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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의 서약피의 서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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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장

김은지가 난처한 기색을 감추며 다소 초조한 울먹임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어제 내가 언니 공을 가로채서 미안해. 사실 나는 언니랑 경쟁하고 싶지 않아. 언니가 얼마나 실력 있는지 잘 알아. 게다가 우린 가족이잖아.” “우리 다니엘 대표님을 만나러 가서 화해를 청해보면 어떨까? 내가 들었는데 다니엘 대표님이 곧 이곳에서 회의가 있으시대. 언니가 가서 부탁드려 그 계약을 나한테 주면 내가 정우 오빠를 설득해서 언니를 한울 그룹 부대표로 바로 복귀시킬게. 이 조건 어떻게 생각해?” 김은지는 최대한 매력적으로 들리게 미끼를 던졌다. 그러나 김소연의 눈이 가늘게 좁혀지며 얕은 냉소가 떠올랐다. 어제 자신을 회사에서 쫓아내기 위해 온갖 수단을 쓰던 사람이 이제 한 건의 계약 때문에 다시 회사로 오라고 한다니. 마음속으로 불안해하며 대결에 대한 두려움을 느꼈더라도 김은지는 결코 이런 방식으로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지는 않을 것이다. 아무리 설득해도 김소연이 미동도 하지 않자 김은지는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김소연의 손을 붙잡으며 애처롭게 말했다. “언니, 제발 부탁이야. 나 좀 도와줘, 응?” 그때 김은지는 익숙한 구두 소리를 들었다. ‘좋아, 노예슬이 오고 있군.’ 김은지의 눈가에 서늘한 웃음이 떠오르더니 돌연 김소연의 팔을 잡아당기려 했다. 그러자 김소연은 눈살을 찌푸리며 본능적으로 피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김은지가 느닷없이 뒤로 넘어지며 테이블을 뒤엎고 바닥에 무겁게 쓰러졌다. 김은지는 창백한 얼굴로 모퉁이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비명을 질렀다. “아! 내 아이! 언니, 왜 날 밀었어!” 그 모습을 보며 김소연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녀는 결코 밀지 않았다. 그러나 김은지의 치마 아래로 피가 흥건하게 번지는 것을 보고 바로 몸을 낮춰 김은지의 맥을 짚었다. 김은지는 의도적으로 김소연의 손목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은 채 소리쳤다. “오빠! 도와줘!” “세상에! 은지야!” 이때 허정우를 데려온 노예슬이 큰 소리로 외쳤다. 허정우의 얼굴은 급격히 어두워지며 다급히 달려와 김은지를 번쩍 안아 들었다. 이윽고 로비에 있던 많은 이들의 시선이 그들에게 쏠렸다. “김소연, 이게 뭐 하는 짓이야!” 허정우는 그녀를 밀치며 차갑게 소리쳤다. 한편 김은지는 그의 품에 몸을 기댄 채 흐느끼며 말했다. “난 언니한테 다니엘 대표님께 가서 부탁해 달라고 하려던 것뿐인데... 그냥 잠깐 우리 아이 이야기를 꺼냈더니 언니가 갑자기 나를 밀쳤어! 아아... 너무 아파. 우리 아기... 아기가 잘못된 거 아니겠지?” “울지 마.” 허정우는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그녀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바닥에 흥건히 고인 피를 보자 그의 얼굴은 사색이 되었다. 주변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사람들은 웅성거리며 김소연을 향해 손가락질했다. “저 여자 대체 어떻게 된 거야? 동생의 아이까지 해치다니!” “저건 살인자나 다름없어!” 분노와 비난의 목소리가 터져 나오는 가운데 허정우는 얼굴이 일그러져 분노에 찬 눈으로 김소연에게 다가와 그녀의 목을 거칠게 움켜쥐며 악을 썼다. “이 지독한 년, 감히 내 아기를 해쳐? 당장 죽여버리겠어!” 김소연은 그의 손을 뿌리치며 담담한 표정을 유지했지만 그의 말은 그녀의 마음을 차갑게 베어갔다. ‘내 아이...’ 허정우가 자신을 죽일 듯 노려보는 그 순간에도 그는 김은지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증명하고 있었다. 김소연은 바닥에 떨어진 김은지의 높은 굽을 힐끗 보더니 낮은 웃음을 흘렸다. “뭐가 웃긴 거야!” 허정우는 차가운 눈빛을 번뜩이며 버럭 소리쳤다. “경찰 불러! 김소연이 은지를 유산하게 했어. 저년을 감옥에 쳐넣어야 해!” 그러나 김소연은 여전히 차분했다. 그녀는 가슴에 손을 얹으며 여유로운 미소를 띠고 말했다. “내가 밀치는 거 네가 직접 봤어?” “언니가 밀지 않았으면 내가 왜 넘어지겠어! 정말 너무해. 아이는 대체 무슨 죄가 있다고... 내가 얼마나 언니한테 양보했는데...” 김은지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흐느끼며 말하자 눈빛이 더욱 사나워진 허정우는 마음 아파하며 그녀를 꼭 안아주었다. “더는 말할 필요 없어! 당장 저년 잡아!” 노예슬은 즉시 보안 요원을 부르러 갔고 주변에서 구경하던 사람들은 김소연을 가리키며 수군거렸다. 그런데도 김소연은 아랑곳하지 않고 태연하게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화면을 들이밀며 차갑게 웃었다. “잘 봐. 네가 그렇게 믿고 있는 은지가 어떻게 넘어졌는지.” 방금 정서우 덕분에 몸에 달린 감시 카메라를 떼지 않은 것이 참 다행이라 생각했다. 허정우는 당황한 표정으로 화면을 들여다보더니 얼굴이 점점 굳어지고 있었다. 그 영상 속에는 김은지가 김소연을 붙잡으려 손을 뻗었으나 김소연이 재빠르게 피하고 김은지가 스스로 뒤로 물러서며 넘어지는 장면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한마디로 김소연은 김은지를 밀지 않았다. 모두가 녹화 영상을 지켜보는 동안 김은지도 그 장면을 확인하고는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도대체 김소연이 왜, 그리고 어떻게 카메라를 준비한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김소연은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바닥에 퍼져 있는 피를 내려다봤다. 그러더니 천천히 몸을 숙여 김은지를 꾹 누르며 그녀의 치마 아래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김소연의 손에 들린 것은 바로 빨간 액체가 담긴 비닐 팩이었다. 주변에 있던 모든 사람이 눈이 휘둥그레졌다. 김소연은 그 비닐 팩을 허정우의 코앞에 들어 올리며 비웃었다. “이게 네 아이야. 눈 똑바로 뜨고 잘 봐둬. 한 팩의 혈액 소품이란다.” 허정우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비닐 팩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돌려 김은지의 창백한 얼굴을 보았다. 그의 표정은 금세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김소연은 냉소를 지으며 김은지를 바라봤다. “혈액팩 사용하는 거 중독이라도 된 거야? 지난번에 김씨 가문 저택에서 날 모함하려고 남겨둔 거야? 너 참 알뜰하다.” “...” 김은지는 분노로 얼굴이 일그러졌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한편 김소연은 허정우의 굳어버린 표정을 바라보며 냉소를 터뜨렸다. 그녀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임신한 여자가 10cm 하이힐을 신는 걸 본 적 있어? 내가 아까 얘 맥 잡아봤는데 아무것도 안 잡히더라. 이미 유산한 거야 아니면 애초에 임신한 적도 없는 거야?” “그래, 이참에 나까지 엮어서 한꺼번에 처리하려고 한 거겠지. 그런데 허정우 너도 실망할 필요 없어. 그 아기가 네 아이라고 누가 장담해?” 그 말속에 담긴 의미를 알아 챈 허정우는 얼굴이 극도로 어두워졌다. 김은지는 자신에게로 쏟아지는 시선과 김소연의 말에 질겁하며 몸을 떨었다. 그러고는 애처로운 모습으로 눈물을 쥐어짜 내며 허정우에게 매달렸다. “오빠, 언니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어? 나, 난 오빠밖에 없어. 이렇게 모함당할 바에야 차라리 죽어버리는 게 낫겠어.” 김은지의 울음소리를 들은 허정우는 금세 마음이 약해졌다. 고개를 돌린 그는 김소연의 싸늘한 모습에 불쑥 화가 치밀었다. “김소연, 좀 적당히 해! 은지가 얼마나 순수한 사람인지 내가 모를 것 같아? 오히려 너야말로 양아치의 아이를 가진 주제에, 네가 제일 더러워!” 김소연은 차가운 눈빛으로 허정우를 노려보며 조용히 휴대폰을 꺼내 어제 찍어둔 사진을 높이 들어 올렸다. “김은지, 다음엔 제대로 된 증거라도 가지고 우겨. 그리고 허정우, 넌 최소한 네 자식인지 확실히 믿을 수 있는 애를 가지도록 해.” 사진 속에는 김은지가 한 남자와 호텔 방에서 다정하게 끌어안고 있는 장면이 찍혀 있었다. 허정우는 사진을 확인한 순간 한발 물러서며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는 눈빛이 점점 더 어두워지며 김은지를 노려보았다. 잔뜩 겁을 먹은 김은지는 덜덜 떨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오빠...” “이게 뭐야! 설명해봐!” 허정우의 목소리는 한껏 차가웠고 그의 표정은 분노로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게다가 주변에서 지켜보던 사람들의 비난에 그는 물러설 수 없었다. “와, 진짜 쓰레기다. 그것도 모르고 불쌍하다고 생각하며 애꿎은 사람만 욕했네. 그냥 저 여자한테 철저히 이용당한 거였잖아.” “저 남자도 진짜 병신같아. 여자 친구는 다른 놈이랑 놀아나는데, 가짜 임신에 속아 넘어가다니.” “언니한테 누명을 씌우고 자기는 뒤에서 저러고 다녔네. 완전 악질이다.” 김소연은 조용히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뒤로하고 느긋하게 걸어나갔다. 허정우는 그녀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입술을 악물고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그녀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 호텔 입구에서 허정우는 갑자기 김소연의 손목을 강하게 움켜잡았다. 김소연은 차가운 표정으로 뒤돌아보며 쏘아붙였다. “뭐 하는 거야? 아직도 할 말이 남았어?” “소연아, 아직도 날 미워하는 거야?” 허정우는 목소리를 한층 낮추며 다 알고 있다는 듯한 눈빛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네가 요즘 계속 문제를 일으키고 수시로 은지를 건드리는 이유... 사실 나한테 돌아오고 싶어서 그런 거 아니야?” 그는 김소연을 가만히 훑어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녀가 아름답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과거 그녀가 권력을 쥐고 있지 않았다면 그렇게 대하지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김은지의 아이는 가짜였고 김소연은 확실히 라미에르 계약을 따낼 능력도 있었다. ‘그래 차라리...’ 허정우의 눈빛이 깊어지더니 그는 그녀를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기려 하며 뜨거운 숨결을 내뱉었다. “너 아직도 날 사랑하고 있잖아. 그럼 기회를 줄게. 네 배 속 애비도 없는 애새끼는 따지지 않을 테니까, 대신 내 말 잘 듣고 앞으로도 나를 위해 중요한 계약들을 따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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