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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장 주도권을 너한테 줄게

이가인의 얼굴이 순식간에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리고 너도 좋아하고.” “누가 좋아한다고 그래?!” 정승진의 말에 이가인이 발끈하며 반박했다. “아니라고? 그때 침대에서 나한테 매달려...” “정승진!” 이가인이 눈을 부릅뜨며 그의 이름을 크게 불렀다. 목소리가 얼마나 컸던지 멀리 떨어져 있는 사장님까지 이쪽을 볼 정도였다. 정승진은 여유로운 얼굴로 그녀에게 물을 따라주며 씩 웃었다. “이제야 내 이름을 불러주네?” 이가인은 꼭 타격감이 전혀 없는 인형을 향해 혼자 있는 힘 없는 힘 다 써가며 펀치를 날리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녀는 흥분한 마음을 가라앉힌 후 다시 차분하게 말을 내뱉었다. “난 너랑 연애할 생각 없어.” “상대가 나라서 싫은 거야 아니면 연애 자체를 하고 싶지 않은 거야?” “연애 자체를 하고 싶지 않아.” 연애라는 것도 결국에는 감정을 써야 하는 일이었으니까. “그럼 일단은 공개하지 않는 거로 해. 그리고 우리 관계의 주도권을 너한테 줄게. 언제 나 남자친구 시켜주고 싶으면 그때 얘기해줘.” 정승진이 얘기했다. “내 말 못 알아들었어? 연애하고 싶지 않다는 말이 뭔 뜻인지 몰라?” “알아. 잠자리할 상대는 필요한데 아직은 그 상대한테 그 어떤 자격도 주고 싶지 않다는 거잖아.” 그 말에 이가인이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되물었다. “해외에만 있어서 모국어가 퇴화하기라도 한 거야?”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나는 그저 지금 내가 느끼는 감정을 너한테 솔직하게 표현하고 싶을 뿐이야. 나는 밀당 같은 거 잘 못 하거든.” 이가인은 그 말이 아주 조금은 기분 좋게 들렸지만 굳이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그래, 자고 싶다는 것도 솔직한 표현이긴 하지.” “마음대로 생각해. 대신 이것 하나만은 확실하게 말할게. 나는 널 헷갈리게 하고 싶지 않아. 나는 너한테 항상 내가 느끼는 가장 솔직한 감정만 얘기할 거야.” 정승진이 했던 수많은 말 중에서 유독 이 마지막 말이 그녀의 심장에 꽂힌 건 고현우와 함께 있었을 때 하루에도 수백 번 그의 마음을 추측하느라 그간 많이 힘들어서일까? 고현우는 그녀와 연애하는 동안 자기 마음을 드러낸 적도 없거니와 그녀의 마음을 궁금해하지도 않았다. 애초에 그녀를 좋아해서 만나보자고 한 게 아니었으니까. 매번 전전긍긍하고 안달 나 하는 건 늘 이가인의 몫이었다. 그때 음식이 올라오고 정승진은 생각에 잠긴 듯한 그녀를 바라보며 다정하게 말했다. “일단 식사부터 할까?” “...” 이가인은 괜히 고현우 생각을 하는 바람에 입맛이 뚝 떨어졌다. “방금 누구 생각 했어?” 정승진이 물었다. “네 생각한 건 아니야.” “당연히 그렇겠지. 내 생각했으면 그렇게 입맛 떨어졌단 표정은 짓지 않았을 테니까.” “네네, 마음대로 생각하세요.” 이가인은 대꾸하기를 포기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정승진이 갑자기 뜬금없는 말을 건네왔다. “만약 너한테 8만6천4백 원이 있었는데 갑자기 그중에서 10원짜리 동전 하나가 없어졌어. 그러면 너는 돈이 10원 적어졌다고 8만6천390원을 버릴 거야?” 이가인은 정승진이 또 무슨 이상한 소리를 하려나 싶어 그를 경계하며 쳐다보았다. “뭘 그렇게 경계해? 설마 내가 너한테서 돈이라도 뜯어낼까.” “그건 모르는 일이지. 세상에는 이상한 사람들이 차고 넘치니까.” “인생의 큰 도리를 하나 알려주려고 했는데 너 때문에 흐름이 다 끊겼어.” 정승진이 조금 부루퉁한 얼굴로 말했다. 그러자 이가인이 선심 썼다는 듯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계속 얘기해봐. 들어줄게.” “크흠, 그 누구도 고작 10원짜리 동전이 하나 없어졌다고 나머지 돈을 버리지 않아. 그럼 이제 다시 물을게. 만약 하루 총 86400초 중에 누군가가 고작 널 10초간 아주 불쾌하게 만들었어. 그럼 넌 남은 86390초라는 시간도 계속 불쾌한 감정이 널 지배하게 내버려 둘 거야?” “얼마나 큰 인생의 도리를 말하나 했네. 됐으니까 밥이나 먹어.” 이가인은 말은 그렇게 하면서 속으로는 내심 그에게 고마웠다. 덕분에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으니까. 정승진의 말대로 고작 고현우 때문에 불쾌해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아까웠다. 그리고 상처를 준 사람을 떨쳐내지는 못할망정 계속해서 떠올리는 건 멍청한 짓이었다. 이가인은 생각 정리를 마치더니 갑자기 식욕이 도는지 젓가락을 집어 들고 맛있게 음식을 집어 먹었다. 식사를 마친 후 이가인은 정승진이 계산하려는 걸 단호하게 막으며 사장에게 자신의 카드를 건넸다. 이에 정승진은 피식 웃으며 그녀가 사도록 가만히 내버려 두었다. 멋있고 예쁜 누나에게서 밥 얻어먹은 말 잘 듣는 연하남이 된 기분도 썩 나쁘지는 않았으니까. 식당에서 나온 후 이가인이 먼저 인사를 건넸다. “잘 가.” “데려다줄게.” “괜찮아. 택시 타고 가면 돼.” “아, 혹시 못 참고 날 집안으로 끌어들일까 봐 그래?” 이가인은 순간 정승진의 명치를 세게 한번 때려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승진은 그런 그녀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특유의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자기 차 쪽으로 안내했다. 반 시간 후. 우루스 차량이 단지 앞에 멈춰서고 이가인은 조수석에서 내려 집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리고 그 광경을 맞은편 도로에 정차된 차량에 앉아 있던 고현우가 전부 다 지켜보고 있었다. 운전석이 교묘하게 나무에 가려지기는 했지만 이가인이 내린 차량이 정승진의 차량이라는 걸 잘 알기에 굳이 운전석에 앉은 남자를 확인할 필요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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