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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장

”미….” 흥분한 구정혁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처 말을 채 뱉기도 전에 옆에 있던 여민석은 미간을 팍 찌푸렸다. 날카로운 눈빛으로 마스크를 쓴 유소정을 위아래로 훑었다. 아무런 숨김도 없는 눈빛에 여민석은 조롱하듯 입꼬리를 올리며 냉소를 흘렸다. “가출을 하더니 이런 밀당이나 하는 거야?” “착각입니다.” 유소정은 평온하고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그를 훑어보다 이내 시선을 거두고 구정혁을 쳐다봤다. 구정혁은 감격에 겨워 늘 가지고 다니는 손수건으로 입을 막고 나서야 겨우 비명을 지르지 않을 수 있었다. 살아있는 유미오다! 여민석은 느긋하게 의자에 몸을 기댄 뒤 턱을 들고 그녀를 쳐다봤다. 고귀하고 낮은 목소리에는 불쾌함이 가득했다. “집에 올 거면 일찍 돌아오지 그래. 안 돌아올 거면 열쇠 내놓고.” 보라지, 분명 백은서에게 자리를 비워주고 싶은 거면서 꼭 저렇게 자신이 말을 듣지 않는 듯 굴었다. 유소정은 조용하게 빛을 등진 채 입구에 서 있었다. 흰 피부는 햇살을 받자 더욱더 하얗고 투명하게 보였다. 얼굴의 자잘한 모공마저도 선명하게 보였다. 흰 마스크 아래에는 굳게 닫힌 입술이 숨겨져 있었고 물기 어린 두 눈에는 아주 잠깐의 연약함이 스쳤다. 자신이 3년을 사랑한 남자는 사랑하는 여자를 지키기 위해서는 고귀하던 그도 저렇게 천박해질 수 있었구나! 심장 저편에서 저릿한 아픔이 느껴졌다. 마치 개미에게 쥐어 뜯기는 것 같은 기분에 그녀는 허리를 곧게 세우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래.” 유소정은 아무 감정 없는 검은 눈동자를 주시했다. 흰 원피스 아래의 긴 다리가 움직이더니 천천히 그에게로 다가갔다. 의자에 앉은 여민석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가 보기엔 저 여자는 또 시답잖은 밀당이나 하는 것 같았다. 그는 이런 유치한 수작을 도대체 왜 질리지도 않고 계속 부리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의 앞으로 다가간 유소정은 가방에서 3년을 가지고 다니던 키를 꺼냈다. 키를 꽉 움켜쥐자 차가운 키가 그녀의 나른한 손바닥을 깊게 파고들었지만 조금이 고통도 느껴지지 않았다. “돌려줄게.” 유소정은 나른한 목소리로 말하며 하얀 손바닥을 폈다. 막 펴졌던 여민석의 미간이 다시 한번 찌푸려졌다. 정말로 키를 돌려준다고? 그는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키를 들었다. 막 입을 열려는데 말을 뱉기도 전에 유소정이 별안간 훅 가까이 다가왔다. 갑자기 가까워진 거리에 여민석은 잠시 멈칫했다. 코끝에 맴도는 유소정의 옅은 약초 냄새에 가슴이 일렁거렸다. 그와 동시에 그는 왠지 모를 오만과 짜증이 일었다. 유소정은 왜 자신이 한 말을 지키는 법이 없는 걸까? 몸을 숙인 유소정은 그의 얼굴에 드러난 미세한 표정들을 살폈다. 아주 짧은 순간이지만 그녀는 여민석이 자신의 접근을 반기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챘다. “톡! 톡톡!” 조용한 회의실에 별안간 이상한 소리가 울렸다. 구정혁은 이해가 않는 다는 얼굴로 두 사람을 쳐다봤다. 유소정은 정확하고 빠른 손길로 약지와 중지를 사용해 여민석의 아문혈, 침골혈, 장혈혈, 뇌호혈 등 여러 혈 자리를 누르는 것이 보였다. 삽시간에 평온한 얼굴의 여민석의 안색이 창백해 지더니 얇은 입술이 보라색으로 물덜었다. 멀쩡하던 자세도 어지럽고 아파지는 머리에 살짝 웅크려졌다. 혈 자리를 누른 유소정의 아름다운 얼굴에 잠깐 짜증이 일더니 나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시끄러워.” 강제로 테이블에 엎드린 여민석은 강력한 의지력으로 다시 고개를 들었다. 어지러움에 그는 당장이라도 눈앞이 까맣게 물들 것만 같았다. 고통을 참고 있는 탓에 이마에 핏줄이 툭 불거져 있었다. 양손으로 테이블을 누르고 있었고 평온한 칠흑 같은 눈동자에는 폭풍이라도 인 듯 사나운 눈으로 유소정을 노려봤다. 구정혁의 멍한 시선이 여민석에게로 향했다 유소정에게로 향했다. “아이돌님!” 정신을 차린 구정혁은 손수건으로 입을 가렸다. 대부분의 의사들은 침으로 혈 자리를 자극하여 목적을 달성하지만 방금 전 유소정은 모든 혈 자리를 정확하고 충분한 힘으로 단박에 찔러넣어 여민석에게 반항할 기회도 주지 않았다. 이건 10년 정도의 노력이 없이는 절대로 불가능한 경지였다. 여민석은 어지러움을 참으며 입을 열려고 했지만 전혀 소리를 낼 수 없었다! “안녕하세요, 전 계약을 하러 온 유미오입니다.” 유소정은 부드러운 분위기를 풍겼다. 마치 방금 전 잔인하게 공격한 사람은 전혀 그녀가 아니라는 듯한 분위기였다. 구정혁은 감격에 겨워 그녀와 악수한 채 바닥에 엎어져 식은땀만 흘리는 여민석은 안중에도에도 없었다. “앉으세요, 제 아이돌님. 계약을 하기 전에 의술을 확인하는 절차가 필요한데, 방금 전 보인 수법을 봐서는 전혀 그럴 필요가 없을 것 같네요.” 구정혁은 존경심 가득한 미소를 지으면서도 공적이게 계약서를 꺼내 들었다. “이건 저희 프로그램 계약서예요. 확인해 보세요. 문제없으면 바로 계약하시죠.” “좋아요.” 유소정은 가방을 내려놓은 뒤 구정혁의 맞은편에 앉아 진지하게 계약서를 읽었다. 여민석은 눈을 가늘게 떴다. 어지러움에 유소정을 볼 때면 두 개로 보였고 그 뒤에는 여러 개로 보였다. 하지만 몇 개가 보이던 그 옆얼굴은 완벽하다 못해 시선을 옮길 수가 없게 했다. 마스크가 얼굴 대부분을 가리고 있지만 우뚝 솟은 콧대만은 가릴 수 없었다. 그 늘 기대감 어린 눈으로 자신을 보던 두 눈은 형형하게 빛이 나며 자신감을 뽐내고 있었다. 그렇게 한 순간, 여민선석은 유소정이 진흙 속에 오래도록 묻혀 있는 진주알같이 눈부시다는 생각이 들었다. “구정혁 씨, 계약서는 대부분 문제가 없네요. 하지만 이 중에 사용되는 의약품이라든지 기계 같은 걸 사인하기 전에 확인할 수 있을까요?” 유소정은 계약서를 닫은 뒤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전 구성 그룹과 협력하는 회사라면 절대로 빠지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업계 내부 사람이라면 외부 사람들보다 좀 더 디테일하게 살펴볼 수 있겠죠.” 잠시 고민하던 구정혁은 그녀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괜찮습니다. 당연한 거죠.” “그 외에도 사용하게 될 처방이나 레시피를 전 공개할 수는 없을 것 같아요.” 유소정은 다른 걱정을 꺼냈다. “사람마다 다 상황이 다르기 때문에 어떤 처방은 누구나 쓸 수 있지만 지금의 대부분 사람들은 자신의 신체를 소중히 여기지 않는 탓에 함부로 남용하다가는 부작용이 있을 수도 있어서요.” 사실 이것도 나중에 프로그램을 본 관중들이 스스로 약을 타서 먹는 경우를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구정혁은 두 눈을 빛내며 웃었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이런 걱정까지 해주시는 건 다 저희를 위한 거니, 괜찮습니다.” “알겠습니다.” 유소정은 이제 다른 문제는 없었다. 펜을 건네받은 그녀는 자신의 이름을 휘갈겨 내려갔다. 똑같은 계약서 두 벌에 전부 사인을 마친 뒤 유소정은 자신의 몫을 들고 밖으로 나가려 했다. 구정혁은 쿨하고 멋있는 유소정을 보자 존경심이 극에 달했고 막 자리에서 일어나 유소정을 바래다주려던 그때, 내내 테이블에 엎어져 있던 여민석은 어디서 나온 힘인 건지 단박에 구정혁을 붙잡았다. 양손으로 그의 어깨를 꾹 누르는 그의 핏발 선 두 눈에는 위협이 가득했다. 구정혁은 곧바로 그의 뜻을 알아차렸고 다급하게 그녀를 불렀다. “아이돌 님, 어떡하죠? 점점 더 심각해지는 것 같은데요. 말도 못 하고 계속 식은땀만 흘려요.” 입구까지 갔던 유소정은 의아한 얼굴로 등을 돌리다 그제야 여민석이 있다는 것을 깨달은 듯 말했다. “힘껏 뺨을 내려치면 그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어요.” 유소정은 나른하고 천진난만한 말투로 말했다. 뺨을 때리고? 힘껏? 구정혁은 그 모두가 빠져들 것 같은 눈동자를 깜빡이며 웃는 듯 마는 듯한 얼굴로 여민석을 쳐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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