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화
강재욱은 그간 정말로 나를 가지고 놀고 있었다.
나는 부모도 없이 혼자 남겨진 시각 장애인이 되다 보니 내 편이 되어 줄 사람도, 나를 보호해 줄 사람도 없었다.
그래서인지 강재욱은 내가 가장 아끼던 안내견마저 죽이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것도 모자라 결국 나까지도 죽음으로 내몰았지...’
나는 필사적으로 눈물을 삼키며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척 천천히 세면대에서 내려왔다.
‘서두를 필요 없어... 천천히 시간을 끄는 거야...’
거울 너머로 강재욱의 의심스러운 눈빛이 포착됐다. 아마도 내가 너무 오랫동안 가만히 서 있었기 때문인 것 같았다.
흰 지팡이도 없이 벽을 더듬으며 욕조 쪽으로 이동하여 물을 아주 약하게 틀어놓고 물마개를 닫지 않은 채 흐르는 것만큼 물이 빠져나가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마치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처럼 욕조에 물이 차기를 기다리는 척했다.
하지만 이 방법을 오래 쓸 수는 없다는 생각에, 마치 이제야 물마개를 확인한 것처럼 행동하며 다시 물을 받기 시작했다.
그렇게 미적거리며 시간을 끌고 있었다.
물이 가득 차자, 나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거품 입욕제를 풀었다. 뒤돌아보지 않아도 강재욱이 점점 초조해지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때 그가 조용히 다가왔고, 나는 그가 어떤 행동을 할 지 뻔히 예상됐다.
‘옷을 벗기려 하겠지...’
긴장감이 감돌던 그때, 휴대폰 진동 소리가 욕실에 울려 퍼졌다.
나는 욕조 가장자리에 앉아 거울을 통해 그의 표정을 살폈다. 걸려 온 전화를 확인하는 순간, 짜증 가득한 얼굴에서 긴장한 얼굴로 바뀌었다.
그는 망설임 없이 전화를 받더니, 문조차 완전히 닫지 않은 채 곧장 욕실을 빠져나갔다.
나는 참고 있던 숨을 내쉬었다.
‘역시! 이번에도 하늘이 나를 살렸어.’
전생의 레퍼토리는 침대 위에서 강재욱에게 괴롭힘을 당하던 중 똑같이 전화가 걸려 왔던 것이었다. 그때도 바로 이 시점에서 송지우가 사고를 당했었다.
그녀는 스키를 똑같이 처음 스키를 배웠지만 앞을 보지 못하는 나에게조차 밀리자, 자괴감이 들었는지, 혼자 강사를 찾아가려다 넘어져 골절상을 입었었다.
강재욱은 송지우가 다쳤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한시도 지체하지 않고 달려가 그녀를 데리고 병원으로 향했다. 그리고 나는 그대로 호텔에 버려졌었다.
당시 나는 막 실명한 상태라 자립적으로 생활할 수 있는 능력이 거의 없었다. 감각조차 둔해진 상황에서, 나는 방에 갇혀 감히 어디로도 가지 못한 채 강재욱이 돌아오길 기다렸다.
그때의 나는 강재욱이 돌아올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돌아온 사람은 강재욱이 아니었다.
몇 시간이 지나자, 누군가가 카드키를 이용해 방문을 열고 들어왔고, 나는 저항할 수 없는 상태에서 옷이 찢긴 채 누군가에게 사진이 찍히는 수모를 당했다.
그 후, 나는 강재욱에게 모든 사실을 말했지만, 그는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결국 직접 경찰에 신고했지만, 시각 장애인이었던 나는 범인의 특징을 제대로 기억할 수도 없었다. 그리고 호텔 CCTV가 사라진 데다가 목격자마저도 없어서 끝내 범인은 잡히지 않았다.
‘이번 생에서는 내가 직접 확인할 거야.’
...
나는 스키복을 갖춰 입고, 흰 지팡이를 들고 방을 나섰다.
조금 전 방을 나서며 복귀하는 길에 나는 복도 곳곳에 설치된 CCTV 위치를 면밀히 살폈다. 복도에는 사각지대가 거의 없었기에 모니터링을 피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나는 여전히 시각 장애인을 가장한 채 계단으로 향했다. 계단 문을 살짝 열어둔 채 엘리베이터 앞을 주시했다.
시간이 흐르고, 드디어 수상해 보이는 한 남자가 시야에 들어왔다. 마스크를 쓴 중년 남성이었다.
나는 움직이지 않고 그 남자에게 귀를 기울였다. 방 앞에서 카드를 긁는 소리가 들린 지 약 8분이 지나서야 다시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그가 초조하게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는 소리까지 들렸다.
나는 즉시 접이식 흰 지팡이를 가방에 넣고, 마스크와 스키복의 모자를 눌러쓰고 아래층으로 내려가 엘리베이터를 눌렀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안에 있던 중년 남자와 눈이 마주쳤지만 처음 보는 낯선 얼굴이었다.
그러나 그에게서 희미하게 풍기는 술 냄새와 땀 냄새는 나를 과거의 기억으로 끌어당겼다. 어둠 속에서 나를 짓누르고 강제로 옷을 찢으며 사진을 찍던 그 악취가 틀림없었다.
공포를 억누르며 주먹을 꽉 쥐자, 또 다른 기억이 떠올랐다. 바로 사건이 벌어진 후, 강재욱이 나를 욕조에 던져놓고 무아지경으로 물을 뿌려댔던 순간과 찬물이 콧속 깊숙이 스며들어 숨이 막혔던 그 순간...
강재욱은 낮은 목소리로 내게 물었었다.
“그 남자랑 했어?”
그는 나를 병원으로 끌고 가 검사를 받게 했었고, 손끝 하나 건드려지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더 이상 문제 삼지 않았었다.
그때, 중년 남자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서도원! 방에 아무도 없어!”
전화기 너머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삼촌?’
목소리의 주인인 서도원은 내 친척이자, 내게 유일하게 ‘가족’으로 남은 삼촌이었다.
“아무도 없다고? 아린이가 어디를 갈 수 있겠어? 너 혹시 딴짓한 거 아니야?”
중년 남자는 다급히 부인했다.
“무슨 소리! 난 그저 사진만 찍으려고 했을 뿐인데, 방에 없었다니까! 서도원, 그 아이는 네 조카야. 게다가 네가 부잣집에 팔 계획이라고까지 했는데 내가 어찌 감히 건드릴 수 있었겠어?”
“그럼 정말 방에 없었단 말이야? 그 애는 휴대폰도 없어. 어디 가봤자 연락할 곳도 없고... 일단 돌아와. 너무 티 내지 말고 다음 기회를 노리자고. 어차피 기회는 얼마든지 있어.”
중년 남자는 주저했다.
“그래도 네 조카잖아. 게다가 그 부잣집 도련님이 원한다면서! 이런 짓을 했다가 강씨 가문에게 보복당하는 거 아니야?”
서도원은 가소롭다는 듯 비웃었다.
“걱정하지 마. 강재욱은 우리한테 신경도 안 써. 그 애는 눈이 멀었는데도 하루에 열 시간 넘게 손끝이 다 갈라질 정도로 점자를 공부했어. 그렇게 대학에 가겠다고 발버둥 쳤어. 하지만 현실을 봐야지. 어떤 명문대가 눈먼 애를 받아주겠어? 강재욱이 나한테 뭐라고 했는지 알아? 내 조카의 자존심을 부숴버리고 기를 꺾어 놓으라고 했다니까! 그러면 내가 그 애를 넘겨준 뒤에는 강재욱의 말도 순순히 따를 테니까. 그러면 강재욱한테 그 대가를 돈으로 받아낼 수 있겠지. 너한테 진 빚도 그 돈으로 갚을 거야. 15% 이자 포함해서 5,200만 원 전부...”
서도원의 말이 하나도 빠짐없이 내 귀에 박혔다.
전생에도 그는 사건이 벌어진 후 가장 먼저 나를 찾아와 위로했었다.
“꼭 범인을 찾아줄게. 난 네 유일한 가족이야. 너한테는 이 삼촌이 필요해.”
서도원은 언젠가 내가 강씨 가문의 안주인이 될 수도 있다는 달콤한 환상을 심어주면서 강재욱의 말에 고분고분 따르도록 부추겼다.
나는 서도원이 어떤 인간인지 알았지만, 이 정도로 극악무도할 줄은 몰랐다.
그리고 강재욱 역시 이 모든 것을 알고 있었기에, 사건은 흐지부지된 것이었다.
중년 남자가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나는 조금 기다렸다가 로비로 이동했다.
“고객님,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프런트 직원이 정중하게 물었다.
“경찰을 불러주세요.”
“경... 경찰이요?”
“방에서 2억 원짜리 팔찌가 사라졌어요.”
나는 천천히 마스크와 모자를 벗었다.
이 마스크는 첫날 내려왔을 때 그 남학생에게 부탁해 사다 놓았던 것이었다. 강재욱이 비닐봉지 채로 버리기 전에, 나는 미리 마스크를 주머니에 넣어 뒀었다.
프런트 직원이 숨을 들이켰다.
“2억 원... 짜리 팔찌가 방에서 사라졌다고요?”
직원의 시선에는 의심이 서려 있었다. 눈이 보이지 않는 내가 그런 값비싼 보석을 갖고 있을 리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 팔찌는 재욱 오빠... 강재욱 씨가 사준 거예요.”
프런트 직원이 강재욱의 이름을 모를 리 없었다. 이곳에는 수백 명의 VVIP 고객이 있었지만, 강재욱 같은 인물은 손에 꼽혔다. 그 때문에 강재욱의 신상은 이미 직원들 사이에서 철저히 공유되고 있었다.
“아, 생각났습니다. 강재욱 씨와 함께 오셨던 분이시군요. 죄송합니다. 고객님, 지금 바로 경찰을 부르겠습니다!”
경찰은 빠르게 도착했다. 신고를 받은 후, 강재욱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그는 받지 않았다.
나는 강재욱이 전화를 받지 않을 것조차 예상하였다.
‘송지우가 다쳤는데, 강재욱이 다른 것에 신경 쓸 리 없지. 게다가 낯선 번호라면 더더욱 받지 않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