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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6장

“저와 서준이는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다른 사람과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저도 몰라요. 전에 멋도 모르고 좋아했던 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지금은 이미 정신을 차렸고 더는 서준이 사랑하지 않아요.” 고명준이 내 말에 살짝 놀란 것 같았다. 내가 이렇게 솔직하게 내가 생각하는 바를 말할 줄은 몰랐을 것이다. 고명준의 침묵에 나는 이제 한시름 놓아도 되겠다고 생각했는데 고명준이 코웃음을 치더니 나를 더 경멸하기 시작했다. “너처럼 하찮은 애가 서준이에게 치근덕대면 어쩔 거야? 서준이는 널 좋아할 리가 없어. 왠지 알아? 너에겐 자격이 없거든.” 고명준의 말은 비수처럼 내 마음에 꽂혔다. 나는 이를 악물고 쏟아져 나올 것 같은 눈물을 꾹 참으며 애써 침착함을 유지했다. 여기서 고개를 숙이면 절대 안 된다는 생각에 나는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확신에 찬 눈빛으로 고명준을 바라봤다. “회장님, 저도 제 자리가 어딘지 잘 압니다. 서준이가 나를 좋아해 줄 거라고 생각해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어요. 하지만 이것만은 알아두셨으면 좋겠어요. 저는 회장님이 생각하는 것만큼 하찮은 존재가 아니에요. 저도 제 자존심이 있고 제 선택이라는 게 있어요.” “오늘 이렇게 찾아온 건 회장님과 선을 긋기 위해서예요. 회장님 손자와 회장님 가문이 더 이상 제 생활에 영향을 끼칠 수는 없을 거라는 걸 알려드리고 싶어서요.” 고명준이 복잡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내가 이렇게 견결하게 나올 줄은 몰랐을 것이다. 고명준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이제 나가도 된다고 손짓했다. 하지만 내가 여기까지 찾아온 건 이 일 때문만은 아니었다. 가라고 해서 바로 나간다면 내 입장이 더 초라해진다. “이제 저와 서준이 사이를 말씀드렸으니 두 가문의 관계를 정리할 때가 된 것 같아요.” 내가 고서준과 분에 넘치는 행동을 하지 않았으니 고서준도 내 할머니의 죽음에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다. “이씨 가문의 은혜를 갚기 위해 증거가 명확한 사건도 증거 부족으로 덮으셨죠. 혹시 꿈에 나올까 두렵지도 않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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