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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장

통화를 마치고 난 이소현은 오늘 밤에 있었던 일들을 곰곰이 회상해 보았다. 주하영은 왜 그녀가 샤워하는 틈을 타 방에 들어왔던 걸까? 분명 둘러보려고 들어온 건 아닐 테고 뭔가 다른 목적이 있는 게 분명하다. 이소현은 방을 한 바퀴 돌아보며 잘 배치된 물건들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깨진 도자기 인형 외에는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 순간 그녀는 침대 머리맡에 있는 우유 한 잔에 시선이 쏠렸다. 그녀는 잠을 자기 전에 우유를 마시는 습관이 있었다. 샤워하기 전 아주머니한테 데워달라고 부탁했던 우유라 샤워를 마치고 마시려던 거였다. 도자기가 깨지기 전에 그 우유는 이미 침대 머리맡에 놓여 있었다. 주하영이 도자기를 깨뜨렸다는 건 분명 주하영이 그 시각 침대 머리맡 주위에서 어슬렁거렸다는 뜻이다. 어쩌면 이 우유에 주하영이 무슨 짓을 했을지도 모른다. ... 3시간이 흘러 강지태는 해성에 도착했다. 이소현이 전화를 받고 있을 때는 강지태가 경화원 별장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이소현은 며칠 전 정리해 두었던 물건들을 별장 밖으로 버리고 있었다. “지태 오빠, 오늘 밤 여기에 있고 싶지 않아.” 이소현은 통화를 하는 동시에 별장을 나서고 있었다. 아직 많은 물건들을 채 버리지 못하기도 했고 아주머니가 이 시간쯤이면 쉬고 있을 테니 혼자 해결하는 게 낫다고 여긴 것이다. 강지태는 더 따져 묻지도 않고 알겠다고 했다. 이소현이 물었다. “호텔 잡았어?” 강지태는 한 호텔 이름을 얘기했다. “알았어. 그럼 나도 그 호텔에서 방 하나 더 잡을게. 이리로 오지 말고 이따가 호텔에서 만나.” 그녀는 오늘 밤 버릴 것들은 버리고 미리 정리해 놓은 짐들을 챙겨 이 별장을 떠날 셈이었다. 고진우하고 끝낼 시간이 다가왔다. 이소현은 캐리어를 트렁크에 넣고 휴대폰을 꺼내 온라인으로 방을 예약하려고 했는데 그 호텔에는 빈방이 없었다. 검색을 해 봤더니 내일 부근 학교에서 대형 시험을 주최하고 있는 탓에 몇 킬로 범위 내의 호텔들은 전부 만원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휴대폰을 훑어봤더니 저급 호텔만 하나 남아있었고 댓글에 올라온 사진들로 보아 전부 불만스럽다는 태도였다. 그중 한 댓글 [방음이 너무 안 돼요. 한밤중에 옆방 커플들 소리가 얼마나 선명한지 생방송을 보는 기분이었다니까요. 밤새도록 잠도 제대로 이루지 못했어요.] 이소현은 금방 이해했다. 내일 오후 3시에 재판이 열리는데 차로 가도 약 세 시간이 걸린다. 세수하고 밥 먹을 시간을 충족하게 고려한다면 적어도 그녀는 10시에 깨어나야만 한다. 그런데 지금 시각은 벌써 저녁 11시였고 이따가 강지태를 만나 얘기를 나누다 보면 휴식 시간이 얼마 남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한밤중에 소음으로 잠을 설치게 되면 내일 분명 졸릴 것이다. 고민 끝에 그녀는 강지태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그 호텔에 빈방이 없어. 부근 호텔도 다 만실이라 오빠가 방 하나 더 예약해 주면 안 돼?] 고급 호텔에서 제공하는 일반 객실은 없어도 고급 스위트룸은 귀빈들의 시급한 상황에 예약할 수 있게 준비해 두곤 한다. 더군다나 강지태는 강씨 가문의 도련님인데다 강준 그룹 대표이니 방을 예약하는 건 쉬운 일이다. 강지태의 답장이 도착했다. [내 방은 펜트하우스야. 복층이라 침실이 위층에 하나, 아래층에 하나로 마련돼 있어. 괜찮으면 하룻밤 내 방에서 보내는 게 어때?] 이소현은 망설여졌다. 3년이나 얼굴 한 번 보지 못했었는데 이렇게 만나자마자 같은 방을 쓴다고? 그런데 그리로 안 가면 이 한밤중에 어디에 가서 방을 예약할 수 있겠는가! 복층이면 괜찮지 않나? 어차피 계단을 사이에 두고 있잖아... 몇 분 고민 끝에 이소현은 그 제안을 동의했다. 그녀가 시동을 걸고 운전하려던 그때 고진우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거즈로 여러 번 감겨져 있는 주하영의 손을 찍은 사진들이었다. [이소현! 이번에는 지나치게 행동했어! 당장 병원에 와서 하영이한테 사과해!] [사과하지 않으면 절대 널 용서하지 않아! 얌전히 와서 사과하면 별장에서 지낼 수 있게 해줄게.] 피식 코웃음을 터뜨린 이소현은 답장하지 않고 과감하게 그의 번호를 차단해 버렸다. ... 병원 안 고진우는 화면에 선명하게 올라온 빨간색 느낌표를 보며 눈빛이 차갑고도 매섭게 변해갔다. “Ruan. 님께서는 친구 인증을 요청하셨습니다. Ruan. 과 대화를 하고 싶으시면 친구 신청을 하시기 바랍니다. 상대방이 신청을 허락하시고 나면 두 분은 대화를 이어가실 수 있으십니다.” 이소현이 그를 삭제했다! 화가 치밀고 있는 고진우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간댕이가 부었네! 감히 나를 삭제해! 침상에 누워있는 주하영은 음산한 고진우를 보며 입을 열었다. “진우야, 왜 그래?” 고진우는 정신을 가다듬고 무뚝뚝하게 답하고 있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주하영은 따져 묻지 않고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고진우를 주시하고 있었다. “진우야, 손이 망가진 거 아니야? 설마 앞으로 피아노를 칠 수 없게 된 거야?” 전부터 피아노를 배워왔던 주하영은 유명한 음악 학원을 다니려고 해외로 유학을 갔던 것이다. 귀국한 후 국내에서 인기 있는 동영상 플랫폼에서 계정을 운영하기 시작해 지금은 100여만 명의 팔로어를 보유한 인플루언서로 활동하고 있다. 그 말에 표정은 다소 부드러워진 고진우는 눈빛에 약간의 동정심과 애정이 드러났다. “아니야. 피부 외상이지 근육이나 뼈를 다친 건 아니래. 며칠 뒤면 퇴원할 수 있어.” 주하영은 눈물을 글썽였다. “정말이야? 일부러 날 달래려고 그런 말 하는 건 아니지?” 고진우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담거렸다. “그런 거 아니야.” 주하영은 고진우의 시선을 마주하며 억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진우야, 만약에 말이야, 만약에 내가 더 심하게 상처를 입어서 피아노를 칠 수 없게 되면 이소현을 용서할 수 있어?” 고진우는 날카로운 눈빛을 보내며 답했다. “지금 입은 상처로도 이소현이 사과하기 전까지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야. 그리고 정말 네가 피아노를 칠 수 없게 되면 이소현이 응당한 대가를 치르게 만들 거거든.” 눈물이 그렁그렁한 주하영은 고진우의 어깨에 기대어 연약한 척하고 있었다. “진우야, 날 생각해 주는 사람은 너밖에 없어.” 고진우는 주하영을 품에 안고 있으나 머릿속에 맴돌고 있는 사람은 이소현이었다. 방금 별장에서 다신 꼴 보기 싫으니까 별장을 나가라고 했던 말들이 심했던 건 아닌지 약간의 후회가 밀려왔다. 허나 먼저 주하영을 다치게 한 사람은 이소현이가 잘못한 사람도 이소현이다! 아마도 그녀를 달래러 와주길 바라는 뜻으로 친구를 삭제한 모양인데 이번에는 절대 달래주지 않을 것이다. .... 호텔 1층 로비에 도착한 이소현은 강지태가 눈에 들어왔다. 검은색 셔츠와 정장 바지를 입고 있는 그는 넓은 어깨에 좁은 허리에 완벽한 몸매를 지닌 것도 모자라 훤칠한 키를 뽐내고 있었다. 준수한 외모는 3년 전하고 다를 바가 없었다. 역시 눈을 호강하는 외모였다. 그의 옆에는 양복 차림의 한 남자가 서 있었고 그보다 머리 하나가 작은 것이 아마도 비서인 듯하다. 강지태는 그녀한테로 성큼성큼 다가와 그녀의 손에 들린 캐리어를 받아들었다. “소현아, 괜찮아?” 이소현은 입술을 오므렸다. “괜찮아.” “대표님, 먼저 올라가 볼게요.” 강지태 옆의 비서가 깍듯이 말을 건네고 있었다. 강지태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5성급 호텔의 펜트하우스는 호화롭게 꾸며져 있었고 시야가 탁 트여 창문 앞에 서면 해성 전체의 야경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었다. “소현아, 위층에서 지낼래? 아니면 아래층에서 지낼래?” 이토록 잘생긴 남자와 같은 방을 써야 된다는 어색한 기분으로 인해 이소현은 잔뜩 긴장해 있었다. “어디든 상관없어.” 낮은 웃음소리를 들은 것 같지만 이소현은 강지태와 감히 눈빛도 마주치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내 그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그럼 위층에서 자고 있어. 필요한 거 있으면 언제든 말해.” 이소현은 얼굴이 빨개졌다.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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