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화
윤지현은 저녁을 먹고 소파에 몸을 웅크렸다.
진성주와의 채팅창을 열었다 닫기를 몇 번이고 반복했지만 결국 메시지를 보내지 않았다.
‘조도현 씨는 도대체 무슨 생각이야? 사이즈까지 알려주더니 갑자기 정장을 원하지 않는다고 하고 지금 장난치는 건가?’
그의 속마음을 도저히 알 수 없었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미완성된 정장 사건 외에는 서로 얽힐 일도 없을 테니까.
그때, 거실 밖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윤지현은 채팅창을 빠르게 닫고 소파에 올린 다리를 내려놓았다.
“너 옷이랑 신발, 가방, 액세서리들 다 어디 갔어?”
심은우가 들어오자마자 다짜고짜 물었다.
“...”
윤지현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들켰나? 아니, 오늘 이 사람 왜 이러지? 갑자기 예고도 없이 집에 와서 밥 먹더니 옷장까지 뒤져본 거야?’
“옷이랑 신발은 드라이 맡겼고 가방이랑 액세서리는 관리 맡겼어.”
윤지현은 속이 복잡했지만, 겉으론 아무렇지 않은 척 능청스럽게 말했다.
“전부를?”
“응, 안 돼? 집에 있으면 심심해서 정리 좀 했지. 옷장에 뭐가 뭔지도 모르겠고, 입은 것도 안 입은 것도 헷갈려서 그냥 다 드라이 보내버렸어. 가방이랑 액세서리도 오래 써서 다 닳았길래 시간 날 때 맡겼지.”
그럴듯한 설명이었고 굳이 거짓말할 이유도 없어 보였다.
심은우는 뭔가 이상하다고 느꼈지만, 그녀의 말을 듣고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요즘 윤지현이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았고 그때마다 바쁘게 집 안을 정리하고 있던 걸 떠올렸기 때문이다.
“그렇게 급하게 할 필요 없어. 너 당분간 계속 집에 있을 텐데 천천히 하면 되잖아.”
“곧 여행 가잖아. 떠나기 전에 깔끔하게 해두고 가고 싶어서.”
말에는 아무런 모순도 없었지만, 심은우는 왠지 모르게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때, 소파에 놓인 짙은 파란색 쇼핑백이 눈에 들어와 그는 허리를 숙여 쇼핑백을 집으려 했다.
“이건 나한테 주는...”
“아니야...”
윤지현이 반사적으로 저지하며 몸을 기울여 그의 손을 막았다.
두 사람은 모두 채 말을 끝맺지 못하고 동시에 얼어붙었다.
심은우의 얼굴이 눈에 띄게 차가워졌다.
그 기류를 감지한 윤지현은 황급히 말을 덧붙였다.
“아빠 선물로 산 거야.”
“...”
심은우의 얼굴에 실망이 서렸다.
“아버님 드릴 선물을 사면서 남편 선물은 살 생각이 안 들었어?”
윤지현이 대꾸했다.
“정장이 부족해?”
구서희의 방에 걸려 있는 정장이 아마 집에 있는 것보다 많겠지라는 생각에 윤지현은 헛웃음이 났다.
심은우는 말문이 막혔다.
윤지현은 더는 그를 신경 쓰지 않고 소파에 있던 정장을 들고 슬리퍼를 신은 채 거실을 빠져나와 위층으로 뛰어 올라갔다.
서재에 몸을 숨긴 후, 잠시 뒤 차가 떠나는 소리가 들리자 그녀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
다음 날은 일요일이었고 날씨가 참 좋았다.
윤지현은 과거 심은우와 함께 다녔던 고등학교를 찾았다.
주말이라 학생들이 수업을 듣는 날은 아니었지만, 교복을 입은 아이들 몇몇이 학교 근처를 지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천천히 학교를 거닐며 과거의 자신과 심은우의 흔적을 따라갔다. 함께 앉았던 교실, 함께 걸었던 나무가 우거진 오솔길, 함께 뛰놀던 운동장...
그리고 마지막으로 학교의 인공호수 옆 대나무숲의 한적한 구석에서 그들이 함께 묻어둔 작은 상자를 꺼냈다.
그 상자는 수능 전 어느 늦은 자율학습이 끝난 밤에 묻은 것이었다. 심은우는 굳이 그녀를 여기로 끌고 왔었다. 주위가 깜깜했기에 휴대폰 플래시를 켜서 비추며 무릎에 종이를 올려놓고 서로의 마음을 적었다.
그는 20년 후에 같이 꺼내 보자고 얘기했었다.
그때 심은우의 눈에 비친 희미한 불빛은 별보다도 밝았다.
윤지현은 담담하게 웃으며 상자를 열어 자신의 타임캡슐을 꺼냈다.
‘안녕, 심은우.’
...
같은 시각, 심은우는 기획팀 팀장의 사무실에 있었다.
블라인드는 내려져 있었고 사무실 문도 굳게 닫혀 있었다.
팀원들은 저마다 속으로 욕을 내뱉었다.
심은우는 잔뜩 찌푸린 얼굴로 구서희가 작성한 기획서를 훑고 있었다.
구서희는 그런 그의 태도를 신경 쓰지 않은 채 그의 어깨에 몸을 기대고 손끝으로 은근히 유혹의 신호를 보냈다.
비록 그녀는 윤지현만큼 아름답지는 않았지만 대담하고 저돌적이었다. 남자를 유혹하는 데 거침없었고 집요하게 매달렸기에 그녀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 남자가 드물었다.
그녀는 어차피 남자에게 마음과 몸은 별개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오빠, 우리 여기서...”
“그만해.”
심은우는 귀찮다는 듯 그녀의 손을 뿌리치고 기획서를 책상에 세게 내던졌다.
“이게 네가 일곱, 여덟 날 밤을 새우면서 만든 결과물이라고?”
그는 구서희가 윤지현만큼의 능력을 갖출 거라 기대하지도 않았지만 이렇게 형편없을 줄은 몰랐다.
기획서는 엉망진창이고 터무니없는 수준이었다.
심은우는 관자놀이를 꾹 누르며 한숨을 내쉬었다. 문득, 과거 기획팀을 진두지휘하던 윤지현 덕분에 날개를 단 듯 순조롭게 일하던 날들이 그리워졌다.
구서희는 꾸중을 듣고 서러운 듯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그때, 심은우의 핸드폰이 울렸다. 화면을 힐끗 본 후, 그는 창가로 걸어가 전화를 받았다.
“말해.”
“오늘 윤지현 씨가 또 외출했습니다. 한 고등학교를 오래 서성이다가 이후에 스카이라는 고급 아파트 단지로 이동했어요. 이곳은 보안이 철저해서 주민이 아니면 들어갈 수 없습니다.”
윤지현을 감시하던 사람이 보고했다.
심은우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졌다.
‘고등학교는 뭐고 아파트는 또 뭐야...’
문득 그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입주자가 아니면 못 들어간다고? 안에 아는 사람이 있으면?”
“입주자가 사전 허락하면 들어갈 수 있습니다.”
“아파트 주소 보내. 계속 지켜봐.”
“알겠습니다.”
짜증 난 듯 전화를 끊은 심은우는 찌푸린 이마를 손으로 훑었다. 여기서는 애인이 기획서를 망쳐놓고 저기선 아내가 수상한 행동을 하고 있었다.
그가 돌아서자 어느새 구서희가 따라와 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흥, 왜 신경 써? 이제 사랑하지도 않잖아.”
심은우는 속에서 끓어오르는 혐오감을 억누르며 그녀의 몸을 세게 떼어냈다. 그리고는 양손으로 그녀의 어깨를 꽉 붙잡고 단호하게 말했다.
“기획서 다시 써. 모르는 건 기획팀 팀장들에게 물어보고.”
말을 마친 그는 차가운 얼굴 그대로 방을 나가버렸다.
구서희는 분을 못 이겨 사무실 물건들을 바닥에 내던졌다.
‘물어보라고? 지금 나한테 가서 물어보라고 한 거야? 하찮은 인간들이 무슨 자격으로 나를 가르쳐! 잠깐...’
그 팀장들은 전부 윤지현 밑에서 일하던 사람들이었다. 그러니 심은우의 말은 지금 자신더러 윤지현의 밑에서 일하던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받으라는 소리였다.
화가 치민 그녀는 바로 내선 전화를 걸어 세 팀의 팀장들을 불러들이고는 이유 없이 욕을 퍼부었다. 1팀 팀장인 김서진이 참다못해 한마디 하자 그 자리에서 뺨까지 맞았다.
다른 팀장 둘은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만 숙였다.
이건 부잣집 딸이 아니라 완전 미친개였다.
...
그 시각, 윤지현은 타임캡슐을 새집의 책장에 올려두고 있었다.
굳이 버리거나 태울 필요는 없었다.
그 안에 담긴 기록이 꼭 심은우와의 기억만은 아니었다.
핸드폰이 울려 화면을 보니... 심은우?
이 결혼이 끝이 날 것 같은 직감이 들어 뭐라도 해보려는 건가?
윤지현은 전화를 받지도 끊지도 않았다.
조금 있다가 벨 소리가 끊었고 메시지가 도착했다.
그녀는 어이없어하며 메시지를 열었는데 보낸 사람은 심은우가 아니라 진성주였다.
집안 도련님이 드디어 새로운 지시를 내린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