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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9화

양유진은 얼른 고개를 숙이고 물을 마시며 동공에 어리는 어둠을 감추었다.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양유진의 온화한 눈에는 아픔이 담겨 있었다. “여름 씨, 한 가지만 물어보죠. 여름 씨가 원해서 관계가 이루어졌나요?” “당연히 그건 아니죠.” 여름이 단호히 답했다. “그러면 됐습니다.” 양유진은 여름의 손을 가볍게 잡았다. “전에 그런 질문을 본 적이 있어요. 아내가 납치되었다면 아내가 목숨을 걸고 반항하기를 원하는가, 원하는 대로 따라주고 살아 돌아오기를 바라는가? 저는요, 두 번째를 골랐습니다. 아내의 목숨보다 소중한 것은 없어요.” “유진 씨….” 여름의 심장이 떨렸다. 저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졌다. “난 반드시 상대의 첫 경험을 원하지는 않아요. 당신과 결혼할 때부터 그 점은 잘 알고 있었어요.” 양유진이 말을 이었다. “결혼 당일에 최하준에게 끌려간 것으로 당신을 탓해서 뭐 해요? 다 내가 무능해서 벌어진 일인걸. 가족을 위해 경찰에 신고도 못 했잖아요. 그동안 내가 얼마나 전전긍긍했다고요. 당신이 돌아와서 내 무능을 탓할까 봐 두려웠어요.” “아니에요.” 여름이 고개를 저었다. “그 마음 충분히 이해해요. 나였어도 그렇게 했을 거예요. 최하준이 너무 비열했던 거예요.” “네. 너무 비열했죠. 당신을 강제로라도 취하면 구출해 내더라도 내가 당신을 싫어하게 될 거라고 생각한 겁니다. 하지만 나 양유진을 잘못 봤어요. 당신을 향한 나의 사랑은 모든 것을 압도합니다. 당신이 돌아왔으니 그걸로 족합니다.” 양유진의 눈에 고통이 넘쳤다. “왜 당신과 함께하기가 이렇게 어려운가요? 그 숱한 좌절을 겪으며 기다리고 또 기다려서 마침내 청혼을 받아주었는데 또 일이 벌어지고…. 정말 나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다면 앞으로 제게 잘해주세요.” 들을수록 감동적이었다. 돌아오는 길에 양유진과 헤어져야겠다고 결심했는데 양유진의 말을 들으면서 마음이 흔들렸다. 양유진이 이렇게 깊은 마음을 보여주었는데 한사코 헤어지겠다고 한다면 도리어 상처를 주는 셈이었다. 게다가 최하준이 바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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