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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장

강주호는 짐짓 엄숙한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쇼핑하면 돈 쓰게 되잖아. 쇼핑하지 말고 돈이나 아껴. 나 며칠 뒤에 새 신발 사고 싶어.” 서럽기도 했지만 우습기도 했다. 강주호는 내 표정을 본 건지 잠깐 망설이다가 날 향해 다가왔다. 나는 강주호만 보면 기분이 언짢았기에 그를 상대해 줄 생각이 없었다. 나는 곧장 옆에 있는 시계 수리 전문점으로 향했다. 나는 시계를 꺼내 사장님에게 보여줬다. “안녕하세요, 사장님. 이 시계를 고치고 싶은데 가능할까요?” 사장님은 시계를 살펴보더니 바로 태도가 정중해졌다. “이 시계는 꽤 오래전 출시된 거라 여기에 맞는 부품들을 가져와서 수리해야 해요. 잠깐 옆에서 기다려주시겠어요?” 시계를 수리하는 것이 이렇게 복잡할 줄은 몰랐던 나는 얌전히 옆에 놓인 의자에 앉았고 사장님께서는 이내 여러 가지 과일과 간식들을 내어주셨다. “편하게 드세요.” 사장님께 감사 인사를 하려는데 강주호가 갑자기 문을 벌컥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서은아.” 나는 강주호가 왜 화가 났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난 그를 힐끗 본 뒤 바로 시선을 거두었다. 내가 무시하자 강주호는 조금 놀란 듯 보였다. 그러나 그는 이내 내게로 성큼성큼 걸어와서 내 손목을 잡았다. “이 가게는 잘 사는 사람들만 올 수 있는 곳이야. 그런데 네가 왜 여기 있어?” “내가 왜 여기 있는지 너한테 설명해야 해?” 나는 싸늘한 눈빛으로 강주호를 바라보았다. “너...” 가게 직원은 강주호를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고 그 눈빛에 머쓱함을 느낀 강주호는 목소리를 낮추며 내게 말했다. “네가 이곳에 있는 건 그 시계 주인 때문이지?” 나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 강주호는 꽤 똑똑했다. 내가 대꾸하지 않자 강주호는 내가 묵인한 것으로 여겼다. “그 남자 누구야? 서은아, 재벌가 자제들이 쉽게 속을 것 같아? 빨리 현실을 직시하는 게 좋을 거야.” 나는 처음부터 강주호와 싸울 생각이 없었다. 그리고 강주호 같은 사람에게 뭔가를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 가게 직원은 내 기분이 언짢다는 걸 보아낸 건지 우리 쪽으로 걸어와서 물었다. “안녕하세요, 고객님. 이분은 고객님 친구분이신가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모르는 사람이에요.” 강주호는 아주 충격적인 말을 들은 사람처럼 날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서은아, 너 방금 뭐라고 했어?”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가게 직원이 공손하게 손을 뻗으면서 나가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마침 허가람이 탈의실에서 나왔다가 강주호가 사라진 걸 발견하고 밖으로 나와 그를 찾고 있었다. 강주호는 결국 내키지 않는 얼굴로 나갔다. 유리창을 통해 강주호의 표정이 좋지 않은 게 보였다. 그러나 그는 애써 온화한 목소리로 허가람을 달래며 고개를 숙이고 허가람에게 뭐라고 속삭였다. “고객님.” 가게 사장이 종이 한 장을 들고 왔다. “이건 수령증이에요. 잘 챙겨두시길 바랄게요. 3일 뒤 시계를 가지러 오시면 돼요.” 나는 수령증을 받고서 대충 훑어본 뒤 결제하려고 했다. “얼마인가요?” 가게 직원은 조금 놀란 표정으로 날 보더니 차분하게 설명해 주었다. “수리 비용은... 수리가 끝난 뒤 결제하시면 돼요. 지금은 결제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난 미간을 찌푸렸다. 내가 기억하기로는 바로 결제해야 했었는데 가게 직원의 단호한 눈빛을 보니 뭐라고 할 수가 없었다. 수령증을 받고 가게 직원에게 감사 인사를 한 뒤 나는 가게를 나왔다. 강주호와 허가람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먼저 떠난 듯했다. 나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오늘 이곳에서 강주호를 보다니, 운이 지지리도 없었다. 이엘시는 화려하고 호화롭기로 유명한 도시였다. 백화점을 둘러보던 나는 몇백만 원씩 하는 가방과 옷들을 바라보며 쓸쓸함을 느꼈다. 그동안 나는 돈을 벌기 위해 거의 모든 욕망을 버렸었다. 그런데 이런 결말을 맞이하게 될 줄이야. “서은아.”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 보니 강주호가 빠른 걸음으로 날 향해 부랴부랴 걸어오는 게 보였다. 내가 입을 열려고 할 때 강주호가 갑자기 내 팔을 잡고 날 끌고 갔다. 나는 그가 날 백화점의 화장실, 그것도 남자 화장실로 끌고 가려고 하는 걸 뒤늦게 깨닫고는 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결국 그의 손에 끌려 남자 화장실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뭐 하는 거야?” 이 순간, 내 마음속에서는 분노의 불길이 치솟았다. “날 배신한 거야?” 강주호는 두 눈이 벌겠다. 그의 눈빛에서 비참함과 애절함이 보였다. 나는 차갑게 웃었다. “내가 널 배신했다고? 네가 허가람이랑 썸을 타면서 애정행각을 벌일 때, 나는 널 먹여 살리겠다고 미친 듯이 일만 했어.” “난...” 강주호는 말문이 막힌 건지 한참 뒤에야 어렵게 입을 열었다. “방금 핑계를 대서 허가람에게 먼저 돌아가라고 했어. 이제 우리 둘뿐이니까 얘기 좀 나누자.” “얘기를 나누자고? 뭘 어떻게 나눌 건데?” 내 말투는 차가웠고 마음속 분노의 불길도 전혀 사그라지지 않았다. “남자 화장실에서 얘기를 나누자고?” “너 바람피우는 거지?” 강주호는 내 말을 깡그리 무시하고 날 몰아세웠다. “돈 많은 남자라도 꼬신 거야? 그래서 날 버리려는 거야?” “강주호!” 난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더니, 넌 세상 사람들이 다 너 같은 줄 알아? 내가 널 버리는 이유는... 네가 역겹기 때문이야.” “난 안 믿어.” 강주호는 믿지 않으려고 했다. 그는 손을 들어 내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그 남자 네 몸에 손댄 거 아니야? 어디 한 번 봐봐.” 어깨가 밖으로 드러났고 서늘한 기운에 나는 두려움을 느꼈다. 그와 동시에 분노가 치솟았다. 힘껏 저항했음에도 나는 강주호를 밀어낼 수가 없었다. 패닉에 빠진 순간 단단한 무언가가 만져졌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신경 쓸 새조차 없이 그것으로 강주호의 머리를 힘주어 내리쳤다. 그에게 속박당한 상태라 제대로 힘을 쓸 수 없었지만, 강주호로 하여금 잃었던 이성을 되찾게 하기엔 충분했다. 그는 내가 들고 있던 재떨이를 보고 서서히 정신을 차렸다. “미안해.” 강주호는 날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눈에서 보이는 가련함은 날 그에게서 더 멀어지게 했다. “은아야... 내가 급해서...” 짝! 나는 손을 들어 강주호의 뺨을 힘껏 내리쳤다. 강주호는 뺨을 감쌌고 나는 심호흡을 하면서 옷매무새를 정리한 뒤 문을 열고 나갔다. 한때 내가 온 마음으로 사랑했던, 떠올리는 것만으로 내 마음을 사랑으로 가득 차게 했던 강주호는 이젠 내게 목구멍에 걸린 생선 가시 같은 불쾌한 존재가 되었다. 파리 한 마리를 삼킨 듯한, 속이 울렁거려서 괴로워도 토할 수 없는 듯한 그런 기분이었다. 백화점에서 나온 나는 길게 숨을 내쉬면서 몰래 결심을 내렸다. 오늘부터는 오로지 내게만 신경을 쓰겠다고 말이다. 호텔로 가서 짐을 챙긴 뒤 나는 기숙사로 돌아갔다. 강주호와 마찬가지로 나도 이엘대의 학생이었다. 그동안 나는 강주호를 위해 학업보다는 돈을 버는 것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그래도 다행히 공부를 소홀히 한 건 아니었다. 나는 짐을 들고 조용히 기숙사 문을 열었다. 이엘대 기숙사는 2인실이었고 나는 내 룸메이트 노유진이 자고 있을 거라고 예상했다. 문을 닫은 뒤 살금살금 침대 쪽으로 걸어갔는데 맞은편에서 원망 어린 시선이 느껴졌다. “어머, 서은아잖아. 왜 돌아왔대?” 노유진은 팔짱을 끼고 침대에서 일어나 앉았다. 짐을 옮기던 나는 그 순간 흠칫했다. 예전에 강주호를 위해 기숙사에서 나가 살겠다고 했을 때 노유진은 날 극구 말렸었고 심지어 내게 화까지 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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