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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장 여자친구가 되어줘요

고현우는 병동에서 사람들이 들것을 들고나올 때까지만 해도 정승진이 그저 장난삼아 협박하는 건 줄 알았다. 그러다 정승진이 다가와 작게 속삭이는 말을 듣고서야 지금 이 상황이 장난이 아님을 깨달았다. “고 교수가 직접 병동 안까지 데리고 들어가는 게 좋을 것 같아. 괜히 다른 의료진한테 맡겼다가 정말 목뼈가 부러지면 안 되잖아?” 이가인은 정승진이 뭐라고 했는지는 알지 못했다. 다만 정승진이 뭔가를 얘기하자마자 고현우가 서둘러 차량으로 달려가는 것으로 보아 매우 급박한 상황이라는 것만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정상인이라면 3초도 안 돼 차에서 내렸겠지만 남자는 거의 5분 가까이 고현우와 다른 의료진들 손에 의해 힘겹게 차량에서 벗어났다. 고현우는 의료진들에게 지시하며 남자를 꺼내고는 병동으로 들어가는 길에 이가인의 곁을 스쳐 가며 그녀를 힐끔 쳐다보았다. 이가인의 안색도 남자의 얼굴 못지않게 하얗게 질려있었다. 의료진들이 모두 병동으로 올라간 후 입구에는 오직 이가인과 정승진만 남게 되었다. “교수님, 저는 지금 바로 경찰서로 갈게요. 입원해있는 내내 저를 괴롭혔다는 얘기를 전하면 경찰 측에서도 분명히 정상 참작해줄 겁니다. 죄송하지만 장대호 교수님께는 저 대신 얘기 좀 전해주세요. 그리고 괜히 정 교수님까지 끌어들여 정말 죄송합니다.” 이가인은 지금 수간호사 자격 평가고 뭐고 간호사를 잘리지 않을 수만 있다면 뭐든 할 수 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잔뜩 긴장한 그녀와 달리 정승진은 여전히 태연한 얼굴이었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아까 저 남자가 신고하는 일은 없을 테니까요. 그보다 피곤할 텐데 얼른 집으로 가요.” “저 남자 지금은 저래도 목이 다 나으면 바로 태도를 돌변할 겁니다. 그리고 그때 가서는 가장 먼저 정 교수님한테 태클을 걸 거예요.” “만약 평생 낫지 못한다면요?” “...” 그 말에 이가인의 심장이 철렁했다. 그러자 정승진이 피식 웃으며 그녀의 긴장을 풀어주었다. “농담이에요. 설마 의사가 돼서 사람을 불구로 만드는 짓을 했겠어요?” 이가인은 농담이라는 그의 말에도 불구하고 전혀 웃지 못했다. “아마 수술은 2시간 조금 넘어갈 겁니다. 그 2시간이 그 남자가 받아 마땅한 응보라고 생각해요. 물론 수술이 실패하면 그때는 제가 아닌 고 교수가 그 남자를 죽이고 싶었다는 뜻이 되겠지만.” 이가인은 지금 머릿속이 무척이나 복잡했다. “...솔직히 고맙다고 해야 할지 미안하다고 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뭐가 됐든 이 일을 무사히 끝낼 수 있는 마침표는 필요할 겁니다. 그러니 정 교수님께서 가르쳐주세요. 제가 어떻게 해야 이 일이 커지는 것을 최소화할 수 있는지, 또 어떻게 해야 정 교수님께 피해가 가장 적게 갈 수 있는지를요. 말씀해주시는 건 뭐든 할게요.” 정승진은 그녀의 말에 잠시 생각하더니 이내 다시 입을 열었다. “딱 한 가지 방법밖에 없는데 정말 할 거예요?” “네, 말씀하세요.” “그럼 제 진짜 여자친구가 되어줘요. 여자친구가 웬 변태 같은 놈팡이한테 당하고 있어 남자친구로서 도저히 두고 볼 수 없었다고 하면 별문제 없이 상황을 해결할 수 있을 겁니다. 실력 좋은 변호사에게 의뢰하면 어쩌면 오히려 그 남자한테서 정신적 피해 보상까지 받아낼 수도 있겠네요. 그런데 만약 가인 씨가 제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저는 아마 조만간 이유 없이 사람 때린 의사로 소문나게 되겠죠.” “...” 정승진은 이가인의 얼굴이 빨개졌다가 파래졌다가 하는 것을 바라보다 결국 참지 못하고 또다시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이것도 농담이었는데 혹시 또 진지하게 받아들인 거예요? 요즘은 이런 농담이 잘 안 통하나?” 이가인은 그의 말이 뭐가 진짜고 뭐가 가짜인지 통 가늠을 할 수 없었다. 정승진은 이가인의 표정이 좀처럼 돌아오지 않자 서서히 웃음을 거두어들였다. “미안해요. 혹시 내가 실례한 건가요? 그런 거면...” “아니요. 죄송해야 할 사람은 저죠. 애초에 정 교수님하고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일이었잖아요.” “가인 씨가 도와달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멋대로 상황에 끼어든 건 접니다. 그리고 처음부터 이 상황을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염두에 두고 있었어요. 미리 얘기 못 해줘서 미안해요. 대신 아무런 문제 없이 일을 처리할 테니 나 믿어줘요.” 이가인은 그 말에 정승진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농담하던 때와는 달리 사뭇 얼굴에 진지함이 감돌고 있었다. 그때 출근하던 동료들이 두 사람 곁으로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교수님, 안녕하세요.” “교수님, 좋은 아침입니다.” 그들의 인사에 정승진은 옅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좋은 아침이에요.” 동료들은 정승진에게 인사를 건네고는 하나같이 이가인 쪽을 힐끔 바라보았다. 아침 댓바람부터 둘이서 마주 보고 서서 뭐 하는지 궁금해 미치겠다는 눈빛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궁금증은 병동으로 들어간 후 곧바로 해소되었다. “네, 믿을게요.” 고심 끝에 던진 이가인의 한마디에 정승진이 활짝 웃었다. “고마워요.” “그럼 저는 지금부터 뭘 하면 될까요?” “이대로 직진해서 우회전하세요.” “네?” 이가인이 눈을 깜박이며 물었다. “그리고 집으로 가서 푹 주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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