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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내 시야는 여전히 흐릿했고 눈앞이 희뿌옇게 보였다. “흰 지팡이는 어디 갔냐고!” 강재욱이 다시 물었다. “잃어버렸어.” 마침내 정신을 차렸지만, 있는 힘껏 손목을 비틀어도 그의 손에서 빠져나올 수 없었다. 강재욱의 얼굴은 여전히 어두웠다. “잃어버렸으면 찾아야지. 신호등 소리 듣고 길 건널 줄 안다며? 내가 그렇게 가르쳤어? 방금 네가 뭘 하려던 건지 알아?” 그의 목소리에는 분노가 서려 있었다. 공공장소라는 것도 신경 쓰지 않고 나를 훈계하고 있었다. 이번 생만큼은 그에게 휘둘리지 않겠다는 나의 태도가 그의 분노를 키운 건가 싶었다. 그는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눈도 멀었으면서 내 전화를 안 받아? 내가 곁에 없으면 넌 어떻게 죽는지 모른 채 죽을 수도 있어!” 강재욱도 이곳이 해성대학교라는 걸 깨달은 듯했다. 이곳에는 그가 아는 사람이 많았기에 여기서까지 미쳐 날뛸 수는 없었다. 나의 예상대로, 그는 깊이 숨을 들이쉬며 감정 조절을 시도하더니 나지막이 속삭였다. “집 정리 끝났어. 나랑 가자. 그리고 외출할 때는 마스크 쓰라고 했지?” 그의 시선이 갑자기 한쪽을 향했다. 강재욱은 몰래 내 사진을 찍어대던 남학생을 발견하고 사납게 노려보았다. 학생은 황급히 핸드폰을 집어넣었지만, 강재욱은 굳이 나를 끌고 그의 앞으로 가서 말했다. “사진 삭제해.” 남학생은 당황하며 핸드폰을 꺼냈고 강재욱은 그걸 빼앗아 내 사진을 직접 지웠다. 분노를 담은 듯 손가락으로 핸드폰 화면을 세게 누르며 삭제하는 모습에, 남학생은 차마 반항하지 못했다. 나는 그를 무시하고 학교 안으로 발걸음을 옮기려 했지만, 몇 걸음 채 가지 못하고 그에게 잡혔다. 강재욱은 나의 허리를 감싸안더니 번쩍 들어올렸다. “또 도로로 걸어가려고? 차에 치여 죽고 싶어?” 그 말에 머리가 얼어붙었다. “이거 놔!” 나는 강재욱의 손에서 벗어나려고 며칠 전 병원에서 그의 손에 냈던 상처를 다시 움켜쥐었다. 그럼에도 강재욱은 짧게 신음만 내뱉을 뿐, 더욱더 세게 끌어안았다. “서아린, 도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그날 호텔에 너 혼자 두고 간 게 그렇게 괘씸해?” 그는 나를 질질 끌며 차 쪽으로 향했다. “난 네가 병원에서 도망친 것도 아직 제대로 따지지 않았어.” “놓으라고! 계속 이러면 경찰 부를 거야! 여기요! 도와주세요!” 나는 크게 소리치며 발버둥 쳤고, 있는 힘껏 발뒤꿈치로 그의 정강이를 세게 찼다. “네가 리조트에서 경찰 불렀을 때 내가 얼마나 곤란했는지 알아? 아직 그 일도 해결 안 됐는데 감히 또 내 심기를 건드려?” 강재욱이 팔로 내 허리를 강하게 감싸자, 통증이 밀려왔다. 그리고 나는 어느새 차 옆까지 끌려갔다. 바로 그때, 학교 입구를 지키던 보안 요원이 뛰어와 막아섰다. “이봐요, 뭘 하시는 겁니까?” 나는 보안 요원의 소매를 꽉 붙잡았다. “도와주세요! 저 이 사람 몰라요. 경찰 불러주세요!” 강재욱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는 내 손이 보안 요원의 소매를 잡은 걸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내가 네 손가락을 하나하나 부러뜨려야 다른 남자한테 손대는 버릇을 고칠 거야?” “경찰 불러주세요!” 머뭇거리다가 나선 보안 요원의 목소리가 떨렸다. “이 학생은 우리 학교 학생입니다. 그만 놓아 주세요.” 나는 강재욱이 얼마나 무서운 존재인지,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의 앞에서 몸을 사리게 되는지 새삼 다시 한번 깨달았다. 강재욱은 갑자기 비웃음을 흘렸다. “해성대학교에 재학 중인 학생이 몇 명인데, 이 여자가 해성대 학생인 걸 단번에 알아봤다고? 얼마나 관심이 많았길래? 혹시 이 여자랑 뭐라도 있었어?” ‘짝’ 나는 힘껏 그의 뺨을 후려쳤고 손마디가 얼얼했다. 주변이 조용해졌다. 강재욱은 뺨 안쪽으로 혀를 굴리며 나를 노려보았다. 다음 순간, 그는 차 문을 열고 나를 그대로 뒷좌석에 밀어 넣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손을 짚었지만, 손목에 극심한 통증이 몰려와 식은땀이 났다. 보안 요원이 한 걸음 다가오며 말했다. “이봐요, 그러지 마세요.” “꺼져. 난 네까짓 게 감히 말을 걸 상대가 아니라고! 직장 잃기 싫으면 이만 꺼져.” 그는 내 다리까지 차 안으로 완전히 밀어 넣고는 문을 세게 닫았다. 그 후 운전석에 올라탄 그는 가속 페달을 밟아 해성대학교 정문을 빠져나갔다. 나는 또다시 그의 손에 붙잡혔다. 도망치고 싶었지만, 차에서 뛰어내릴 수는 없었다. ‘강재욱이 죽기 전까지는 나도 죽을 수 없어!’ 처음에 그는 빠른 속도로 차를 몰았지만 이내 백미러로 나를 한 번 바라보더니, 목울대를 천천히 움직였다. 그리고 갑자기 차를 도로 옆에 세웠다. 나는 곧바로 차 문을 열고 도망치려 했지만, 강재욱의 행동은 나보다 빨랐다. 눈 깜짝할 사이에 그는 이미 뒷좌석으로 넘어와 내 다리를 붙잡더니 단숨에 나를 품으로 끌어당겼다. 문이 모두 잠긴 좁은 차 안에서 나는 그의 품에 완전히 갇혀 버렸다. “눈망울이 촉촉하네? 그럴수록 부드럽고 달콤해 보여. 날 유혹하는 거야? 이틀 동안 내 전화를 안 받아? 배짱이 많이 커졌네? 혹시 나 몰래 딴짓이라도 했는지 어디 한 번 확인해 볼까?” 강재욱은 기분이 상한 듯 얼굴이 어두워졌고, 이내 힘으로 나를 제압하며 내 옷을 벗기려 했다. “네가 병원에서 내게 했던 말도 다 참아줬어. 그런데 내 전화를 무시하고... 감히 보안 요원의 옷자락을 붙잡아? 그놈은 당장 잘라 버려야겠네.” “오빠!” 나는 옷깃을 꼭 쥐며 그의 시선을 피했다. “우리 내기 하나 하자.” 그의 짙은 눈매가 어둡게 빛났고 거친 숨소리가 귀 옆을 스쳤다. 그리고 차가운 입술이 내 관자놀이를 스쳤다. “내기?” 그의 입술이 닿자, 나는 속이 울렁거렸고 당장이라도 토할 것 같았다. “누가 먼저 사랑에 빠지는지 내기하자. 기한은 앞으로 삼 개월!” 나는 그가 송지우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고 있었기에, 다른 여자를 사랑할 리 없다고 확신했다. 그리고 나 또한 짐승 같은 강재욱을 사랑하게 될 일은 절대 없었다. 이 내기를 제안한 것은 그저 시간을 벌기 위한 술책이었다. 지금 이 순간, 그의 행동을 멈출 수만 있다면 뭐든지 해야만 했다. “사랑?” 그가 비웃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너를 사랑하게 만들겠다고?” “어때? 내기할래?” 나는 시선을 천장에 고정했고 여전히 앞이 보이지 않는 척해야 했다. 강재욱은 그런 내 모습을 비웃고 있었다. 전생에서 나는 그의 표정을 볼 수 없었기에, 혹시 날 좋아하게 될 가능성은 없냐고 간절하게 물었다. ‘그때도 이렇게 비웃었겠지?’ 강재욱의 입꼬리가 흘깃 올라갔다. 그는 몸을 일으켜 흰 셔츠의 깃을 가다듬고 걷어 올렸던 소매를 하나하나 내렸다. 그런 다음 운전석에 몸을 기울여 담배 한 갑을 꺼내어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순식간에 연기가 차 안을 가득 채웠다. 내가 기침하자, 그는 의도적으로 내 얼굴을 향해 연기를 뿜었다. “내기니까 뭐라도 걸어야지? 넌 뭘 걸 건데?” 나는 담담하게 말했다. “내가 지면, 평생 오빠 말 들을게. 오빠가 누구에게 무릎 꿇으라면 꿇고, 절하라면 절하고, 시키는 대로 다 할 거야. 절대 반항하지 않아.” 강재욱은 눈썹을 들어올렸다. “딱 석 달? 석 달이 지나도 결과가 안 나오면 네가 진 거로 할 수 있어?” 나는 떨리는 손으로 옷깃을 더욱 단단히 움켜쥐었다. “응. 그러면 내가 진 거야.” 이 내기가 강재욱에게 얼마나 매력적인지 나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에게 있어서 가장 큰 유혹은 내가 패배하면 송지우에게 무릎 꿇고 머리를 조아리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이었다. ‘강재욱에게 있어 이보다 송지우를 더 기쁘게 해 줄 ‘선물’이 어디 있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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