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화
윤지현은 메시지를 열어봤다.
진성주가 답장을 한 줄 보내왔다.
[금요일에 도련님과 함께 아만 호텔에서 고객을 만날 예정입니다. 지현 씨가 정장을 가져다줄 수 있을까요?]
‘엥?’
그녀의 머릿속에는 물음표가 가득 찼다.
‘조도현 씨가 또 만나자고 한다고? 그것도 호텔에서?’
그것도 소리쳐도 아무도 들을 리 없는 한적하기 그지없는 호텔에서 말이다.
‘조도현 씨... 도대체 뭘 하려는 거야?'
윤지현은 섣불리 상상하지 못했다.
겁이 난 게 아니라 기회가 눈앞에 와도 선뜻 다가가지 못하는 이유는 조도현의 성격을 도무지 가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저 일에 집중하고 싶을 뿐, 복잡한 관계에 휘말리고 싶지 않았다.
한참 고민하던 그녀는 결국 조도현을 따라서 차갑게 대응하기로 했다. 일단은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
지하 주차장.
진성주는 한숨을 쉬며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굳이 강요할 필요는 없었지만, 그는 왠지 모르게 도련님의 마음이 꼭 그런 것만은 아닐 것 같았다.
게다가 손태호에게 들은 바로는 윤지현이 스스로 찾아와 일자리를 구했다고 했다. 두 사람 사이에 분명 뭔가 오해가 있는 듯했다. 그래서... 그냥 자기 마음대로 한 번 움직여본 것이다.
일단 만나야 대화를 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윤지현도 꽤 완강했다...
벤틀리는 단지를 빠져나갔고 그 순간 길 건너편에서 한 대의 페라리가 지나쳤다.
단지 외곽 도로.
심은우는 차를 길가에 세운 채 핸드폰을 손에 쥔 채로 폭발 직전의 얼굴을 하고 있다.
전화는 받지 않고 문자도 무응답이었다. 그의 인내심은 점점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잠시 후, 지시했던 스카이 아파트 단지의 입주자 명단이 휴대폰에 도착했다.
그런데 그가 가장 먼저 놀란 건 윤지현의 이름이 아니라 같은 건물 꼭대기 층의 입주자 이름이었다.
조도현...?
조씨 가문의 아들?
조도현의 귀국 소식은 이미 알고 있었다.
조씨 가문은 언제나 신비로운 자태로 운성에서 왕처럼 군림했다. 가족들조차 대중 앞에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비록 조도현과 같은 인맥의 선상에 있진 않았지만 어릴 때 몇 번 스쳐본 적은 있었다.
15, 16살 무렵 다른 사람의 연회에서 마주친 그는 마치 사람이 아닌 백옥으로 조각한 인형 같았다.
윤지현이 몰래 집을 샀다. 그것도 조도현의 집 바로 아래층에 말이다... 이게 단순한 우연일까?
그는 문득 골프장 사건이 다시 떠올랐다.
...
2시간 후, 윤지현은 차를 몰고 단지를 빠져나오다 길가에 세워진 익숙한 페라리를 발견했다.
순간, 그녀는 반사적으로 브레이크를 세게 밟았다.
심은우는 담배를 피우고 있었고 하얀 연기가 날카로운 눈썹 언저리에 스며들었다.
얼굴은 보기만 해도 섬뜩할 정도로 험악했다.
윤지현의 머리는 빠르게 돌아갔다.
차를 세우고 그에게 다가가는 짧은 시간 동안, 그녀는 이미 대응책을 다 짜두었다.
차에서 내려 주저하지 않고 조수석 문을 열고 앉아 선제공격하듯 차갑게 물었다.
“여기서 뭐 해? 나 따라온 거야?”
심은우는 담배를 든 손으로 앞에 있던 핸드폰을 집어 그녀의 다리 위로 던졌다.
“설명해.”
윤지현은 핸드폰을 들어 화면을 확인했다. 스카이 아파트의 각 층 입주자 목록이 빼곡히 떠 있었다.
그녀는 담담하게 핸드폰을 다시 돌려주며 말했다.
“나 일하면서 번 돈으로 집 한 채 샀어. 그게 뭐 어때서? 내 돈으로 산 거야. 당신 돈 한 푼 안 썼다고.”
심은우의 눈빛이 서늘해졌다.
“윤지현, 말장난하지 마. 돈이 문제야? 왜 집을 샀는지, 왜 나한테 숨겼는지 그걸 물어보는 거잖아.”
“말할 필요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내 이름으로 된, 진짜 내 집을 갖고 싶었어. 그게 그렇게 잘못된 일이야?”
과거 심씨 가문은 그녀가 재산을 노린다며 결혼 전에 추가로 혼전계약서까지 체결하게 했다.
그때를 떠올리며 심은우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었다.
“내가 너한테 그렇게 야박하게 굴었어? 내가 선물한 액세서리들은 아무거나 들고 와도 집 한 채 값이야.”
윤지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심은우는 지갑을 꺼내 안에 있던 블랙카드와 골드카드를 대충 뽑아 그녀에게 던졌다.
“집 사는 게 그렇게 좋으면 더 사서 전부 네 이름으로 해. 질릴 때까지 사.”
윤지현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역시 심 대표님은 통이 크네요.”
어쩌면 이렇게 생기는 돈을 생각하면서 그의 외도를 견딘 채 무감각하게 살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수 있다.
괜찮은 생각 같았다.
하지만 그녀는 인생이 이런 식으로 이어져 가는 것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윤지현은 떨어진 지갑을 주워 카드를 한 장 한 장 정성스럽게 다시 넣었다.
“당장은 안 살래. 사고 싶을 때, 그때 가서 돈 달라고 할게.”
그녀는 지갑을 그의 다리에 내려놓고 손을 다시 거두려 했지만, 심은우가 그 손을 꾹 눌러 붙잡았다.
그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너 이제 날 믿지 않는 거야?”
‘이제야 알았어?'
윤지현은 이 남자가 정말 얄밉고도 우습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활짝 웃었지만, 그 웃음 속엔 뭔가 씁쓸함이 섞여 있었다.
“믿고 안 믿고가 뭐가 중요해? 당신이 즐거우면 됐지.”
그녀는 슬쩍 손을 뺐다.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윤지현은 순간 얼어붙었다.
‘혹시 아침에 답장을 안 해서 진성주 씨가 전화를 건 걸까?’
심은우는 그녀의 긴장감을 눈치채고는 눈빛이 다시 날카로워졌다.
“내 전화는 무시하더니 다른 사람 전화도 안 받아?”
윤지현은 더는 피할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전화를 꺼냈다.
화면에 떠오른 이름은 ‘강 여사님’이었다.
심은우의 엄마였다...
심은우도 화면을 힐끗 보고 이내 긴장이 풀린 듯 가벼운 목소리로 말했다.
“받아.”
윤지현은 남은 시간이 얼마 없기에 전화가 왔다고 짐작했다. 시어머니는 자신이 말을 번복할까 봐 경고하려고 전화한 것이다.
그녀는 전화를 받았다.
“저 지금 아드님이랑 같이 있는데요. 먼저 인사하시겠어요?”
그 말에 강혜경은 입 밖으로 나오려던 말을 꿀꺽 삼켰다.
“아냐, 됐어. 지난번에 네가 봤던 그 가방이 아직 필요하니?”
“필요하죠. 요즘 가방들을 다 맡겨서 마침 없었거든요.”
“그럼 와서 가져가.”
“감사합니다.”
전화는 두세 마디 말로 순식간에 끝났다.
심은우는 미심쩍은 얼굴로 물었다.
“두 사람 언제 이렇게 사이가 좋아졌어?”
윤지현이 대꾸했다.
“좋은 일 아니야? 내가 당신 엄마랑 매일 싸우길 원해?”
“...”
이 여자는 정말 사람을 말문이 막히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심은우도 화를 어느 정도 가라앉혔다. 아까 그녀에게 입주자 명단을 보여줄 때도 표정을 유심히 살폈었다. 그녀는 조도현의 이름을 전혀 확인하지 않았고 이후 반응도 그저 집을 몰래 산 걸 들켰다는 데만 집중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같은 건물에 살게 된 건 진짜 우연일 가능성이 컸다.
그저 자신에게 작은 반항이라도 하면서 자신의 손아귀를 벗어나려고 할 뿐이었다.
자기 돈으로 조그만 아파트 하나 몰래 산 거로 대단한 자립이라도 이룬 것처럼 굴었다.
애들 장난 같은 반항이었다.
“집에 데려다줄게.”
그는 시동을 걸었다.
“그럼 내 차는...”
“사람 시켜서 옮겨줄 거야.”
그는 그녀의 어떠한 반박도 허락하지 않은 채 차 문을 잠그고 그대로 출발했다.
그 후 며칠간 윤지현은 무척 조심스럽게 지내면서 집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않았다.
동시에 그녀는 심은우가 이혼 사실을 알게 됐을 때의 반응을 머릿속에서 수없이 시뮬레이션했다.
처음엔 분명 폭발할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그와 정면으로 부딪칠 생각이 없었다. 차라리 여행을 떠나버려서 그에게 진정할 시간을 주는 게 나았다.
결국, 그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아무래도 그의 여자친구도 결혼을 재촉할 테니까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조용히 떠나버리는 그녀의 선택이 어쩌면 그가 원하던 결말일지도 몰랐다.
“그런데 말이야,”
고유진이 전화를 걸어 경고했다.
“네 시어머니를 조심해. 요즘 행동이 수상한 것 같던데. 나쁜 수를 쓸까 봐 걱정돼.”
윤지현은 대수롭지 않게 웃었다.
“걱정하지 마. 이혼서류 도장 찍기 전까진 혹시라도 내가 마음 바꿀까 봐 그쪽에서 더 조심하게 될 거야.”
그녀는 확신했다.
강혜경은 자기 아들과 며느리가 이혼하고 구씨 가문과 사돈을 맺을 거라고 대외적으로 소문을 내고 다닐 뿐이었다. 아무리 소문을 내도 상관없었다.
금요일 오후, 윤지현은 스노랜드 항공권을 예약했다. 그런데 또다시 강혜경에게 전화가 왔다.
지난번 통화 이후로 3일 만이었다.
그녀는 어차피 무슨 일인지 알았기에 먼저 전화를 걸지도 않았다.
윤지현이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강 여사님.”
강혜경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더 차가웠다.
“위자료 합의서를 추가해야 하니 만나자.”
“변호사들끼리 만나서 처리하라고 하세요.”
“윤지현, 2000억에서 3000억으로 올려줬잖아. 근데 합의서에 추가 조항을 넣자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이야? 오늘 너 반드시 직접 와야 해. 아만 호텔에서 기다릴게. 여기는 사람이 적어서 다른 사람들이 보게 될 일도 없어.”
‘아만 호텔?
윤지현은 진성주가 보낸 메시지를 떠올렸다.
조도현도 오늘 아만 호텔에 있다고 했었다.
왜 전부 거기로 가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