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장
구정혁은 감격에 겨워하며 등을 돌리더니 블루투스 이어폰 너머를 향해 말했다.
“유미오의 전화번호 넘겨줘. 내가 직접 얘기할래, 그게 더 성의가 있잖아!”
휴대 전화를 받은 구정혁은 아무것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곧바로 번호를 눌렀고 떠나기 전에 고개를 돌려 여민석을 쳐다봤다.
“민석이 형, 미안해~ 내 아이돌이 왔거든. 예수가 온대도 절대로 못 비켜줘.”
여민석은 자리에서 일어나 큰 손으로 테이블을 내려쳤다. 커다란 손은 이미 사인을 마친 계약서를 덮었다.
사무실의 분위기는 순식간에 차갑게 얼어붙었다. 별안간 영하 20도까지 떨어진 듯한 공기에 온몸이 덜덜 떨렸다. 문 앞에 서 있는 서육마저도 그 영향을 받아 강인한 몸을 저도 모르게 흠칫 떨었다.
하지만 그 원흉인 구정혁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 듯 전화나 걸고 있었다. 그 더없이 잘생긴 얼굴에는 활기가 가득했다. 심지어 입을 열 땐 혹시라도 거친 자신의 목소리가 아이돌의 귀를 더럽히기라도 할까 몇 번이고 목을 가다듬었다.
“크~ 크흠!”
구정혁이 목을 가다듬었을 때, 통화가 연결되었다. 그는 흥분한 기분을 가라앉으며 온화하게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유미오 씨. 저는 ‘따뜻한 집’ 프로그램의 투자자입니다. 저희 프로그램의 초대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유미오 씨 덕분에 저희 프로그램은 분명 화제가 될 겁니다!”
구정혁은 비굴하고 공손한 태도에 다정함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미오 씨, 오늘 저희 회사로 와 계약하실 수 있을까요? 시간이 없으시다면 제가 직접 찾아뵙겠습니다! 주소를 알려주시면 반드시 30분 내에 찾아뵙겠습니다!”
여민석은 구정혁이 진심으로 도망칠 기세를 보이자 그의 옷깃을 단단히 잡은 뒤 블루투스 이어폰을 빼앗아 꼈다.
전화 너머로 예의 있지만 거리감이 느껴지는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감사합니다. 제가 마침 시간이 있어서요, 이따가 회사에서 뵙죠.”
여민석이 막 구정혁은 이미 자신과 계약을 했다고 말을 하려는데 어쩐지 그 목소리가 조금 익숙해졌다. 어쩐지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데 그다지 확신이 서지는 않았다.
구정혁은 마치 털이 바짝 선 고양이처럼 통화를 끊은 뒤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여민석! 이렇게 상도덕 없이 굴면 안 되지! 위약금 내겠다고 했잖아. 그럼 오히려 이득인 장사 아니야? 고작 10분도 안 돼서 200억을 버는데! 민석이 형, 적당히 해.”
비록 200억이나 공중 분해돼서 조금 마음이 아프기야 하지만 아이돌을 볼 수만 있다면, 그 아이돌과 앞으로 같이 일을 할 수만 있다면 그 정도쯤이야 없어져도 그만이었다!
서욱의 머리 위로 까마귀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애초에 과한 요구를 한 것도 구정혁이면서 계약을 파기하겠다고 하는 것도 구정혁이었다. 역시나 남자들 속의 공작새라고 불리는 만큼 마음이 아주 갈대였다.
“이 세상에 감히 LS그룹과 계약을 파기할 사람은 아직 없어.”
여민석은 떠나려는 구정혁을 가로막았다. 구정혁보다 한 뼘은 더 큰 여민석은 그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사무실의 기압은 다시 한번 낮아졌고 희박해진 공기는 숨조차 쉬기 힘들었다.
여민석의 날카로운 눈빛과 시선이 마주하자 구정혁의 안색이 돌변했다. 다음 순간, 180이 넘는 구정혁은 교태를 부리며 여민석의 어깨에 기대더니 애교 섞인 얼굴로 그의 단단한 팔뚝을 잡았다.
“그래, 그래~ 민석이 형아, 내가 잘못했어! 배상금도 주고, 나도 주면 되잖아!”
그 애교 가득한 말에 여민석의 안색은 거무죽죽하게 변하더니 굳은 몸으로 그를 밀어냈다.
“자기야!”
구정혁은 여민석을 향해 손 키스를 날렸고 그 목소리는 메아리쳤다.
“내가 잘못했다니까! 한 번만 봐줘, 응?”
“우웩.”
여민석은 손을 빼며 연신 뒤로 뒷걸음질 쳐 거리를 벌렸다.
“계약 파기해도 돼. 하지만 반드시 그 유미오인지 뭔지가 누군지 나에게 보여줘.”
어떤 사람이기에 목소리만 들어도 익숙하다는 기분이 들게 하고, 서울의 황태자라고 불리는 사람을 공손하게 만든 걸까?
구정혁은 난감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다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래! 하지만 미리 약속하는데 절대로 내 아이돌한테 무례하게 굴면 안 돼, 막말하면 안 돼!”
“그래.”
여민석은 대충 고개를 끄덕인 뒤 차 키를 들고 먼저 밖으로 나갔다.
구성 그룹 빌딩.
거대한 로비에는 수많은 직원들이 가득 모여 있었다. 모두 하나 같이 블랙 앤 화이트 톤의 오피스룩에 하이힐을 신고 있었다. 잔뜩 업신여기는 눈빛의 사람들은 마치 결투라도 벌이듯 둥그렇게 보여섰다.
인파 중앙에서 애절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 대리님, 제가 뭘 잘못했는데요? 정혁 도련님 좋아하는 사람은 길거리에 널리고 널렸는데 왜 절 퇴사 처리하는 건데요? 저 사람들한테 물어봐요, 저 사람들은 뭐 정혁 도련님 안 좋아한대요?”
“허억!”
여직원들은 숨을 헉하고 들이켜며 뒤로 한 바퀴 물러섰다. 마치 그녀에게 “구정혁을 좋아한다”라는 오명이라도 받는 게 무슨 모욕이라도 되는 것처럼 굴었다.
주 대리는 냉소를 흘리며 팔짱을 꼈다.
“똑바로 봤어? 정혁 도련님한테 다른 마음이 있다고 쓰여 있는 사람이 어딨다고? 누가 공적인 관계를 이용해 사리사욕을 채워서 정혁 도련님 옆자리 차지하려고 하는데?”
사퇴 당한 여직원은 눈물을 줄줄 흘리며 깜짝 놀란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 그럴 리가요? 어떻게 정혁 도련님을 안 좋아할 수가 있어요?”
“왜 그런 카사노바를 좋아해야 하는데? 동물원의 공작새가 엉덩이나 내밀고 있는 도련님보다 훨씬 낫지 않아?”
가장 밖에 있던 베이비 페이스에 글래머한 몸매를 지니고 있는 여직원이 무시하듯 입을 열었다.
그녀의 옆에 있는 청순한 미모의 여직원은 더 짜증을 냈다.
“저기요. 구성 그룹에 직원 복지 같은 게 마음에 들어서 온 게 아니었던 거예요? 건강 보험에, 월급의 3배인 연말 보너스, 매달 3일의 생리 휴가, 명절 때마다 월급만큼 내려오는 명절 보너스 이런 거요….”
여직원들은 그것들을 읊으며 일그러졌던 얼굴을 풀었다.
“그게 못난 남자보다 훨씬 낫지 않아요?”
“하.”
조용한 로비에 별안간 냉소가 들려와 모두 그 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
구정혁을 본 주 대리는 곧바로 미간을 찌푸렸다.
“얼른 가, 여기서 시간 낭비하지 말고. 정혁 도련님 쫓아다니고 싶거든 부디 사직을 한 뒤에 하렴!”
화끈한 몸매에 예쁜 미모를 가지고 있는 여자들은 일제히 등을 돌리더니 구정혁은 쳐다도 보지 않은 채 자기들끼리 의논을 시작했다.
“듣자 하니 우리 ‘따뜻한 집’의 고정 게스트로 최근 막 유학하고 돌아온 천재 의사 백은서가 결정됐다!”
“우와~ 세상에! 어쩜 이렇게 좋은 일이? 듣자 하니까 해외에서도 침술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의사들을 놀라게 했다던데, 역시 우리나라의 자랑이야!”
“그러게 말이야. 다만 그 유미오인지 뭔지는 정말 짜증 나 죽겠어. 유명해지고 싶다고 백은서가 발표한 의학 논문에 오류가 있다고 하다니. 천재가 실수할 리가? 분명 어그로 끌려는 걸 거야.”
……
구정혁은 원래 그녀들을 신경 쓰고 싶지 않았지만 그 사람들이 자신의 아이돌을 모욕하는 걸 듣자 곧바로 따져 물으려고 했다.
하지만 그는 여민석에게 이끌려 대표 전용 엘리베이터로 들어가는 바람에 입을 열 기회도 없이 엘리베이터 문이 닫혔다.
최애의 편을 들 수 없다니, 정말 화가 났다!
전용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자 유소정은 깔끔한 흰 원피스에 간단한 화장을 한 채 단화를 신고 안으로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따뜻한 집’ 계약 장소가 몇 층에 있죠?”
“유미오가 뭐라고… 어!”
한창 이야기를 나누던 프런트 직원들은 유소정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가 눈앞의 눈처럼 새하얀 여자를 보고 깜짝 놀랐다.
이, 이, 이 사람이 유미오라고?
하얗다 못해 빛이 나는 유소정은 마스크를 쓰고 있었지만 그 예쁜 두 눈은 반짝반짝 빛이 나고 있었다. 부드러운 분위기는 들리는 소문과는 전혀 달랐다!
“7층 704번 회의실이요….”
프런트 직원이 작게 중얼거렸다.
그에 유소정은 감사 인사를 했다.
“감사합니다.”
방금 그들이 토론 하는 소리를 유소정도 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을 향한 외부의 시선은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 그녀만 초심을 지키면 그만이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7층으로 향한 유소정은 704호 회의실의 문을 두드린 뒤 곧장 안으로 들어갔다.
“안녕하세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유소정은 회의실에 앉아있는 두 남자를 봤다.
그중 한 명은… 바로 여민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