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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의 서약피의 서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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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장

김소연은 허정우의 터무니없는 자신감에 순간 말문이 막혔다. 뻔뻔하기 짝이 없는 말을 태연히 내뱉는 그의 모습에 실소가 절로 터져 나왔다. 화가 치민 김소연은 그를 힘껏 밀쳐내며 속에 맺혔던 차가운 말들을 거침없이 쏟아냈다. “너 같은 쓰레기 따위가 감히 나를 이용하려 들어? 당장 꺼져!” “너...” 김소연의 단호한 거절과 거침없는 태도에 당황한 허정우는 멍하니 서 있다가 이내 얼굴이 서늘해지며 분노로 일그러졌다. 잔뜩 굴욕감을 느낀 그는 이를 악물며 격노했다. “내가 준 기회를 네가 스스로 찬 거야. 후회돼도 두 번 다시 날 찾지 마!” ‘후회? 그래, 어디 한번 두고 보자. 누가 후회하게 되는지.’ 김소연은 얼굴에 조소를 띠며 허정우의 말을 가볍게 흘려넘기고 단호히 돌아섰다. 밖으로 나오니 어느새 하늘에서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김소연은 분노와 혼란 속에서 빗속을 걸었다. 얼마나 걸었는지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온몸이 비에 흠뻑 젖어 있었다. 택시를 타고 집에 도착한 김소연은 차에서 내리자마자 마침 집으로 돌아온 엘을 마주쳤다. 마음을 추스를 틈조차 없었다. 우뚝 선 그의 모습은 모델처럼 완벽해 보였다. 길게 뻗은 다리와 강렬한 존재감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저절로 감탄을 자아내게 했다. 엘은 미간을 찌푸리며 김소연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왜 이렇게 넋 놓고 있어. 대체 어디 갔다 온 거야? 비 맞고 감기라도 걸리면 내 아이도 열이 날 거라고.” “...” 엘의 꾸짖는 말투가 허정우의 날 선 말들을 떠올리게 했지만 이내 그 한마디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 뱃속의 아이는 엘의 아이잖아.’ 엘은 이 아이를 정말로 소중히 여긴다. 허정우 따위가 지껄인 말로 자신을 상처 입힐 필요가 없었다. 김소연은 고개를 약간 숙이며 조심스럽게 대꾸했다. “엘, 태아는 열이 나지 않아요. 감기에 걸려도 고생하는 건 저 혼자일 거예요.” 엘은 얼굴을 굳히며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임신에 대해 따지고 드는 그녀의 태도가 귀엽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은근히 괘씸하기도 했다. “어서 들어가서 옷부터 갈아입어!” 단호한 그의 목소리에 김소연은 어깨를 움츠리며 서둘러 집 안으로 들어갔다. 옷을 갈아입고 거실로 나온 김소연은 시어머니 강여진이 몰래 디저트를 먹고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강여진은 아들이 꾸짖을까 봐 황급히 디저트를 떠 김소연에게 건넸다. “소연아, 이거 좀 먹어봐!” “어머니, 크림은 제거하세요. 임신 중에는 적합하지 않아요.” 엘이 소파에 앉으며 엄격한 어조로 말했다. 강여진은 순간 멈칫하더니 아들의 말을 듣고 서둘러 크림을 덜어내며 변명했다. “아들, 엄마는 진짜 한 입도 안 먹었어.” 엘이 믿을 수 없다는 듯 그녀를 흘겨보자, 강여진은 입을 삐죽이며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마치 모녀처럼 티격태격하는 두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던 김소연은 디저트를 한 입 베어 물었다. 달콤한 맛이 입안 가득 퍼지며 조금 전까지의 답답한 마음이 한결 나아지는 듯했다. 남자는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정리한 뒤 넥타이를 느슨하게 잡아당겼다. 그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김소연에게 머물렀다. 그녀의 입가에 크림이 묻어 있는 것을 본 그는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작은 고양이 같네.” 미처 알아듣지 못한 김소연은 잠시 멈칫하다가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맑고 커다란 눈을 깜박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엘은 검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 “여기.” “어디요?” 김소연은 손으로 입가를 문지르며 계속 찾지 못했다. “아이참, 너희 둘 다 왜 이렇게 답답해.” 옆에서 흐뭇하게 지켜보던 강여진은 엘의 손을 잡아 김소연의 입가에 묻은 크림을 닦아냈다. “이제 됐지?” 그러고는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지으며 아들이 반응하기도 전에 재빠르게 손을 그의 입가에 가져갔다. 엘이 크림이 묻은 손가락을 자연스럽게 입술에 넣는 모습을 눈앞에서 똑똑히 본 김소연은 순간 머리가 하얘지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 하지만 그녀의 입가에 묻었던 크림을 먹고도 아무렇지 않은 듯 행동하는 모습이 오히려 더 당황스러웠다. 게다가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는 눈빛에 김소연은 볼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강여진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아들을 살짝 밀었다. “어때? 아주 달콤하지?” 김소연은 입술을 깨물었다. 남자의 짙은 눈동자가 그녀의 붉은 입술에 고정된 채 애매하게 말했다. “네, 다네요.” 그의 말이 디저트를 가리키는 건지, 아니면 다른 의미인지 알 수 없었다. 목소리엔 어딘지 모를 장난기가 서려 있었다. 김소연의 심장은 터질 듯 뛰기 시작했고 그녀는 긴장한 나머지 혀로 입술을 핥았다. 혹시라도 크림이 남아 있을까 봐 걱정되었다. 그 순간 남자의 눈빛이 더 깊어졌다. 그녀의 행동을 주의 깊게 바라보던 그는 짜증스럽게 고개를 들더니 넥타이를 거칠게 풀어 헤쳤다. 김소연은 그의 거친 동작과 움직이는 목울대를 보며 왠지 모르게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내가 무슨 잘못이라도 했나?’ 그녀의 어리둥절한 표정이 오히려 남자를 더욱 괴롭혔다. 결국 그는 차가운 물 한 잔을 들이켜며 열을 식혔다. “아니, 왜 갑자기 이렇게 더운 거지? 아줌마, 에어컨 안 켰어요?” 강여진이 일부러 장난스럽게 물었다. “에어컨은 잘 작동되는 중인데요, 사모님.” 가정부 김영자가 살며시 웃으며 대답했다. “적당히 하세요.” 엘은 더 이상 견딜 수 없다는 듯 차가운 목소리로 한마디를 남기고 위층으로 올라갔다. 강여진은 혀를 쏙 내밀더니 얌전하게 디저트를 먹는 김소연에게 태블릿을 들고 슬쩍 다가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소연아, 너 그거 알아? 내가 오후에 네 옷을 좀 사려고 네 남편한테도 고르라고 사진을 몇 장 보냈는데, 글쎄 네 남편이 무시하지 않은 거 있지. 게다가 어떤 옷을 골랐는지 맞혀볼래?” 김소연의 관심은 온통 강여진이 인터넷 쇼핑을 한다는 사실에 쏠려 있었다. 강여진은 웃으며 태블릿 화면을 가리켰다. “얘 봐라, 취향이 진짜 독특하더라니까!” “...” 고개를 숙여 확인하니 화면 속에는 교복 스타일의 플리츠 스커트가 있었다. 김소연은 입술을 깨물며 문득 아침에 숙적을 만날 때 입었던 옷을 떠올렸다. ‘설마... 이게 우연일 리가 없잖아. 엘도 이런 스타일을 좋아한다고?’ ... 김씨 가문 저택의 정교하게 꾸며진 신혼 방. 가까스로 허정우를 달래 집으로 데려온 김은지는 눈물을 글썽이며 애교를 부렸다. “오빠, 용서해 줘! 내가 임신하지 않은 건 사실이지만 그건 다 오빠를 기쁘게 해주고 싶어서 그랬던 거야. 게다가 박 여사님이 날 받아들이지 않으시니 어쩔 수 없었어...” 그녀는 연약하고 애처로운 모습으로 허정우를 침대로 끌어당기며 말했다. 원피스 지퍼를 내려 어깨를 살짝 드러낸 그녀는 눈물에 젖은 얼굴로 그의 입술에 가볍게 키스를 했다. “나 정말 오빠 사랑해...” 허정우는 굳은 표정으로 그녀를 노려보며 낮게 물었다. “말 돌리지 마! 그 남자는 뭐야? 어떻게 된 거냐고?” 김은지는 속으로 조마조마했지만 곧 울먹이며 그의 가슴을 툭툭 치며 말했다. “언니 말 믿어? 합성한 사진으로 나를 모함한 거라고! 어떻게 오빠마저 나를 의심할 수 있어? 이럴 바에는 차라리 죽는 게 낫겠어!” 그녀는 더욱 서럽게 흐느꼈다. “아직도 모르겠어? 나한테는 오빠밖에 없어. 어린 나이에 순결도... 뭐든 다 오빠한테 줬어.” 그때 김은지는 아직 어렸고 허정우는 김소연에게 첫 키스조차 받지 못해 이미 참을성이 한계에 다다른 상태였다. 김은지는 점점 더 그의 품에 파고들며 그를 천천히 침대로 눕혔다. “오빠가 아이를 원한다면 우리 노력하면 되잖아.” “네가 애교 좀 부린다고 내가 순순히 넘어갈 것 같아?” “오빠가 좋아하는 거, 내가 다 알잖아.” 김은지는 수줍게 미소를 지으며 그의 귀에 대고 간지럽히듯 속삭였다. 허정우는 결국 그녀의 요염한 모습에 무너지며 그녀를 품에 안았다. ‘그래, 통나무 같은 소연이보다야 은지가 백배 낫지.’ 하지만 이럴 때마다 허정우의 머릿속에는 김소연의 아름다운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만약 그녀가 지나치게 보수적이지 않았더라면, 지난 8년 동안 그와 더 가까워졌더라면 김은지를 사랑하는 일은 없었을지도 몰랐다... ‘하, 혼자 순결한 척은 다 하더니 지금은 양아치 같은 놈이랑 엮여 있으면서 나를 거절해?’ 허정우는 분노와 억울함에 주먹을 꽉 쥐었다. 한 시간 후 김은지는 조심스럽게 방문을 닫았다. 복도에 기다리고 있던 노수영이 다가왔다. “정우는 잘 달랬니?” 김은지는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걱정 마세요, 엄마. 김소연이 아무리 이간질하려 해도 정우 오빠는 내 손바닥 안에 있잖아요. 나한테 홀려서 정신도 못 차린다니까요.” “역시 엄마는 대단해요. 남자를 다루는 데는 정말 할 말이 없네요.” 김은지가 남자를 다루는 능력은 노수영에게서 물려받은 것이었다. 노수영은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 역시 그런 솜씨로 김기태를 사로잡았다. “빨리 약이나 먹어, 이것아. 안 그러면 진짜 아이 못 가진다니까. 다행히 정우는 네가 복원한 그거 의심도 안 하더라.” “말도 마요. 그 덕분에 지금 오빠가 나한테 얼마나 잘해주는데.” 김은지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이제부터는 더 신중해야 해. 정우가 비록 사생아이긴 해도 허 회장이 정우를 굉장히 아끼거든. 겨우 김소연한테서 빼앗은 자리니까 절대 놓치면 안 돼.” 노수영의 당부에 김은지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허씨 가문이 아무리 손에 꼽히는 재벌가라 해도 이씨 가문보다는 한참 모자라잖아요.” “이씨 가문 같은 거대한 재벌가에 우리가 쉽게 접근할 수 있다고 생각해? 그건 네 사촌 언니 덕을 좀 봐야 할 거야.” 노수영의 눈에 순간 자부심이 번졌다. 김은지도 사촌 언니를 떠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이씨 가문의 삼 형제 중 가장 중요한 사람을 모시는 이가 바로 그녀였다. 언젠가 김씨 가문도 반드시 이씨 가문과 손을 잡는 날이 올 거라 믿었다. 그리고 김소연은 이미 김씨 가문에서 쫓겨난 그저 버림받은 존재에 불과했다. 그러나 오늘 당한 굴욕을 생각하자 김은지는 분노로 주먹을 꽉 쥐었다. “호텔에서 가짜 유산 영상이 찍혔어요. 그 비겁한 년이 사람들 앞에서 날 망신 줬다고요! 만약 그 영상이 박 여사님께 넘어가면 나와 정우 오빠의 결혼도 끝장이에요.” “그리고 걔가 이번 주얼리 공모전에서 우승해 한울 그룹을 다시 차지하겠다고 큰소리쳤어요. 엄마, 김소연이 더 이상 설치지 못하게 막아야 해요!” 딸의 다급한 목소리에 노수영은 차분하게 대답했다. “걱정하지 마. 엄마가 알아서 처리할게.” 그러고는 냉혹한 눈빛을 빛내며 몇 초간 생각에 잠기더니 곧 김기태의 서재로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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