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장 나 안 간다니까 기뻐요?
“간호과장을 해임하기로 했어요.”
“네...?”
이가인은 자신이 지금 잠을 너무 못 잔 탓에 헛것을 들은 게 아닐까 싶어 그에게 되물었다.
“간호과장님을 해임하기로 했다고요?”
“네.”
정승진이 태연하게 대답했다.
“왜, 왜요?”
이가인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
“이유는 총 두 가지예요. 첫째는 가인 씨가 그 남자 때문에 시달리는 걸 뻔히 알고도 그 어떤 보고도 올리지 않았는 것이고 둘째는 제때 일을 해결하지 않아 그로 인해 가인 씨가 위험해 처했다는 거예요.”
“그렇다고 해임까지...”
“간호과장이 가급적이면 환자들과 불필요한 마찰은 빚지 말라고 했다면서요?”
“그러시긴 했지만... 딱히 틀린 말도 아니잖아요.”
“틀린 말이 아니라고 다 맞는 말인 건 아니죠. 그리고 힘없는 간호사한테 무조건 참으라고 하는 건 굉장히 무책임한 말이에요. 간호과장은 자기 맡은 바 책임을 다하지 못한 거죠.”
이가인은 그 말에 살포시 입술을 깨물었다.
간호과장이 한 말이 무책임한 말이라는 건 그녀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돈 없고 백 없는 사람들은 윗분들이 하는 말에 그저 따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지금껏 사회생활을 해 본 결과 그게 가장 현명한 선택이었다.
“전에 혜임 이사장이 나한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어요. 다른 병원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자신은 자기 자리에서 본분을 다하는 사람이면 그게 의료진이든 식당 이모님이든 모두 다 자기 사람으로 간주하겠다고요. 그리고 자신의 사람이 부당한 일을 당하면 할 수 있는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해서 그 사람의 억울함을 풀어주고 반대로 자기 맡은 바를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사람은 연차 상관없이 바로 내치겠다고도 했죠.”
이건 혜임 병원의 철칙으로 병원 직원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이가인은 여전히 불안했다.
“그럼 저에 대해서는 어떤 처분을 내리신다고 하던가요?”
“가인 씨가 출근하면 장대호 교수님이 따로 가인 씨를 부르겠다고 하셨어요.”
그 말에 이가인은 털이 쭈뼛서는 느낌에 입만 뻥긋거릴 뿐 말을 제대로 뱉어내지 못했다.
“혹시 뭐 가인 씨 쪽에서 요구하고 싶은 거 있어요? 뭐든 말해봐요. 대신 전해줄게요.”
“자, 잠깐만요. 제가 지금 머리가 제대로 안 돌아가서요. 생각할 시간을 좀...”
“그러게 내가 말했잖아요. 충분히 휴식한 뒤에 들어도 늦지 않다고. 이제 다 끝났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푹 자요.”
이가인은 전화를 끊으려는 그의 말에 다급하게 외쳤다.
“교수님!”
“네?”
“교수님은 괜찮으세요...?”
그녀의 말에 정승진이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괜찮아요. 그저 근무지가 바뀌게 됐을 뿐이에요.”
“네?!”
이가인의 얼굴이 한순간에 하얗게 질려버렸다.
“자기 입으로 이런 말 하는 거 조금 쑥스럽기는 하지만 나는 어디로 가든 충분히 잘 먹고 잘살 수 있는 사람이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전에 교수님의 선배님이 바로 혜임 병원의 이사장님이라는 말을 들었어요. 그런데 왜 제가 아닌 교수님을...”
“그분은 친분보다는 도리를 먼저 따지는 분이라서요.”
“아니요. 그런 도리는 없어요. 누구 한 명이 책임을 지고 떠나야 한다면 그건 저여야 해요!”
원래부터 그녀의 일인데 정승진이 모든 걸 안고 떠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이가인이 진지한 얼굴로 답을 기다리던 그때 갑자기 전화기 너머로 정승진이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곧바로 웃음기가 잔뜩 묻어난 그의 목소리도 들려왔다.
“가인 씨는 정말 사람을 잘 믿네요. 사기 안 당하게 조심해야겠어요.”
“...”
정승진은 이가인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화났어요?”
이가인도 자신이 화낼 줄 알았다.
하지만 그녀가 가장 먼저 느낀 감정은 분노가 아닌 안도였다.
“아니요. 올해 들은 것 중에 제일 반가운 농담이었어요.”
그 말에 정승진은 웃음을 거두어들이더니 조금은 진지하고 또 조금은 여전히 장난기가 묻어있는 목소리로 물었다.
“나 안 간다니까 기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