둡게 가라앉은 얼굴로 말했다. “그리고 이번 프로그램엔 참가하지 마. 혼자 쪽팔리는 걸로도 모자라서 여씨 가문에까지 먹칠을 해야겠어?” 유소정은 고개를 들었다. 마스크 아래의 얼굴은 음산하게 가라앉았고 물기 어린 두 눈에는 실망이 가득했다. “프로그램 촬영이 바람보다 쪽팔린 가?” “유소정.” 여민석의 칠흑같이 검은 두 눈동자에 분노가 가득했다. 수치심이 분이 된 건지 아니면 영원히 그저 비굴하게 자신을 존경하며 쳐다보던 유소정이 이토록 대드는 모습이 싫은 건지는 알 수가 없었다. 유소정은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목구멍이 바늘 수천 개를 삼킨 듯 아파와 일부러 강한 척 말했다. “내가 공개적인 장소에서 당신과의 관계를 밝힐까 봐 걱정인 거야?” 여민석은 침묵했지만 번뜩이는 눈동자는 그녀의 말을 긍정했다. 유소정은 누군가가 심장을 콱 움켜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숨을 쉴 수 없었던 탓에 하얀 얼굴을 더욱더 창백하게 질렸다. 만약 그녀가 자랑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면 일찍이 혼인 신고를 했던 날에 이미 각종 언론에 소식을 퍼트렸을 것이다. 이제 곧 이혼할 마당에서야 밝히는 것이 아니라. “그래, 보잘것없는 가문 출신 주제에 몇 년 의술 공부를 한 게 뭐? 프로그램이 초대한 사람은 나라를 위해 복무했었던 군인들이야. 만약 네 실수로 무슨 사고라도 난다면 어떻게 감당하려고? 또 여씨 가문이 나서서 네 뒤 닦아줘야 하잖아?” 귀를 달콤하게 녹일 정도로 좋은 목소리에는 경멸과 무시가 가득 담겨 있었다. 유소정은 고래를 푹 숙인 채 단화만 쳐다보며 자신을 조롱하는 그의 말을 가만히 들어주었다. 아마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에게 무시당하고 아무런 쓸모 없다는 소리를 듣는 사람은 자신이 유일하지 않을까? 그는 단 한 번도 그녀를 이해하려고 한 적이 없었다. 심지어는 눈빛 한 번 그녀에게 머물렀던 적이 없었다. 심지어는 그녀의 기분은 신경도 쓰지 않은 채 가볍게 그녀의 자신감을 무너트렸다. 밀폐된 엘리베이터 안, 두 사람은 침묵했다. 여민석의 거친 숨소리가 귓가에 울렸지만 유소정은 딱히 행복하지 않았다. 되레 그의 말에 그녀는 지옥에라도 떨어진 듯한 기분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몸과 마음이 이렇게까지 아플 수 있단 말인가? 고통에 그녀는 심장마저 느리게 뛰는 것 같았고 숨조차 쉬기가 힘들었다. “돌아오길 바라, my baby….” 조용한 엘리베이터 안에 별안간 발랄한 벨소리가 울렸다. 유소정이 흘깃 쳐다보자 여민석은 화면을 확인하지도 않은 채 전화를 받는 게 보였다. “은서야.” 애정이 담긴 부드러운 목소리로 불러낸 이름에 연적인 유소정은 부럽기만 했다. 백은서는 아주 손쉽게 여민석의 다정함과 인내를 온전히 받을 수 있다는 것에 부러웠다. “그래, 프로그램은 걱정 안 해도 돼. 내가 대신 계약해 줄게.” 여민석은 다정한 목소리로 그녀를 달랬다. 유소정은 전화 너머의 애교 어린 여자의 목소리가 무슨 말을 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여민석의 말뜻은 알 수 있었다. 여민석이 계약을 파기하고 여씨 가문에 먹칠을 한다고 하는 말은 그저 자신이 떠나고 이 길을 백은서에게 넘겨주기만을 바라서 하는 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얼마나 우스운가, 자신의 남편은 애인을 만족시키기 위해 아내에게 양보를 하라고 하고 있었다. “그래, 좋은 소식 기다리고 있어.” 통화를 하는 여민석은 처음부터 끝까지 다정하기 그지없는 말투였다. 유소정은 마음을 다잡았다. 이미 눈시울에 차오른 눈물을 억지로 전부 삼킨 그녀는 고집스레 고개를 들더니 그의 몸을 비켜 1층 버튼을 눌렀다. 통화를 마친 것을 본 유소정은 미소를 흘리며 말했다. “걱정마시죠, 여 대표님. 전 제 발로 계약 해지하지 않을 겁니다. 여씨 가문과 엮일 일도 없고요. 이미 남자 친구가 있거든요.” 겨우 풀어졌던 엘리베이터 안 분위기는 곧바로 팽팽해지기 시작했다. 여민석의 미소는 옅어지기도 전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여민석은 사방으로 가라앉은 냉기를 뿜으며 조롱했다. “그렇게 외로움을 못 견디겠어? 3년 전처럼 수치도 모르고 굳이 굳이 빌붙게?” 고개를 들어 그 차가운 얼굴을 본 유소정은 그 온기 어린 입에서 어떻게 저렇게 차가운 말을 할 수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자신이 그를 미치게 사랑하기 때문에, 그리고 그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저렇게 자신을 모욕하는 건가? “띵!” 엘리베이터 문이 천천히 열렸다. 시선을 거둔 유소정은 냉담하게 먼저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자신이 이 3년간 했던 모든 것은 그의 눈에는 그저 수치를 모르고 빌붙는 행위에 불과했다. 여민석은 예민하게 그녀의 두 눈에 언뜻 스친 아픔을 발견하고는 순간 짜증이 일었다. 성큼성큼 다가간 그는 유소정의 팔을 덥석 잡더니 강제로 끌고 갔다. 프런트에서 일하고 있던 직원들은 유미오에게 먼저 말을 걸기도 전에 여민석이 그녀를 끌고 가는 것을 발견했다! 유소정은 조수석에 내동댕이쳐졌고, 여민석은 빠르게 차에 올라타더니 안전벨트를 한 건지 아닌지도 신경 쓰지 않은 채 곧바로 악셀을 밟았고 차는 빠르게 질주했다. “뭐 하는 거야?” 유 소정은 미간을 찌푸렸다. 차량이 익숙한 길을 달리고 있는 것을 본 그녀는 저도 모르게 몸을 떨기 시작했다. 붉은 입술이 하얗게 질리기 시작하더니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자신이 피 웅덩이에 쓰러진 채 무력하게 아이가 떠나는 것을 느낄 수 밖에 없었던 광경이 떠올랐다. “나 내려줘!” 유소정의 나른한 목소리에 드디어 분노가 서렸다. 여민석은 냉소를 흘렸다. 곁눈질로 그녀가 자신의 몸을 꼭 끌어안고 있는 것이 보였다. 유약하기 그지없는 모습이었다. “끼익!” 급정거를 하자 유소정은 유리에 그만 부딪히더니 다시 의자에 떨어졌다. “그렇게 굶주렸어? 시도 때도 없이 사람이나 꼬시고 다니게? 그렇게 원하면 내가 만족해 주지!” 차를 제대로 세운 여민석은 그녀의 가련하고 유약한 모습에 그대로 덮쳐들더니 거칠게 상의를 벗기더니 다른 손으로 다리 사이를 파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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