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화
2층, 전이안이 안절부절못하며 전도현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아빠, 빨리 가 봐요. 누가 엄마 괴롭혀요.”
전도현의 표정이 굳어지더니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차분한 목소리였지만 듣는 이는 등골이 다 오싹해졌다.
“강서윤은 내 사람이야.”
홀 안에 있던 총괄 매니저는 발신자 번호와 경비원들에게 붙잡혀 있는 강서윤을 번갈아 보았다. 겁에 질린 나머지 하마터면 휴대폰을 떨어뜨릴 뻔했다.
‘세상에나. 어디서 굴러온지도 모르는 여자가 그분의 여자였어?’
총괄 매니저는 식은땀까지 흘리면서 급하게 명령했다.
“멈춰. 그 손 놔. 저분 다치게 해서는 안 돼.”
‘뭐지?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경비원들은 서로 얼굴만 멀뚱멀뚱 쳐다봤고 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믿을 수 없어 입을 쩍 벌렸다.
‘조금 전까지 경비한테 내쫓으라고 하더니 왜 갑자기 저렇게 당황하는 거지?’
총괄 매니저는 강서윤에게 다가가 허리를 굽혀 공손하게 말했다.
“강서윤 씨? 1분만 시간을 달라고 하셨죠? 얼마든지요. 저희 샹네르는 항상 공정하고 평등하며 신분에 귀천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참가 의사가 있는 분한테는 다 기회를 드려요.”
강서윤이 미간을 찌푸렸다.
‘전화 한 통 받았을 뿐인데 태도가 180도 달라졌네?’
그때 강서윤은 그녀에게 쏟아진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그러다가 2층 유리방 안에 있는 남자를 발견했다.
‘전도현? 저 사람이 왜 여기에 있어?’
전도현은 그녀를 보면서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전이안도 그녀를 향해 통통한 손을 흔들었다.
강서윤은 말문이 막혀버렸다.
‘귀엽고 마음도 따뜻하게 해주는 어린아이는 그렇다 쳐도 저 덩치 큰 남자는 볼수록 눈에 거슬린단 말이지. 어제 분명 포기하라고 말했었는데 오늘 또 나타난 걸 보면 일부러 날 쫓아다니는 건가? 이거 귀찮게 됐네.’
전도현의 얼굴이 눈에 띄게 일그러졌다.
‘다른 여자들은 나한테 매달리지 못해서 안달인데 강서윤은 왜 날 귀찮아하는 것 같지?’
눈치 빠른 총괄 매니저는 전도현을 발견하고 흠칫 놀라더니 이내 강서윤에게 물었다.
“강서윤 씨, 저희가 준비해야 할 게 더 있나요?”
“없어요.”
강서윤은 시선을 거두고 런웨이로 걸어갔다.
지금 가장 중요한 건 마지막 무대에 설 수 있는 기회를 따내는 것이었다. 강서진이 원하는 것이라면 몽땅 빼앗아야 했다.
사람들은 왜 갑자기 상황이 바뀌었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강서윤을 계속 비웃으며 훑어보았다.
‘저런 옷차림으로 벨라노아 모델이 되겠다고?’
‘정말 분수를 모르는구나. 기회를 준다고 해도 결국 망신만 당할걸?’
디자이너도 총괄 매니저에게 불만을 드러냈다.
‘어디서 굴러온지도 모르는 저런 여자한테 어떻게 기회를 줘? 저런 무명인한테 내가 디자인한 작품의 모델을 시킬 수 없어.’
디자이너가 항의했다.
“내 작품은 개나 소나 다 모델을 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만약 어디서 굴러온지도 모르는 여자를 모델로 정한다면 앞으로 다신 샹네르를 위해 작품을 디자인하지 않을 겁니다.”
말이 끝나자마자 갑자기 현장의 조명이 모두 꺼졌다. 사람들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런웨이로 향했다.
짧은 어둠이 지나간 후 런웨이 위로 옅은 녹색 빛이 쏟아졌다. 그리고 언제 가져다 놓았는지 나무 의자가 놓여 있었다.
강서윤은 맨바닥에 앉아 팔꿈치를 나무 의자에 기댄 채 가느다란 손으로 턱을 괴고 섬세한 옆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나른하게 기대앉은 다음 두 눈을 감았다. 에메랄드빛 원피스가 활짝 펼쳐져 복고적인 아름다움을 자아냈다.
입술에 붉은 립스틱을 발랐지만 전혀 속되거나 화려해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고고한 선녀처럼 맑고 차가운 분위기를 풍겼다.
어둠 속에서 수많은 반딧불이 그녀의 곁으로 날아갔다. 반딧불은 그녀의 속눈썹에 내려앉기도 하고 하얀 손목에 앉기도 하면서 꿈속의 세상 같은 환상적인 그림을 만들어냈다.
그녀가 목에 하고 있는 건 분명 벨라노아의 모조품이었지만 아름다운 광경과 그녀의 얼굴 덕분에 고급스럽고 정교하게 빛났다.
현장에 있던 사람들 모두 큰 충격을 받은 듯 넋을 잃은 표정이었다.
청순하고 여신 같은 분위기는 수수한 옷을 입거나 가식적인 미소를 지어야만 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붉은 립스틱을 발라도 맑고 깨끗한 피부와 나른하고 세련된 분위기를 감출 수 없어야 했다.
현장이 갑자기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고 오직 감탄과 숨소리만 가득했다.
무대가 끝나고 나서야 사람들은 정신을 차리고 박수갈채를 보냈다.
“너무 아름다워.”
“이게 진정한 벨라노아구나.”
디자이너도 황홀함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듯했다. 조금 전 했던 말을 잊은 채 흥분하며 연신 물었다.
“어디서 이런 보물을 구해 왔어요? 아까 한 말 취소할게요. 당장 계약해요. 꼭 저분과 계약해야 해요.”
2층에 있던 전이안도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폴짝폴짝 뛰었다.
“엄마 너무 예뻐요. 진짜 너무너무 예뻐요. 아빠, 얼른 엄마한테 가지 않고 뭐 해요? 엄마가 너무 예뻐서 지금 당장 쫓아가지 않으면 다른 남자가 빼앗아갈 거라고요.”
“서두르면 일만 망칠 수 있어.”
전도현은 전이안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차분하게 말했다.
“흥. 아빠가 나설 때면 이미 늦었어요. 역시 내가 직접 나서야겠네요.”
전이안은 툴툴거리면서 전도현의 손을 뿌리치고 쏜살같이 밖으로 뛰쳐나갔다.
전도현이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당장 잡아 와.”
“알았어.”
전건우는 황급히 일어나 전이안을 쫓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