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장
소정은이 퇴원하던 그날 날씨가 화창했고 도로 양쪽의 나무들은 단풍잎이 달려있어 아름답기만 했었다.
이석동은 직접 운전하여 소정은을 데리러 왔었다.
돌아가는 길 두 사람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아 분위기는 침울하기만 했었다.
어린 이소현은 뒷좌석에 앉아 창문을 향해 숨을 내쉬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었다.
어머니가 드디어 퇴원을 했다.
어린 이소현은 차창에 가족 세 명을 그려가며 얼굴에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소정은은 차창에 비춘 그림을 보자 안쓰러운 마음에 눈이 붉어졌다.
그녀는 냉큼 눈물을 감추려고 고개를 돌려 감정을 추스른 뒤 억지웃음을 지어냈다.
“며칠 뒤면 우리 소현이 생일인데 무슨 선물 갖고 싶어?”
차창에 엎드려 그림을 그리고 있는 이소현은 어머니의 물음에 또박또박 답했다.
“엄마, 산리오 갖고 싶어.”
“산리오?”
소정은은 부드러운 말투로 물었다.
“산리오라는게... 애견 강아지를 말하는 거야? 엄마는 그런 품종의 강아지를 들어본 적이 없어.”
“아니야.”
어린 이소현은 고개를 흔들었다.
“캐릭터 강아지야. 도자기로 만들고 싶어. 새론이 그러는데 장안 거리에 수공 가게가 생겼다고 하더라고. 거기에서 직접 만들고 싶어.”
이소현은 고개를 돌려 어머니를 힐끔했다.
“지난주에 설현이가 정한 오빠하고 같이 가서 두 개나 만들었대.”
소정은은 눈웃음을 보였다.
“알았어. 엄마하고 같이 가자.”
이소현 12살 생일날 눈이 내리고 있었다.
이소현은 어머니와 손을 잡고 나란히 그 가게에 들어섰다.
미리 무색으로 된 산리오 인형을 주문했었던 터라 그들이 도착하자 가게 주인은 준비된 도자기를 들고나와 이소현하고 어머니가 색을 입힐 수 있게 색상들을 준비해 주었다.
그건 처음으로 어머니와 함께 만든 물건이었다.
자신이 지니고 있던 산리오 사진하고 똑같이 만들어진 결과물을 보자 이소현은 흡족스러웠다.
모녀는 가게에서 나와 인근에 있는 빵 가게로 찾아갔다.
소정은의 왼손에는 케이크를 들고 있었고 오른손에는 이소현의 손을 잡은 채 흩날리는 눈 속에서 한참을 걸어가다 소정은은 발걸음을 멈추고 애틋한 눈빛으로 이소현을 바라보았다.
“소현아, 엄마가 우리 소현이 엄청 사랑해. 정말 하늘만큼 땅만큼 사랑해.”
소정은의 목소리는 점점 낮아지더니 바람 속에서 사라져갔다.
이소현은 코끝이 빨갛게 얼어 있었다.
어머니가 예전에도 자주 자신을 사랑한다고 애정 표현을 해줬던 터라 이소현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대뜸 답을 해주었다.
“엄마, 소현이도 엄마 무지 사랑해.”
코끝이 찡해진 소정은은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우리 소현이가 아직 12살밖에 안 됐는데 앞으로 내가 없으면 어떡하려나...
이소현의 자신의 눈물을 볼까 소정은은 고개를 휙 돌리고 계속하여 걷기 시작했다.
엄마의 손을 잡고 붐비는 장안 거리를 걸어가다 보니 그들은 야외 주차장에 도착했다.
이석동의 자동차가 거기에 주차되어 있었다.
이소현은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아버지가 눈보라 속에서 슬프고도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담배를 피우고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평소에 그러한 모습을 거의 본 적이 없었던 터라 의아하던 그때 이석동은 그들 모녀가 다가오는 걸 보자 얼른 슬픔을 감추고 평온함을 되찾았다.
이소현은 자신이 잘못 본 줄로 알고 있었다.
이석동은 담배를 끊고 말을 건넸다.
“왔어?”
소정은은 가볍게 응했다.
그날 밤 이석동이 직접 요리를 했다.
세 식구는 식탁에 둘러앉아 화기애애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고 이소현은 왕관을 쓴 채 소원을 빌었다.
사고는 케이크를 먹는 도중에 벌어졌다.
소정은은 케이크 한 조각을 먹자마자 갑자기 피를 토하기 시작했다.
화들짝 놀란 이소현은 케이크를 새로 산 구두에 떨어뜨렸다.
이석동은 소정은을 부둥켜안으며 목이 메어갔다.
“정은아, 정은아, 정신 차려! 우리 당장 병원으로 가자!”
아주머니는 허겁지겁 120에 전화를 하고 있었고 머리가 텅 비어버린 이소현은 멍하니 옆에 서 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건강을 회복한 거 아니었어?
엄마가 왜 갑자기 피를 토한 거지?
병원에서 퇴원해도 된다고 했잖아?
엄마 이제 괜찮아진 거 아니었나?
구급차는 바로 도착했다.
간호사들은 소정은을 구급차에 싣고 있었다.
차에 오르기 전 이소현은 눈물을 글썽이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어머니가 입을 뻥끗하고 있다는 걸 확인하게 되었다.
참을 수 없는 고통으로 말을 내뱉지는 못해도 어머니의 입모양으로 이소현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아차렸다.
어머니는 미안하다고 했다.
순간 이소현은 눈물을 펑펑 쏟으며 미친 듯이 달려 나갔다.
“엄마, 엄마, 가지 마....”
일분일초가 시급한 구급차는 이소현이 차에 오르기 전 자리를 훌쩍 떠나버렸다.
이소현은 어머니를 태운 구급차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미친 듯아 쫓아가고 있었다.
바로 그날 밤 소정은은 세상을 떠나버렸다.
이석동은 밤새도록 소정은을 지키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었다.
그러한 일들을 이소현은 모르고 있다.
이소현은 눈밭에 넘어져 구급차를 놓쳐버렸고 걱정이 되어 달려 나온 아주머니가 이소현을 방으로 데려갔다.
같은 날 고열이 난 이소현은 밤새 엄마를 부르며 간헐적으로 울음을 터뜨리곤 했었다.
그러다 다음 날 아침에 깨어나자 어머니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었다.
이소현은 온기 하나 없는 어머니의 시체를 마주할 수가 없어 병원으로 가지 않았었다.
한동안 그녀는 어머니의 시체를 확인하지 않았으니 어머니가 사망한 것이 아니라 외딴곳으로 출장을 간 거라며 스스로를 속이고 있었다.
이소현한테 있어서 자상하고 웃음기 가득한 생기 넘치는 어머니는 영원히 살아있는 기분이었다.
소정은이 떠난 뒤로 이소현은 도자기 인형만 품에 끌어안고 제대로 끼니도 챙겨 먹지 않았었다.
졸리면 자고 깨어나면 눈물을 훔치는 게 일상이었다.
이석동도 하룻밤 사이에 열 살이나 늙어진 듯했고 눈빛에 생기가 없는데다 머리카락도 희끗해져 딸을 돌볼 겨를이 없었다.
나중에 이석동은 우울증 진단까지 받았었다.
이소현은 이석동이 이번 생에 절대 다른 여자하고 결혼하지 않을 거라 여겼었다.
필경 어머니를 그토록 사랑하는 사람이었는데 어떻게 다른 여자를 마음에 품을 수가 있겠는가!
그런데 뜻밖에도 2년 뒤에 이석동은 어머니의 가장 절친이었던 여자를 아내로 삼았다.
그때만 해도 이소현은 심하게 소동을 부리며 집을 나와 학교 기숙사에서 지냈었다.
방학이 되어 비록 집에 돌아가긴 했지만 그들과 아무런 대화도 하지 않고 방 안에 틀어박혀 있었었다.
그러다 대학에 입학하고 2년이란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이석동하고의 사이가 가까스로 완화되었었는데 그녀가 졸업하자마자 이석동이 강씨 가문과 혼사를 치러야 한다고 하는 탓에 그들 부녀의 사이가 설상가상으로 악화되었던 것이다.
이석동도 단단히 화가 난 모양이었다.
예전 같으면 이소현이 원하는 대로 다 들어주곤 했었는데 혼사에 관련해서는 그도 고집을 꺾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었다.
심지어 이소현의 카드를 정지시키면서까지 그녀를 집에 돌아오게 만들었었다.
사실 이소현한테 있어서 혼사는 그저 빌미일 뿐 그녀가 가출한 진정한 이유는 이석동이 다른 여자와 결혼했다는 것 때문이었다.
그는 어머니를 배신했다.
이소현은 이석동이 자신을 집안에서 쫓아내려고 이토록 혼사를 주선하는 거라 여겼었다.
그로 인해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가출했었던 건데 3년이란 시간이 흐를 줄은 생각지도 못했었다.
이 도자기 인형은 그녀가 줄곧 지니고 다녔었다.
어머니가 생전에 남기고 간 가장 귀한 선물이라 그녀는 자신의 정신적 의지로 삼았었다.
그런데 그 선물이 깨져버렸다.
이소현의 마음도 갈기갈기 찢겨지는 기분이었다.
...
울음을 멈춘 이소현은 상황을 수습하고 싶었다.
최고의 복원사를 찾는다면 방법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조각들을 사진으로 찍어 인스타에 올렸다.
[최고급 복원사를 찾습니다.]
강성 쪽에 이소현의 인맥이 넓었다.
몇몇 친척들은 대단한 어르신들이었고 절친들도 명문 집안의 천금이나 도련님들이라 복원사를 찾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사진을 올린 지 얼마 되지 않아 강지태의 전화가 걸려 왔다.
이소현은 그가 복원사를 추천할 것이라 생각하여 냉큼 전화를 받았다.
강지태가 걱정스레 물었다.
“소현아, 다쳤어?”
이소현은 어리둥절해 있다 이내 정신을 차렸다.
도자기 파편 위에 핏자국을 닦아내지 못했던 것이다.
“아니, 내가 흘린 피 아니야.”
강지태가 재차 물었다.
“무슨 일이야? 아주머니가 주신 도자기가 왜 깨진 거야?”
이소현은 입을 다물었다.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지 막막했다.
그것보다 더욱 놀라웠던 건 강지태가 파편으로 그녀의 어머니가 주신 도자기라는 걸 알아차렸다는 점이었다.
잠시 후 그는 단호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지금 공항으로 갈 거니까 기다리고 있어. 해성으로 찾아갈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