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화
여자의 직감이란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전생에서 나는 앞을 보지 못했지만, 송지우를 대할 때 그녀가 특정한 사람에게 유독 다른 태도를 보인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송지우 역시 원하는 사람을 손에 넣지 못한 안타까운 사람이었다. 그녀가 마음에 둔 사람은 바로 강재욱의 삼촌, 강도현이었다.
하지만 내가 죽을 때까지, 그러니까 몇 년 동안 강재욱은 이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그때 병실 문이 열리며 의료진이 황급히 뛰어 들어와 강재욱을 말렸다.
나는 병상에 앉아 공허한 눈빛을 유지하며 여전히 눈먼 척 연기했다. 다만 입가에는 희미한 냉소를 흘렸다.
강재욱이 처음엔 멍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다시 분노가 치솟아 온몸에 불길이 이는 듯했다. 그가 완전히 폭주하려던 순간, 그의 휴대전화 벨소리가 울렸다.
이성을 잃은 ‘미친개’는 뭐든 물어뜯기 마련이었지만, 전화를 본 의사가 다급히 땀을 닦으며 진정시켰다.
“강재욱 씨, 아버님이십니다.”
그제야 그는 겨우 분노를 억누르고 전화를 받았다.
“아버지, 어쩐 일...”
“당장 본가 저택으로 돌아와! 네가 저지른 짓을 네 삼촌이 알게 되기라도 하면 그 후폭풍을 감당할 수 있겠어?”
수화기 너머로 강재욱의 아버지가 노발대발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실명 후 청각이 특별히 예민해졌던 터라 그 분노에 찬 외침을 또렷하게 들을 수 있었다.
보아하니, 오크밸리 리조트에서 벌어진 일들이 결국 강재욱의 아버지 귀에도 들어간 모양이었다.
강재욱은 날카로운 시선으로 나를 노려보더니, 갑자기 성큼성큼 다가왔다.
아무도 그를 막지 못하자, 나는 움찔했지만 있는 힘을 다해 버텼다.
그는 내 환자복을 움켜쥐고 나를 들어 올리듯 잡아당기며 귓가에 낮고 위협적인 목소리가 속삭였다.
“오늘 밤, 이 병실엔 아무도 없을 거야. 여기서 얌전히 날 기다려. 병실에서 하면 더 짜릿하지 않겠어?”
전생에서 강재욱은 나를 조롱하며 짓궂은 장난을 치긴 했지만, 이렇게 노골적으로 관계를 강요한 적은 없었다.
내가 송지우의 마음이 다른 곳에 있다는 걸 언급한 것이 그를 완전히 미치게 만든 듯했다.
나는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아서 차가운 얼굴로 그의 손등을 있는 힘껏 물었다.
그는 당황하며 손을 놓았고, 반사적으로 뺨이라도 때리려고 손을 올렸지만 끝내 때리지 않았다. 그렇게 몇 초간 나를 노려보더니, 이를 악문 채 병실을 나섰다.
강재욱이 사라지자마자, 나는 지팡이를 들고 서둘러 퇴원 절차를 밟았다. 병원비는 내가 부담해야 했고, 총 10만 원이 나왔다.
핸드폰을 꼭 쥔 나는 이제야 내 수중에 남은 돈이 겨우 20만 원뿐이라는 사실이 떠올랐다.
내 비상금이 든 통장은 서도원의 아내 권미연이 빼앗았다. 내가 비밀번호를 끝내 말하지 않자, 그녀는 통장과 카드를 돌려주지 않았고, 나는 지금까지 분실 신고를 할 기회조차 얻지 못했다.
병원비를 내고 나니, 수중에 남은 돈은 단돈 10만 원뿐이었다.
나는 흰 지팡이를 꼭 쥐고 지하철을 탔다. 환승을 거쳐 한 시간 반을 달려, 마침내 해성대학교에 도착했다.
기숙사 문을 열고 침대에 앉자, 기숙사 특유의 컵라면 냄새가 퍼졌다. 그제야, 나는 다시 살아났다는 실감이 들었다.
기숙사는 6인실이었고 2층 침대 아래에 책상이 있는 구조였다.
환생한 시점에서 나는 대학교 2학년이었다. 정확히 지금은 2학년 1학기가 끝나 가고 있었고, 방학까지 약 한 달 반 정도 남아 있었다.
잠시 후, 밖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기숙사 문이 열리더니, 룸메이트들이 나를 보고 깜짝 놀랐다.
“아린아! 학교로 돌아온 거야? 눈은 좀 나아졌어?”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럼 치료는? 계속 미루면 안 되는 거 아니야? 괜찮겠어?”
나는 침착하게 답했다.
“당분간 치료는 안 할 생각이야. 갈 곳이 없어서 잠시 기숙사에서 지내려고 왔어.”
2학기 등록금과 기숙사 비용은 이미 부모님께서 납부한 상태였다. 부모님께서 파산하고 세상을 떠난 뒤에 강재욱 손에 넘어가기 전까지 환불받지 않았다.
이미 비용을 납부했으니, 돌아와 사는 건 당연한 권리였다.
게다가 서도원의 집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그곳으로 가면 서도원은 분명 나를 강재욱에게 넘겨버릴 것이니까.
내 사정을 들은 룸메이트들은 각자 다른 반응을 보였다. 그중 인상이 부드러운 한 여학생이 다가와 내 손을 잡았다.
“그럼 걱정 말고 편히 지내. 편의점에 다녀오거나 끼니를 포장해야 할 일이 있으면 편하게 말해. 내가 도와줄게!”
그녀는 따뜻한 미소를 지었다.
이런 호의는 송지우가 베풀던 ‘선의’와는 전혀 다른 종류였다.
“고마워. 그럴 것 없어. 내 힘으로 할 수 있어.”
다른 룸메이트가 그녀를 끌어당겨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허유미, 신경 쓰지 마. 저 얼굴이면 힘든 일이 생길 겨를이 없을걸? 예전에 휴학한 것도 스폰서가 생겨서 그런 거라던데.”
허유미가 조용히 나지막이 반박했다.
“그런 말 하지 마. 집도 파산했고, 눈도 안 보이잖아. 우리가 조금 배려하는 게 뭐 어때서?”
“그냥 운이 좋은 거지 뭐. 보통 파산하면 다 힘들게 사는데, 얜 얼굴 하나로 편하게 사네.”
나는 고개를 숙였고 손가락마저 떨려왔다.
‘운이 좋다’는 말은 전생에서도 수도 없이 들었던 말이었다.
기숙사에서 나는 점차 마음을 가라앉혔다.
흰 지팡이를 들고 기숙사 아래층으로 내려가 씻은 뒤,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
손으로 침대 사다리를 더듬으며 천천히 올라가려는데, 문득 허유미가 내 뒤에서 조용히 손을 뻗고 있다는 걸 느꼈다. 아무 말도 없이, 혹시라도 내가 떨어질까 봐 걱정하며 대기하는 듯했다.
잠시 멈칫했지만, 나는 천천히 침대로 올라갔다.
전생에서 허유미는 나 때문에 곤란을 겪었다. 나를 도우려다 강재욱의 분노를 샀다는 이유로 부모님께서 운영하시는 작은 슈퍼마켓이 문을 닫았어야 했다.
강재욱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는 것만으로도 한 가정을 파괴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그를 없애기 전까지, 나는 곁에 친구를 둘 수가 없었다.
침대에 눕고 핸드폰을 충전한 뒤 확인하니, 부재중 전화가 스무 통 넘게 와 있었다. 대부분은 강재욱이었고, 네다섯 통은 서도원과 권미연이었다.
병원에서 나올 때부터 나는 핸드폰을 무음으로 해 두었다. 강재욱이 필사적으로 나를 찾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핸드폰을 베개 아래로 밀어 넣은 뒤, 나는 눈을 감았다. 지금 내게 가장 안전한 장소는 이곳, 기숙사였다.
해성대학교 교내 ‘우수 동문’ 코너에 걸린 첫 번째 사진 속 인물이 바로 강재욱의 삼촌, 강도현이었다.
‘강재욱이 아무리 미쳐도 삼촌의 모교에서는 쉽게 사고를 치지 못할 거야.’
그렇게 나는 전생과 이번 생을 통틀어 가장 편안한 밤을 보냈다.
아침이 되어 개운하게 눈을 뜨자, 허유미가 사다리를 밟고 올라와 나를 깨우려 손을 뻗고 있었다.
내가 눈을 뜨자 그녀는 순간 당황한 듯 얼굴을 발그레해졌지만 곧 조심스럽게 내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아린아, 나 유미야.”
내가 앞을 보지 못한다고 생각한 그녀는 조용히 자신의 이름을 말했다.
“응.”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허유미가 밖을 가리켰다.
“네 작은엄마가 와 있어. 지금 기숙사 사감실에서 소란을 피우고 있어. 바닥에 주저앉아 우는 중이야. 네가 매정하다면서 엄청나게 큰 소리로 우시는 바람에 점점 더 많은 사람이 몰려들고 있어. 내려가 봐야 하지 않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