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장
재판이 열리기 전날.
욕실에서 샤워를 하고 있던 이소현은 밖에서 무언가가 깨지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
그녀는 재빨리 몸의 거품을 씻어내고 잠옷을 입은 채 욕실을 나왔다.
침실 안에는 아무도 없었고 바닥에는 도자기 부스러기만 널브러져 있었다.
이소현은 깨진 물건이 어머니가 생전에 그녀한테 선물했었던 도자기 인형이라는 걸 재빨리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건 그녀가 12살 되던 해에 어머니와 함께 수공업 매장에 가서 만든 연한 파란색의 옥계건 도자기였다. 도자기 뒤에는 그녀와 어머니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고 말이다.
바닥에 널브러진 파편을 보는 순간 이소현은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었다.
“누구야!”
그녀는 버럭 소리를 지르며 침실 문을 나섰다.
“둥둥둥”
이소현은 고진우의 방문을 세차게 두드리고 있었다.
“고진우! 주하영! 너네 둘 중 누가 내 방에 들어왔던 거야!”
방문을 열고 난 고진우는 짜증이 서린 태도였다.
“한밤중에 뭐 하는 거야? 잠 좀 자자!”
이소현은 당장이라도 사람을 죽일 듯한 표정으로 식식거리고 있었다.
“고진우! 너 방금 내 방에 들어왔었어?”
“누가 네 방에 들어가?”
고진우는 미간을 찌푸렸다.
“괜한 사람 잡지 마. 방금 방에서 회사 계약서 보느라 나간 적도 없어.”
“네가 아니면 주하영이겠네!”
이소현은 고진우를 뒤로 하고 곧장 주하영의 방으로 걸어갔다.
주하영의 방은 맨 끝에 위치해 있었다.
이소현의 노기등등한 모습에 무슨 일이라도 벌어질까 걱정이 앞서는 고진우는 그녀의 뒤를 따라나섰다.
“주하영! 문 열어!”
이소현은 주하영의 방문을 걷어차고 있었다.
고진우는 어리둥절해졌다.
전에 알던 이소현이 맞는 건가?
무슨 일인데 이토록 화가 난 거지?
주하영은 느릿느릿 문을 열었다.
“이소현 씨! 무슨 난리예요?”
이소현은 주하영의 손목을 부여잡고 자신의 방으로 끌고 갔다.
발버둥 치고 있는 주하영은 비틀거리며 그녀한테 끌려가고 있었다.
“이거 놔! 이소현! 이거 놔!”
이소현은 방으로 들어와 그를 땅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아!”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한 주하영은 한쪽 무릎이 캐비닛에 부딪히게 되었다.
“이소현! 미쳤어?”
주하영은 무릎을 감싼 채 버럭 소리를 질렀다.
“네가 내 도자기를 깨트린 거지?”
이소현은 기세등등한 자태였다.
“방금 내 방에 왜 들어왔어?”
마음에 찔린 건지 주하영은 눈빛을 피하고 있었다.
“나... 아니야. 방에서 나오지도 않았었어. 함부로 사람 모함하지 마.”
이소현은 주하영의 눈을 쏘아보며 싸늘하게 입을 열었다.
“그래? 방금 욕실에서 나올 때 침실 문틈 사이로 베이지색 긴 치마를 봤었거든.”
“거짓말! 아까 회색 치마를 입고 왔었거든! 이 베이지색 치마는 내가...”
생각을 거치지 않고 말을 내뱉은 주하영은 자신이 말실수했다는 걸 깨닫고 갑작스레 분노하고 있었다.
“이소현! 사람 떠보지 마! 내가 무슨 치마를 입었던 건지 본 적도 없잖아!”
“네가 맞는 거지?”
이소현은 날카로운 눈빛을 쏘아붙였다.
“그 베이지색 치마는 방금 갈아입었던 거네?”
냉기가 가득 서려 있는 이소현의 말투는 차디찬 얼음장과도 같았다.
“내 방에 왜 왔냐고 묻잖아?”
주하영은 그 눈빛에 놀라 몸서리를 쳤다.
“그냥... 그냥 둘러보려고 온 거야...”
“이 한밤중에 뭘 둘러보려고 온 건데?”
주하영은 자신이 한 짓이라도 들킬까 침을 꿀꺽 삼키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나는... 나는...”
“그만해!”
고진우는 주하영의 앞을 가로막았다.
“이소현! 시비 걸지 마! 도자기가 깨졌을 뿐이잖아? 깨졌으면 하나 더 사면 되지. 왜 하영이한테 난리를 피우는 건데?”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청량한 따귀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소현은 고진우의 뺨을 힘차게 내리쳤다.
고진우하고 주하영은 얼떨떨해졌다.
“꺼져!”
이소현은 고진우한테 소리를 질렀다.
“네까짓 게 뭔데 나 대신 이년을 용서하는 거야?”
뺨을 맞은 고진우를 보며 화가 치민 주하영은 자신의 앞을 가로막은 고진우를 옆으로 밀치고 이소현과 대치했다.
“왜 무고한 사람을 때려?”
퍽 하는 소리가 재차 울려 퍼졌다.
“너도 꺼져!”
주하영의 얼굴에는 순식간에 발그레한 손바닥 자국이 찍혀 있었다.
뺨을 얻어맞은 주하영은 마음이 조급해져 이대로 물러설 수가 없었다.
그녀는 눈을 부릅뜬 채 이소현한테 뺨을 날리려고 했지만 이소현은 그녀의 팔목을 잡고 땅바닥에 내동댕이쳤다.
헌데 공교롭게도 그녀의 손이 방금 깨진 파편 위에 눌려 피가 흐르고 있었다.
“아, 내 손! 내 손!”
주하영은 비명을 질렀다.
고진우는 황급히 다가가 주하영의 상처를 살폈다.
“하영아, 괜찮아?”
“인과응보야!”
이소현의 눈빛은 서늘했다.
“네가 깨트리지만 않았어도 상처 입지 않았을 거잖아.”
“이소현! 오늘은 좀 지나치네!”
고진우는 이소현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하영이한테 사과해!”
이소현은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
“저년이 먼저 나한테 사과해야지! 내 물건을 깨트린 장본인이잖아.”
“진우야, 아파.”
주하영은 고진우의 품에 안겨 눈물을 펑펑 쏟아냈다.
“병원에 데려다줘. 너무 아파.”
“하영아, 조금만 참아. 지금 당장 병원으로 데려다줄게.”
주하영을 끌어안은 고진우는 이소현을 스쳐지나던 찰나 이소현을 차갑게 쏘아보며 음산한 말을 건네고 있었다.
“다신 보고 싶지 않으니까 당장 이 집에서 나가.”
“그래.”
이소현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시원스레 답하고 있었다.
발걸음을 멈칫한 고진우는 이소현이 어딘가 이상하다는 기분이 들었다.
허나 주하영의 손에서 피가 흐르고 있으니 다른 것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는 이소현을 그윽한 눈빛으로 뒤돌아보고는 이내 아래층으로 급히 내려갔다.
두 사람이 떠나고 나자 방 안은 고요해졌다.
도자기 파편 옆으로 걸어간 이소현은 부들부들 떨리는 몸을 웅크리고 앉았다.
눈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엄마... 미안해... 엄마가 남기고 간 선물을 내가 소중히 간직하지 못했어... 미안해...”
넓은 방 안에서는 그녀의 흐느끼는 울음소리만 울려 퍼졌다.
이소현이 12살 되던 해에 어머니가 중병을 앓게 되었다.
부드럽고 상냥하고 항상 얼굴에 웃음이 떠나질 않던 어머니가 병마에 시달려 날이 갈수록 초췌해지고 뼈만 앙상해졌었다.
그러다 이소현이 초등학교에 입학한 뒤로는 하교만 하면 집이 아니라 병원으로 향했었다.
어머니인 소정은의 병상 옆에서 그녀는 학교에 있었던 재미나는 일들을 털어놓았고 선생님이 배워준 노래를 불러주곤 했었다.
“엄마, 언제면 퇴원할 수 있는 거야?”
어린 이소현은 은은한 슬픔이 숨겨져 있는 맑은 눈동자로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벌써 반년이나 병원에 입원해 있었는데 건강은 점점 악화되어 가고 있었다.
소정은은 어린 이소현의 머리를 쓰담거리며 온화한 목소리로 답했다.
“선생님 말로는 곧 퇴원할 수 있다고 했어.”
“정말이야?”
어린 이소현은 눈빛을 반짝거리더니 조심스레 물었다.
“그래.”
창백한 입술 색에 핏기 하나 없는 소정은은 부드럽고도 단호한 눈빛으로 답해주었다.
“며칠 뒤에 엄마가 퇴원하면 우리 같이 소현이 생일 파티 하자.”
“좋아!”
어린 이소현은 그 말을 굳게 믿었었다.
어머니가 멀지 않아 곧 퇴원할 거라 여긴 것이다.
나중에서야 알게 된 거지만 어머니가 말한 퇴원은 건강을 회복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의사 선생님마저도 손을 놓을 정도로 병세가 심각하다는 걸 의미하는 것이었다.
의사 선생님은 어머니더러 남은 시간을 가족들하고 뜻깊게 보내라고 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