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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장 친구

아침에 그 난리가 있은 지 12시간도 채 안 돼 변태남은 태도를 180도 바꾸며 그녀에게 사과한 것은 물론이고 돈으로 피해보상까지 해주겠다며 말을 건네왔다. 그리고 남자의 가족은 그녀의 본가 근처에 그녀의 이름으로 된 땅을 매입해주겠다고까지 했다. 게다가 무슨 협박이라도 당한 건지 이가인이 받지 않으면 도저히 물러서지 않겠다는 태도를 보였다. 결국 이가인은 어쩔 수 없이 정승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교수님, 잠깐 통화 가능하세요?” “네, 무슨 일로 전화했어요?” 이가인은 현 상황과 자신의 의견을 그에게 간단하게 전했다. 정승진은 그녀의 말을 전해 들은 후 조금 의외라는 말투로 물었다. “아무것도 받을 생각이 없다고요? 너무 쉽게 용서해주려는 거 아니에요?” “이번 일로 힘 써주신 건 교수님이잖아요. 그러니 뭘 받는다고 해도 교수님이 받는 게 맞죠.” “그 남자한테 있는 건 나한테도 있고 그 남자한테 없는 것도 나한테는 있어서 그 남자가 나한테 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요.” 이건 농담 같은 게 아닌 진심이었다. 이가인은 그의 말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잠시 침묵했다. 그러자 정승진이 다시 말했다. “그럼 물질적인 보상은 됐고 그 남자를 혜임 병원의 블랙리스트에 넣는 건 어떨까요?” “교수님 말씀 따르겠습니다.” 이가인이 동의한다는 뜻으로 말했다. “근데 가인 씨, 일부러 나랑 선 그으려고 그러는 거예요 아니면 그냥 습관인 거예요? 우리 동갑인데 왜 자꾸 나한테 극존칭을 쓰지? 생일 몇월이에요?” “...3월생입니다.” “내가 더 어리네요? 난 8월생이에요. 기왕 생일까지 튼 거 이번 기회에 그냥 편히 말 놓는 게 어때요?” 정승진의 제안에 이가인은 고민 한번 하지 않고 거절했다. “아니요! 그럴 순 없죠. 다른 사람 시선도 생각해야죠.” “그럼 우리 둘만 있을 때 반말하는 건 괜찮다는 소리네요?” “왜 얘기가 그렇게 흘러가는 거죠?” “그야 우리는 동갑에 고비도 함께 겪은 친구니까요. 혹시 가인 씨는 날 친구로 생각 안 하고 있었던 거예요?” “...” 순간 이가인은 꼭 보이지 않는 벽들이 점차 자신을 향해 압박하듯 다가오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정승진의 질문에 다른 뜻이 숨겨져 있다는 걸 그녀는 잘 알고 있었지만 지금은 그가 원하는 대답을 해줄 수밖에 없었다. “그런 건... 아니에요.” “그럼 친구니까 반말하는 것도 문제없겠네요?” “네...” “그럼 앞으로는 나랑 둘이 있을 때는 반말로 부탁할게, 가인아?” “...바, 바쁘실 텐데 이만 끊을게요!” 이가인은 정승진의 대답은 듣지도 않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녀는 전화가 끊어지자마자 방금까지만 해도 무섭게 그녀를 압박해왔던 벽들이 한순간에 사라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정승진은 그날 밤 일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하지 않고 있지만 이가인은 알고 있다. 그가 그녀를 몰라봐서 지금껏 아무런 얘기도 하지 않은 게 아니라는 걸을. 오히려 그녀인 걸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에 오늘 일도 도와준 게 틀림없었다. ‘대체 뭐 하자는 거지? 혹시 섹파가 필요한 건가?’ 이가인이 이렇게도 날이 서 있는 건 정승진을 혐오하거나 싫어해서가 아니라 한번 데인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날 밤, 이가인은 여느 때와 같이 나이트 근무를 섰다. 그런데 전과 다른 점이 하나 있다면 동료 간호사들은 물론이고 환자들까지도 그녀에게 친절한 말투를 장착하고 말을 건넨다는 것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정승진과는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 대놓고 그들에게 크게 외치고 싶었지만 그렇게 말해봤자 아무런 설득력도 없거니와 결국에는 자기들 믿고 싶은 대로 믿는 사람들이 태반이기에 결국 그녀는 해명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그래도 일할 때 마주치지 않는 게 어디야.’ 만약 데이 근무였으면 지금보다 두 배는 더 피곤했을 것이다. 새벽 1시 반. 이가인이 간호스테이션에서 열심히 수치를 기입하고 있던 그때 옆에 있던 간호사가 누군가의 이름을 불렀다. “정승진 교수님?” 그 말에 이가인이 고개를 들자 마침 그녀를 보고 있던 정승진과 눈이 마주쳤다. 정승진은 깜짝 놀란 듯한 이가인의 얼굴을 보며 말했다. “이 선생이 급하게 볼일이 생겼다고 해서 내가 대신 당직을 서기로 했어요.” 그 말에 간호스테이션에 있던 간호사들의 시선이 전부 이가인에게로 쏠렸다. 이가인은 그의 시선이 오롯이 자신에게만 향해 있자 상당히 당황한 듯 펜을 쥔 손을 가만히 내버려 두지 못했다. ‘왜 나만 보면서 얘기하는 건데!’ 이가인은 머리를 빠르게 굴리더니 이내 그럴싸한 병명을 찾았는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지금 바로 이 선생님한테 교수님 오셨다고 전해드릴게요.” 정승진은 발걸음을 옮기는 그녀의 뒤를 따라가며 함께 자리를 벗어났다. 잠시 후 이가인이 다시 간호스테이션으로 돌아왔을 때 동료 간호사들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말 한마디 없이 각자 자기 할 일을 했다. ‘망했네.’ 이가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자리에 앉았다. 수군거리는 소리 하나 없이 이렇게도 조용하다는 건 아예 관심이 없거나 자기들끼리 이미 결론을 내렸거나 둘 중 하나였다. 그런데 가십거리를 즐기는 그들이 관심이 없을 리가 없으니 그렇다는 건 이미 그녀와 정승진 사이를 자기들끼리 결론 내렸다는 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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