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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장

“대체 왜! 나한테 이런 일이 생기는 거야!” 퍼붓는 빗줄기를 고스란히 맞으며 한 번쯤은 이성의 끈을 놓아버리고 싶은 생각에 마음껏 울분을 토해냈다. 내일 아침 눈을 뜨면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날 거로 다짐했다. 감정을 표출하고 나니 어느새 옷이 흠뻑 젖었고 머리가 어지러운 느낌이 들었다. 눈물을 닦고 나서 다시 캐리어를 챙기고 잠시 묵을 곳을 찾으려고 했다. 몸을 돌리는 순간 우산을 쓴 채 멀지 않은 곳에 서서 싸늘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는 낯익은 남자를 발견했다. 다름 아닌 주현수였다. 초라한 모습을 들킨 것 같아 왠지 모르게 자존심이 상하고 수치스러운 나머지 캐리어를 끌고 못 본 척 고개를 숙였다. 만약 눈치가 있는 사람이라면 의도를 파악했을 것이다. 하지만 주현수는 예외였다. 곁을 스쳐 지나가는 순간 그는 손을 뻗어 나를 덥석 붙잡았다. “참 못났군.” 대체 왜 화가 났는지 알 수 없지만 이를 바득바득 갈며 말했다. “고작 남자 하나 때문에 이런 몰골로 돌아다녀?” “신경 끄세요.” 나는 지지 않고 맞받아쳤다. 그리고 팔을 붙잡고 있는 그의 손을 내려다보며 쌀쌀맞게 말했다. “그렇게 창피하면 모른 척하지 그랬어요?” 주현수가 앞으로 살짝 잡아당기자 본의 아니게 우산을 같이 쓰게 되었다. 안 그래도 공간이 비좁은데 무방비 상태에서 끌려가니 자칫 품에 안길 뻔했다. 비록 부축받아 참사는 면했지만 얼굴에 숨결이 고스란히 닿았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물러나려고 했다. “가만히 있어.” 주현수는 싸늘한 목소리로 경고했다. “지금 열이 나잖아.” 그러고 나서 손을 뻗어 이마를 만졌다. 서늘한 손바닥이 이마에 닿는 순간 은근히 기분이 좋았다. “왜 이렇게 뜨거워?” 주현수는 눈살을 찌푸렸다. “온몸이 불덩이인데 코빼기도 안 보이는 남자 친구 때문에 울고불고 할 필요 있어?” 말이 끝나기 무섭게 마음이 울컥했지만 굳이 내색하고 싶지 않았다. 머리가 점점 어지러웠고 한시라도 빨리 깔끔한 곳을 찾아 누워 있고 싶었다. 결국 아무 말 없이 주현수의 손을 뿌리치려고 버둥거렸다. “병원에 데려다줄게.” 그리고 나를 끌고 가려는 순간 발걸음을 옮기자마자 눈앞이 캄캄해지면서 영혼이 빠져나간 듯 몸이 나른해졌다. 다시금 의식을 찾았을 때는 목이 타들어 가는 느낌이 들었고 움직이는 것조차 버거웠다. 곧이어 숟가락이 입가에 닿으면서 달콤한 액체가 천천히 흘러 들어왔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나서 억지로 눈을 뜨자 주현수의 모습에 떡하니 나타났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딱 떨어지는 슈트를 차려입고 병상 옆에 앉아 그릇을 들고 물을 먹여주었다. 깜짝 놀란 나머지 눈이 번쩍 떠졌고, 휴대폰 화면을 보니 꼬박 하루가 지났다. “온종일 잠만 자다니...” 이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잠에서 깨어난 나를 보더니 주현수는 그릇을 내려놓고 손목시계를 집어 들었다. “지난번에 두고 갔어요.” 나는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잃어버릴까 봐 챙겼는데 가져가세요.” 주현수는 시계를 살피더니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네가 망가뜨렸어?” “그럴 리가?” 병상에서 일어나 앉으려고 애를 썼지만 온몸이 나른해서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나한테서 돈 떼먹으려는 건 아니죠?” 이내 황당하다는 듯 피식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곧 죽게 생긴 사람을 강가에서 둘러업고 병원까지 데려다줬더니 눈을 뜨자마자 생명의 은인을 모함할 줄이야. 게다가 돈도 없을 텐데 굳이 떼먹을 필요가 뭐 있어?” 주현수의 눈빛은 마치 허무맹랑한 말에 기가 찬 듯싶었다. 나는 헛기침을 하며 재빨리 시선을 피했다. “뭐가 문제인데요?” 그는 아무 말 없이 시계를 건네주었다. 곧이어 멈춰 있는 초침을 발견했고 시곗바늘도 10시를 가리켰다. 때마침 10시쯤에 비를 맞았던 거로 기억했고, 당시 시계를 몸에 지니고 있었으니 물이 들어갔을 가능성이 컸다. 결국 나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시계가 한두 푼도 아닐 텐데 방수 기능도 없어요?” 주현수는 추궁하듯 입을 꾹 닫고 쳐다보기만 했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병원에 두고 올걸. 어차피 내가 잃어버린 것도 아닌데.” 나는 작은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서은아 씨.” 의사가 밖에서 걸어 들어오며 공손한 태도로 말했다. “컨디션 어때요?” 물론 주현수 때문에 예의를 갖췄다는 사실은 뻔했다. 이내 힘겹게 일어나 앉아 웃으면서 의사를 향해 말했다. “많이 좋아졌어요.” “이따가 검사해보고 이상 없으면 퇴원해도 될 것 같아요. 그리고 물 많이 마셔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의사가 난감한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그럼 병원비는...” 순간 당황한 나머지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동안 알바하면서 돈을 꽤 많이 모았지만 전부 강주호에게 바쳤기에 당장은 얼마 없었다. 만약 병원비를 결제하고 나면 오늘 밤은 거리로 나앉아야 할 판이다. 이따가 결제하겠다고 대답하려는 찰나 주현수가 손을 내밀었다. “저한테 주세요.” 또다시 신세를 지게 되다니. “고마워요. 대신 시계를 꼭 고쳐줄게요.” 나는 의사가 나가자마자 잽싸게 말했다. “그래.” 주현수는 물건을 주섬주섬 챙겼다. “서비스 센터 주소는 나중에 보내줄게. 난 일이 있어 이만.” 말이 끝나기 무섭게 병실 밖으로 모습을 감췄다. 주현수의 뒷모습을 바라보자 왠지 모르게 마음이 착잡했다. 어떻게 제일 초라해 보일 때마다 마주칠 수 있단 말이지?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이 안 갔다. 유일하게 수긍할 만한 가설은 서로 상극의 존재라는 것이다. 병원에서 나와 통장 잔액을 확인해 보니 일단 시계부터 수리하기로 마음먹었다. 어쨌거나 주현수에게 빚을 지고 싶지 않았기에 계속 알바할 생각이다. 서비스 센터는 이엘시 프리미엄 백화점 안에 있다. 현재 보유한 돈으로 과연 수리가 가능할지 몰라 입구에 서서 한숨을 내쉬었다. 주현수가 보낸 주소에 따라 엘리베이터를 타고 꼭대기 층에 도착했고, 백화점 내 모든 명품이 모여 있는 곳으로 평소에는 감히 얼씬거리지도 못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저 멀리 두 남녀가 보였다. 다름 아닌 강주호와 허가람이다. 허가람은 명품 매장에서 피팅하고 있었고, 강주호는 그녀의 가방을 들고 시종일관 미소를 지은 채 옆에서 지켜보며 가끔 조언을 건네주었다. 머릿속으로 문득 강주호와 사귈 때 어렵게 시간을 쪼개서 오후에 같이 쇼핑하러 가자고 졸랐던 순간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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