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장 착각하지마
분위기라는 건 원래 일부러 만드는 게 아닌 이렇게 누군가의 한마디로 갑자기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가인은 순간 그날 밤이 생각나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
“저는 그저 평범한 사람이라 저한테 무슨 일이 생기는 것도 원치 않고 저를 도와주려다가 의도치 않게 휘말리게 된 사람에게 무슨 일이 생기는 것도 원치 않아요. 그러니 일이 무사히 해결된 지금 기쁘지 않을 이유가 없죠.”
“아까 내가 나간다고 하니까 잔뜩 흥분해서는 떠날 거면 자기가 떠나야 한다고 했잖아요.”
이가인은 조금 능글맞은 그의 목소리에 심장이 움찔 떨렸다.
“그야 당연하죠. 저 때문에 생긴 일인데 어떻게 교수님이 모든 걸 책임지게 하겠어요.”
“하하. 뭔가 큰 고비를 하나 넘어서 그런가? 갑자기 가인 씨가 막 전우처럼 느껴지는데 가인 씨는 어때요?”
이가인은 휴대폰에 대고 있는 귀가 점점 뜨거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군에 종사한 적은 없지만... 무슨 느낌인지는 알 것 같아요.”
정승진은 기분 좋게 웃더니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편히 잘 수 있게 됐으니까 얼른 쉬어요.”
이가인은 통화를 마친 후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녀는 그제야 정승진과 통화하는 내내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20분 후.
황선아가 이가인에게 메시지를 보내왔다.
[수술 무사히 끝난 거 지금 제일 먼저 확인하고 문자 보내는 거니까 이제 걱정하지 말고 푹 쉬어.]
“제일 먼저? 그리고 수술이 지금 끝났다고? 분명 아까...”
보통은 수술이 다 끝나야지만 결과가 어떻게 됐는지 정확히 알 수 있다. 즉 그렇다는 건 정승진은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을 그녀를 위해 일부러 20분 먼저 결과를 예상하고 얘기해준 것이다.
이가인은 침대에 눕고도 1시간 정도는 눈을 말똥히 뜨고 있다가 몸을 완전히 릴랙스 하고서야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
그녀가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이미 해가 지고 방안이 어둑해진 뒤였다.
이가인은 몽롱한 상태로 방금 꿨던 꿈 내용을 떠올려보았다. 무의식의 흐름에 따라 이상한 꿈을 잔뜩 꾸었지만 그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정승진이 그녀에게 좋아한다며 미친 듯이 따라다니는 내용이었다. 게다가 거기서 끝이 아니라 정승진은 그녀의 마음이 고현우에게 향해 있다는 것을 알고 그녀를 방안에 가둔 채 한참이나 그녀와 말싸움을 했다.
이가인은 자신이 생각해도 참으로 말도 안 되는 상황이라 피식 웃었다.
그도 그럴 게 현실에서 두 사람은 그저 하룻밤을 우연히 함께 한 사이일 뿐이니까.
그리고 그녀의 마음이 아직도 고현우에게 향해 있다는 것도 말이 되지 않았다. 섹파일 뿐이라고 그녀를 소개했던 고현우의 말을 이가인은 아직 기억하고 있으니까.
“정승진이 좀 도와줬다고 착각하지마. 그 사람은 그냥... 원래부터 좋은 사람이었을 뿐이야.”
...
이가인은 정신을 차린 후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화면을 켜보니 간호사 동료들이 보낸 메시지가 한가득 와 있었다.
그녀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가방을 챙긴 후 병원으로 향했다.
저녁 6시.
이가인이 간호스테이션에 도착하자 동료들이 마치 벌떼처럼 그녀 곁으로 몰려들었다.
과도한 그녀들의 관심에 이가인은 적당히 둘러대며 자리에 앉았다.
그때 연차가 조금 있는 의사가 다가와 장대호가 부른다며 가보라고 했다.
이에 이가인은 올 게 왔다며 심호흡을 한번 했다. 정승진이 미리 언질을 줘서 참으로 다행이었다.
아니면 갑작스러운 부름에 분명히 당황했을 테니까.
장대호는 웃는 얼굴로 그녀를 반겼다. 그러고는 간호과장을 해임한 일에 관해 얘기해주었다.
“그간 줄곧 수술에만 신경을 써서 간호사들 일에는 소홀했어요. 그런 일을 겪게 해서 정말 미안합니다.”
“아, 아닙니다!”
이가인이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
“정 교수가 때마침 우리 병원으로 와줘서 참으로 다행이에요. 저한테 좋은 병원이라는 건 환자들뿐만이 아니라 직원들도 좋은 병원이라고 느껴야 진정한 좋은 병원이라고 하더라고요. 덕분에 정신이 번쩍 들었어요. 그래서 앞으로는 의사들 실력에 신경을 쏟는 만큼 사람들 관리에도 신경을 쏟으려고요.”
이가인은 바보가 아니었기에 자신이 지금 이렇게 장대호와 단둘이 앉아 대화할 수 있는 게 모두 정승진 덕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장대호와의 대화가 끝이 난 후 이가인은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조금 멍한 얼굴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던 그때 문이 열리더니 퇴근 준비를 마친 사복 차림의 고현우가 보였다.
이가인은 그의 얼굴을 보자마자 본능적으로 말을 내뱉었다.
“먼저 내려가세요. 저는 다음 거 탈게요.”
그 말에 고현우는 그녀를 빤히 바라보더니 이내 닫힘 버튼을 누르는 것이 아닌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