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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화

강혜경은 윤지현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헛기침을 하고는 단호하게 말했다. “오늘 저녁 7시야. 안 오면 원래 얘기했던 2000억 위자료 그대로 처리할 거야.” 말을 끝내자마자 그녀는 더는 답을 기다리지 않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윤지현은 천천히 휴대폰을 귀에서 떼고 화면을 멍하니 바라봤다. 문득 고유진의 말이 떠올랐다. ‘정말 마지막 이틀까지 수작을 부리려나 보네?’ 그녀와 강혜경은 처음부터 사이가 좋지 않았다. 결혼 전엔 가문의 차이를 이유로 여러 번 연애를 방해했고 결혼 후에도 4년 동안 심씨 가문에 들어가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 명절이나 중요한 날에 가끔 얼굴을 비추면 어김없이 차가운 말로 그녀를 쏘아붙였다. 그런데도 딱히 더한 짓을 하진 않았었다. 이번 만남도 어쩌면 단순한 협박일지도 몰랐다. 위자료 협의서를 수정하면서 마지막으로 정신을 바짝 차리게 하려는 의도일 가능성이 컸다. 그래서 그녀는 갈지 말지 고민하고 있었는데 한 시간 후에 진성주가 또 메시지를 보냈다. [지현 씨, 어떻게 할 생각이에요?] “...” 윤지현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이쪽은 또 왜 이렇게 집요한 거야.’ 예의상 문제가 아니었으면 차라리 그 정장을 관리사무소에 맡기고 조도현한테 대신 전달하라고 하고 싶었다. 어차피 위층에 사는데 말이다. 계속 모른 척하는 것도 이상했다. 조도현의 심기를 건드려서 좋을 게 없었다. 정장을 돌려주면서 강혜경도 같이 만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결정을 내린 후 그녀는 바로 답장을 보냈다. [좋아요. 몇 시가 괜찮으신가요?] 진성주는 빠르게 답장을 보냈다. [8시요.] 그녀는 간단하게 화장을 고치고 옷을 갈아입은 뒤 부모님 댁으로 향했다. 며칠 전, 심은우가 아파트 단지 앞에서 그녀를 기다렸던 일을 떠올리며 자신이 감시당하고 있다는 걸 의심했다. 하여 최근 며칠 동안 집 앞에서 수상한 차가 떠나지 않는지 확인해 보니 의심이 확신으로 바뀌었다. 그녀가 차를 몰고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심은우에게 전화가 왔다. “낮잠 자고 있었어?” ‘함정까지 파는 거야?’ 그녀는 속으로 비웃었다. “운전 중이야. 부모님 댁에 가려고.” “정장을 드리려?” “...응.” 윤지현은 슬쩍 조수석에 놓인 정장을 바라봤다. 심은우는 그녀가 거짓말하지 않는 걸 확인한 뒤 전화를 끊었지만 동시에 감시자에게 부모님 댁까지 따라가라고 지시했다. 윤지현은 부모님이 사는 아파트에 도착했다. 부모님 두 분은 모두 대학교수였는데 은퇴한 후에 집에 계셨다. 그녀가 도착했을 때 아빠는 집에 안 계셨고 엄마 서이숙은 이 시간에 온 딸을 보고 놀란 눈치였다. “오늘 회사 안 갔어?” “감기 기운 있어서 하루 쉬었어요.” 그녀는 일부러 목을 문지르며 가볍게 기침하는 시늉까지 했다. “너 자신을 좀 챙겨. 얼굴이 야위어서 이게 뭐니. 심 서방이 속 썩이는 거 아니야?” 서이숙은 딸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말을 안 해도 엄마는 딸의 마음을 잘 알았다. 윤지현이 아무리 숨기려고 해도 엄마는 딸의 미세한 변화를 금방 알아챘다. “잘못하면 그냥 이혼해버리면 되죠.” 윤지현은 애써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 말에 서이숙은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재빨리 화제를 돌려 다른 이야기로 대화를 이어갔다. 이혼 이야기는 완전히 끝난 후에 부모님께 알릴 작정이었다. 미리 말해봤자 부모님만 괜히 속상해할 것이다. 그렇게 부모님 댁에서 저녁까지 함께 먹고 옷을 갈아입은 후에 친구와 약속이 있다고 했다. 저녁에 부모님 댁에서 묵고 갈 테니 다시 돌아오겠다는 말도 덧붙였다. 엘리베이터에 들어서서 그녀는 모자와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고 감시자의 눈을 피해 조용히 아파트를 빠져나왔다. 아만 호텔에 도착한 시간은 저녁 7시가 채 되지 않은 시각이었다. 호텔 외관은 고풍스러웠고 내부는 화려하면서도 절제된 고급스러움을 풍겼다. 윤지현은 먼저 정장을 프런트에 맡긴 후, 강혜경에게 전화를 걸어 자신이 도착했음을 알렸다. 잠시 후, 호텔 직원이 나와 그녀를 안내했다. 복잡한 복도를 지나 마침내 어느 문 앞에서 걸음을 멈췄고 직원이 문을 열어주었다. 티타임을 즐기는 방이었고 향을 피우고 있어 방안에서는 다향과 재스민 꽃향기가 은은하게 풍기고 있었다. 그 방 한가운데 강혜경이 앉아 있었다. 그녀는 짙은 초록색이 포인트로 되어 있는 개량한복을 입고 있어 우아한 분위기를 풍겼다. “앉아.” 강혜경이 턱을 살짝 들어 올리며 말했다. “위자료 합의서 사인하자면서요? 합의서는요?” 윤지현은 상대의 가식에 휘말리고 싶지 않아 앉자마자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뭐가 그렇게 급해? 일단 차 한잔하면서 천천히 이야기하자.” 윤지현은 눈썹을 살짝 치켜들고는 앞에 놓인 찻잔을 집어 들어 유심히 살폈다. “여기에 독이라도 탄 건 아니죠?” 강혜경은 코웃음을 쳤다. “독이 걱정되면 안 마시면 되지.” 윤지현은 찻잔을 내려놓으며 멀찍이 밀어버렸다. “그럼 안 마시는 게 낫겠어요.” “...” 강혜경은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리고는 곧바로 빈정거릴 준비를 했다. “역시 못 배운 티가 나...” “그만하시죠. 뻔한 대사들이 안 지겹나요? 할 얘기 있으면 하고 아니면 시간 낭비하지 말고 끝내요.” 윤지현이 단호하게 말을 끊어버리자 강혜경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그녀는 분노를 억누르며 테이블 위에 합의서를 툭 던졌다. “사인해.” 윤지현은 합의서를 천천히 들어 한 장 한 장 넘겨봤다. 위자료 문제면 사실 한 장이면 충분했을 텐데 굳이 10장 넘게 만들어놨다. 내용은 쓸데없는 말들로 가득했고 행여나 그녀가 꼼꼼하게 읽을까 봐 일부러 이렇게 만든 게 확실했다. 그녀는 끝까지 읽고 나서 평온하게 합의서를 내려놨다. “변호사랑 상의 좀 해볼게요. 내일 점심까지 답변 드리면 될까요?” “고칠 부분 있으면 바로 수정하게 지금 말해.” “제가 고치자고 하면 바꿔주실 건가요? 아니면 제가 새로 초안을 만들어 드릴까요?” “그건 안 돼. 내가 준비한 대로 해야 해.” 강혜경의 얼굴이 한층 더 싸늘해졌다. 윤지현은 느긋하게 의자에 등을 기대며 말했다. “방금은 수정해주신다면서요? 근데 지금은 안 된다고요? 무슨 뜻이에요?” “오늘 사인을 안 하면 여기서 못 나간다는 뜻이지.” 윤지현은 화내지 않았다. 그녀는 살짝 고민하는 척하다가 부드럽게 말했다. “그럼 이렇게 하죠. 나가서 변호사한테 전화해보고 괜찮다 하면 바로 사인할게요.” 그렇게 말한 뒤 그녀는 자연스럽게 합의서를 들고 방을 나섰다. 문을 나서자마자 윤지현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빠르게 걸어 나갔다. 그녀는 불길한 예감에 휩싸였다. 열몇 페이지나 되는 합의서에 숨어있는 조항들이 소름이 돋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그중 조항 하나는 이런 것이었다. “이혼 전 다른 이성과 부적절한 관계가 발생할 시, 합의서는 자동으로 파기된다.” 언뜻 보면 별문제 없어 보이지만 찬찬히 곱씹을수록 오싹했다... 윤지현에게 부적절한 이성은 없었지만 이런 건 얼마든지 조작 가능했다. 그녀는 강혜경의 양심을 너무 높게 평가했다. 방 안에서 강혜경은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윤지현이 나갔어. 합의서도 가져갔고. 서희야, 정말 위자료 안 내게 해줄 수 있니?” 전화기 너머에서 달콤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줌마, 걱정하지 마세요. 다 준비해뒀어요. 위자료를 한 푼도 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여자가 다시는 아줌마 앞에 나타나서 돈을 내놓으라고 하지 못하게 해드릴게요.” “그럼 정말 고맙지. 서희야, 넌 정말 대단해. 너한테 다 맡길게.” “문제없어요, 아줌마. 저한테 맡기세요.” 전화가 끊겼다. 강혜경은 긴장이 풀린 듯 차 한 모금을 천천히 마셨다. 내일 밤 열릴 자선회에서 아무런 장애가 없이 심씨 가문과 구씨 가문의 혼인을 선언할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그녀는 웃음이 났다. 윤지현 그 계집애는 구서희가 무슨 수를 쓸지는 몰라도 좀 당해봐야 정신 차린다. 한편, 구서희는 핸드폰을 들고 서늘한 미소를 지었다. 오늘 밤이면 윤지현의 인생은 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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