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그야말로 짙은 증오로 담긴 한마디였다.
이지아는 서서히 머리를 들고 아무런 감정도 섞이지 않은 차분한 시선으로 오연주를 쳐다봤다.
“난 정문으로 갈 수 없어요?”
오연주가 한창 뭐라 말하려 할 때 거실 소파에 앉아있던 서주현이 밖으로 나왔다.
그녀는 하이힐을 또각거리며 입가에 미소가 걸린 채 이리로 다가왔다.
이지아를 마주한 서주현은 저도 몰래 흠칫 놀랐다.
“어머! 네가 지아니?”
“3년 동안 소년원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전에는 그나마 이씨 가문의 딸로 봐줄 만 하더니 왜 갑자기 이렇게 뚱뚱해진 건데?”
“연주 씨, 얼른 사람 찾아서 지아 얼굴에 난 여드름 좀 보여요! 나중에 흉터 남으면 혼삿길까지 막히겠어요.”
“얘 공부도 못하고 재능도 없는데 얼굴까지 못생겨지면...”
“...”
한마디 한마디가 예리한 칼날처럼 오연주의 심장을 쿡쿡 찔렀다.
전에 이유영이 있을 때 이런 말들은 오연주가 서주현에게 했던 말이다.
어쨌거나 이유영이 서현주의 딸보다 훨씬 훌륭하니까.
하지만 이젠...
“아 참, 이제 곧 개학인데 지아는 성적뿐만 아니라 소년원에 갇힌 기록까지 있어 웬만한 학교엔 입학하기 힘들겠네요!”
“사흘 뒤에 있을 전시회에 우리 사촌 언니도 참석할 거예요. 언니가 부교장이니 그때 가서 지아 데리고 전시회로 나오세요. 제가 대신 소개라도 해드릴게요!”
이지아는 잔뜩 거만을 떨며 깨고소해하는 서주현을 바라보며 아무런 표정도 안 지었다.
그녀는 매우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마음만 받을게요.”
“저만 붙을 생각이 있다면 국제 최고의 고등학교에 붙을 겁니다.”
말이 떨어진 순간 오연주가 멍하니 넋 놓고 말았다.
서주현도 고개 숙여 이지아를 쳐다봤다. 왜 그런지 콕 집어서 말할 순 없지만 눈앞에 있는 무표정한 이 소녀한테서 알 수 없는 압박감이 느껴졌다.
그녀가 내뱉은 말은 더없이 확고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최고의 고등학교?”
“네가 뭐로 그런 학교에 붙는 건데?”
오연주가 버럭 화냈다.
그녀는 서주현에게 당했던 분노를 이지아에게 죄다 쏟아부었다.
“유영의 절반만 됐어도 내가 가서 딴 사람 애원할 필요가 있겠어?”
“주현 씨, 얘는 됐고 그때 가서 유영이 데리고 전시회 갈게요.”
이지아는 차분하고 맑은 눈길로 오연주를 빤히 쳐다봤다.
‘이유영의 절반만 됐어도?’
“연주 씨, 지아가 이제 막 소년원에서 나와서 세상 구경 좀 시켜줘야죠. 안 그러면 우리 모임에서 연주 씨가 이익만 따지는 야박한 엄마라고 뭐라 할 거예요.”
서주현은 입을 막고 피식 웃더니 자리를 떠났다.
한편 오연주의 안색은 한없이 일그러졌다.
‘그놈의 소년원, 소년원!’
“다 너 때문이야.”
“인제 만족해?!”
오연주가 싸늘한 눈빛으로 이지아를 째려봤다. 추하고 뚱뚱한 그녀는 어딜 봐도 오연주가 낳은 자식이라곤 믿어지지 않았다.
다 같은 딸인데 이유영은 이지아보다 몇 배나 더 나은지 모른다.
“내일 유명화가 한 분 모셔와서 그림 가르칠 테니까 뭐라도 머리에 집어넣어. 전시회 갈 때 제발 내 체면 좀 깎지 말고.”
말을 마친 오연주는 콧방귀를 뀌며 거실로 돌아갔다.
이지아는 문 앞에 덩그러니 버려진 채 고개 들어 이씨 저택을 올려다보았다. 곧이어 그녀의 차갑고 싸늘한 눈동자가 오연주의 뒷모습에 고정됐다.
“이런 거였구나...”
“오빠가 말한 편애가 바로 이런 거였네...”
“...”
이지아의 방은 2층에 있는 서브 침실이었다.
이유영의 메인 침실을 지나갈 때 그녀는 문득 걸음을 멈추고 방안을 쭉 훑어보았다.
인테리어와 장식품 모두 럭셔리함이 차 넘치는 방이었다.
한편 이지아의 방은...
수수하다 못해 컴퓨터까지 데스크톱이었다.
“여긴 유영의 방이야.”
오연주는 그녀가 걸음을 멈추자 차가운 말투로 쏘아붙였다.
“네 방은 저기 옆에 있어. 불공평하다고 생각할 필요 없어. 각자 어울리는 방이니까. 유영이는 나중에 명문대 갈 테니 당연히 좋은 방을 남겨줘야지 않겠니?”
이지아는 고개를 갸웃거리고 무표정한 얼굴로 오연주를 쳐다봤다.
“성적이 좋으면 우대받을 자격이 있는 거예요?”
“맞아! 다시 선택할 권리가 있다면 너 같은 말썽꾸러기에 돈이나 훔치고 몸싸움 벌이는 딸은 아예 낳지도 않았을 거야!”
“유영이가 훌륭했으니 망정이지. 너 때문에 엄마 체면이 바닥나게 생겼다고!”
오연주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은 가차 없이 사람 마음에 비수를 꽂았다.
애초에 그녀는 이지아의 몸 주인이 되어서 딸의 의무를 다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는데 인제 보니 전혀 그럴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나 그쪽 딸 아니에요. 그쪽 딸은 이미 죽었어요.”
이지아는 숨 쉬듯이 자연스럽게 이 말을 내던졌다.
이어서 문을 쾅 닫고 서브룸으로 들어갔다.
“너...”
오연주는 화나서 손가락이 부들부들 떨렸다.
“망나니 기질은 여전하네. 소년원에 3년이나 갇혀 있었는데도 교육이 덜 됐어! 그 안에서 확 죽어버리지 뭣 하러 이 집으로 돌아와 돌아오길!!”
이지아는 그녀가 내뱉는 말을 한 글자도 빠짐없이 귓속에 박아넣었다.
그녀의 얼굴에서 일말의 표정 변화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어쩌면 아예 피와 살이 붙은 인간답지가 않았다.
데스크톱에 이지아의 얼굴이 비쳤다.
여드름으로 얼룩진 그야말로 험상궂은 얼굴이었다.
추녀의 끝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그런 면상이었다.
이 얼굴은 전생의 그녀와 비하면 아예 극과 극이었다.
타닥타닥.
이지아가 키보드에 손을 얹고 전생의 국제 공식 웹사이트를 열어 비번을 누르고 있었다. 일부 사람들에게 자신이 살아있다는 소식을 전해야 하니까.
하지만 곧이어 띠 소리가 울렸다.
[비밀번호가 틀렸습니다.]
이지아는 미간을 찌푸리고 다시 한번 입력했다.
하지만 결과는 좀 전과 똑같았다.
[비밀번호가 틀렸습니다.]
이어서 경보음이 울렸다.
‘말도 안 돼!’
비행기 폭파 사고로부터 지금까지 고작 이틀밖에 안 지났다.
게다가 국제 공식 웹사이트 권한에 대한 비밀번호는 오직 그녀만 알고 있다. 비행기에 탑승하기 몇 분 전까지 로그인했었는데...
“한수연?”
한유리가 전생에 한씨 가문으로 데려와 키운 여동생 한수연은 그녀와 비슷한 나이대에 에뮬레이트에 능하다. 한유리 말고 비밀번호를 아는 사람은 오직 동생 한수연뿐이다.
한유리가 작전 수행할 때 한수연이 몸을 불사르며 몇 번이고 그녀의 대역을 한 적이 있다...
여기까지 생각한 이지아는 휴대폰을 꺼내 더없이 익숙한 전화번호를 누르고 진주 갑부 한씨 저택에 전화를 걸었다.
뚜뚜...
“여보세요, 누구시죠?”
귓가에 전해지는 목소리는 여전히 진중하고 늠름한 집사 목소리였다.
“유준 오빠 바꿔주세요.”
더할 나위 없이 익숙한 목소리였다!
차갑고 삭막한 그녀의 목소리.
분명 음색이 다르지만 집사는 듣자마자 온몸에 소름이 쫙 끼쳤다.
“다... 당신 누구야? 대체 누구냐고?”
“집사님, 누구 전화에요?”
이때 불쑥 한유리 전생의 목소리와 너무 흡사한 목소리가 휴대폰 너머로 들려왔다.
그 순간 이지아가 있던 방 안의 공기마저 차갑게 식어갔다.
“아가씨, 누가 유준 도련님 찾으시네요.”
집사가 깍듯하게 그녀에게 대답했다.
“누군데요?”
“전화 이리 줘봐요.”
한씨 저택 공용 전화가 그녀 손에 쥐어졌다. 전화를 든 그녀는 이전 한유리의 상투적인 말투로 질문을 건넸다.
“누구세요?”
이 한마디에 한유리는 대뜸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작전 수행부터 시작해 개인 비행기가 사고 나고 폭발하기까지...
이 모든 게 보이는 것처럼 그리 단순하지가 않았다.
한유리의 차갑고 짙은 눈동자에 어두운 빛이 스쳤다.
그녀는 목소리를 내리깔고 되물었다.
“한씨 가문 한유리는 오직 한 명이고 어제 새벽에 사망한 거로 아는데 그쪽은 누구시죠?”
‘누구야 넌?’
전화기 너머로 상대가 문득 침묵했다.
몇 초 뒤.
세상을 발칵 뒤집어놓을 메시지가 이지아의 귓가에 울려 퍼졌다.
그야말로 어처구니없는 대답이었다.
“제가 바로 한유리인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