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장 대놓고 티 내는 남자
이가인은 정승진과 고현우 때문에 잠을 한숨도 자지 못했다.
그런 상태로 저녁 12시에 나이트 근무 서러 병원에 도착하자 황선아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녀에게 물어왔다.
“제대로 못 잤어?”
“응, 잠이 안 와서.”
“난 가끔 가인 씨 보면 철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곤 해. 어떻게 그렇게 조금 자고도 이렇게 멀쩡히 있을 수 있지? 그리고 밥은 먹었어? 가인 씨는 밥도 잘 안 먹잖아.”
“아까 라면으로 대충 때웠어.”
라면을 먹었다고는 하나 몇 시간 전에 먹었던 거라 이가인은 한 반 시간쯤 앉아있었더니 배가 살짝 고파 로비에 있는 자판기에서 뭐 좀 사 먹을 겸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그런데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배달원 4명이 우르르 내리더니 4명 모두 짠 듯이 간호스테이션으로 향했다.
“배달왔습니다. 정승진 님이 누구시죠?”
첫 번째로 도착한 배달원이 가방에서 햄버거 세트와 치킨을 꺼내며 물었다.
“간호스테이션에 두라고 적혀있는데 고객님 성함이... 정승진 씨네요. 여기 두면 될까요?”
그리고 곧바로 두 번째로 도착한 배달원도 가방에서 디저트를 한가득 내려놓았다.
“이것도 정승진 님이 주문한 겁니다.”
“이것도요...”
마지막으로 세 번째와 네 번째로 도착한 배달원들까지 가방에서 음식을 한가득 꺼냈다.
간호사들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어리둥절한 눈으로 자기들끼리 시선을 주고받다가 이내 이가인 쪽을 바라보았다.
그때 복도 코너 쪽에서 흰색 가운을 입은 정승진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가 나타나자 간호사들이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났다.
“교수님, 주문하신 배달 도착했어요.”
정승진은 미소를 지으며 간호사들에게 말했다.
“여러분 드리려고 주문한 거예요. 맛있게 드세요.”
그 말에 간호사들은 감동한 듯 그에게 감사 인사를 건넸다.
“저희까지 챙겨주지 않으셔도 되는데 잘 먹을게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여러 가지로 시켰으니까 취향대로 드세요. 그리고 오늘 당직은 저니까 무슨 일 있으면 콜하고요.”
“네!”
정승진은 두 손을 가운 주머니에 집어넣은 채 간호사들과 웃으며 얘기를 나눴다. 그 과정에서 그는 따로 이가인에게 시선을 준다거나 그녀에게만 따로 뭐라고 얘기를 건넨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이가인은 이에 다행이라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러고는 정승진이 당직을 선 건 그저 우연일 뿐이라며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하지만 그건 우연이 아니었고 정승진은 이가인이 나이트 근무하는 5일 내내 하루도 빠짐없이 당직을 섰다.
심지어 그냥 당직만 서는 게 아닌 매번 간호사들을 위해 야식을 주문해주었다.
이에 간호사들은 이제는 나이트 근무 서는 것도 줄을 서야 하는 거 아니냐며 자기들끼리 우스갯소리를 주고받았다.
한편 고현우는 부 교수 타이틀을 단 후로 줄곧 데이 근무만 하기는 했지만 일찍 출근하게 되면 마침 퇴근하거나 퇴근하기 전의 이가인과 마주칠 수 있었다.
그래서 한 5일 정도 일찍 출근했는데 이가인은 그와 마주칠 때마다 상처받을 정도로 티가 나게 그를 피해 다녔다.
어느 날은 마주 오는 고현우를 발견하더니 예정에도 없던 병실로 들어가 괜히 환자들에게 안부 인사를 건넸고 또 어느 날은 분명히 직진해야 하는데 고현우가 다가오는 걸 보고 갑자기 몸을 돌려 억지로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그러다 도저히 피할 수 없는 길에서 만났을 때는 세상 딱딱한 얼굴로 고개를 살짝 숙이기만 할 뿐 말 인사는 건네지 않았다.
고현우는 이런 상황이 상당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녀가 이렇게도 피하는 게 단지 그를 보고 싶지 않아서인지 아니면 누군가가 보면 행여 오해라도 할까 봐서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고현우도 요즘 정승진이 계속해서 당직을 서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부 교수가 자처해서 당직을 서는 건 정 교수가 되기 위함이다. 하지만 정승진은 이미 정 교수라 당직을 자처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 게다가 그는 집안 배경도 좋아 당직 수당에 목숨을 걸 필요도 없는 사람이었다.
정승진을 해외에서 혜임으로 불러들인 건 송세희지만 정승진이 원해서 당직을 서게 만든 사람은 송세희도 누구도 아닌...
고현우도 귀가 제대로 달린 사람이었기에 외과 전체에 소문나 있는 정승진과 이가인이 연애한단 소식을 그도 들은 바 있었다.
...
오늘은 이가인이 그렇게도 기다리던 오프였다.
5일 내내 나이트 근무를 선 것이 많이 피곤했던 것인지 그녀는 퇴근하자마자 집으로 와 잠들었다가 시계가 오후 4시를 가리킬 때야 눈을 비비적거리며 잠에서 깼다.
그녀는 정신을 차린 후 가장 먼저 휴대폰을 확인했다. 부재중 전화는 따로 없었고 황선아가 보낸 저녁 약속 메시지만이 한 통 도착해있었다.
이가인은 알겠다는 답장을 보낸 후 얼른 준비하고 약속 장소인 백화점 근처로 향했다.
황선아가 정한 저녁 식사 장소는 백화점 바로 옆에 있는 유성시 사장님이 차린 식당이었다.
“매운 거 제대로 먹지도 못하면서 왜 이곳으로 고른 거야?”
이가인이 이해가 안 된다는 얼굴로 물었다.
그러자 황선아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가인 씨가 좋아하잖아.”
두 사람은 각자 메뉴판을 보며 먹을 것을 골랐다. 그런데 그때 바로 옆에서 누군가가 유리창을 똑똑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에 이가인이 고개를 돌려보니 특유의 날티나는 미소를 짓고 있는 정승진의 얼굴이 보였다.
정승진은 아주 자연스럽게 식당 안으로 들어오더니 두 사람에게 인사를 건넸다.
“여기서 다 보네요?”
이가인은 그에게 어색한 미소를 지었고 황선아는 활짝 웃으며 그를 반겼다.
“교수님, 식사하셨어요?”
“아직요.”
“그럼 저희랑 같이해요!”
이가인은 그 말에 황선아를 살짝 째려보았다.
그러자 정승진이 이가인을 바라보며 물었다.
“나도 같이 식사해도 괜찮겠어요?”
이에 이가인이 안 된다고 하려는데 황선아가 이가인의 옆으로 자리를 옮기며 흔쾌히 동의했다.
“안 괜찮을 게 뭐가 있겠어요. 자자, 얼른 앉으세요.”
정승진은 그녀의 말에 웃으며 두 사람의 맞은편에 앉았다.
정승진이 자리에 앉은 지 약 3분 정도 지났을까, 갑자기 황선아가 남자친구의 전화를 받더니 이내 심각한 얼굴로 급한 일이 생겨 가봐야 한다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가인도 바보는 아니었기에 황선아가 지금 자리를 피해 주고 있다는 것을 바로 눈치챘다. 그래서 그녀는 분노의 마음을 꾹꾹 눌러 담아 발 빠르게 식당 밖으로 나가버린 황선아게게 메시지를 보냈다.
[황선아 씨, 죽을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