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장
통화는 빠르게 끊겼다. 고연화가 무슨 일인지 미처 물을 새도 없이 통화는 끊겨버렸다.
입을 옷이 없었던 고연화는 옷장을 열어보니 전부 그 이상한 아저씨의 옷들이었다.
고연화는 그 안에서 대충 허태윤의 티셔츠 하나를 꺼내 걸친 뒤 서둘러 집을 나섰다.
허태윤의 티셔츠는 그녀에게 충분 커 밑단이 무릎까지 닿는 덕에 오버사이즈 원피스로 입어도 이상해 보이진 않았다.
……
A 회사.
고연화가 입구에서 지문을 찍고 있는데 안에서 장아영이 달려 나와 그녀를 찾았다.
“연화 씨, 드디어 왔네요! 팀장님이 당장 사무실로 오래. 마음의 준비를 하는 게 좋을 거예요…”
“팀장님이 날 찾는다고요?”
보기 드물게 긴장한 장아영의 모습에 고연화가 물었다.
“도대체 무슨 일인데요?”
주변을 둘러보던 장아영은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고연화의 앞에서 작게 말했다.
“오늘 회사 내부의 모든 컴퓨터가 바이러스에 당해서 시스템이 전부 마비가 되는 바람에 회사의 중요한 내부 문서가 전부 사라졌어요…”
고연화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게 저랑 무슨 상관인데요? 컴퓨터가 고장 났으면 기술팀을 불러서 해결해야죠.”
장아영이 걱정스럽게 말했다.
“기술팀이 이미 수리 중이에요! 문제는 송미연이 팀장님에게 연화 씨가 회사 컴퓨터에 바이러스를 심어서 회사의 모든 컴퓨터가 바이러스에 감염이 됐다고 제보했어요. 게다가 오늘 대표님께서 엄청 중요한 거물을 모셔 와 회사의 새로운 프로젝트를 감찰하기로 했는데 저희 팀에서 고생고생해서 만든 프로젝트 설명 PPT도 지금은 꺼낼 수가 없는 상황이라 팀장님께서 엄청 화를 내고 계세요, 연화 씨에게 화풀이할지도 몰라요!”
송미연?
그 회사 낙하산?
고연화와 마찬가지로 아직 수습 기간인 사람이었다.
A 회사는 세계 500대 기업으로 매년마다 수많은 고학력자들이 어떻게든 들어오고 싶어 안달인 회사였다.
고연화는 우월한 성적과 대학교 교장의 친필 추천서로 이곳에서의 실습 기회를 얻었지만 소임연은… 팀장 친척이라는 소문이 있었다!
올해 회사 내부에서 정직원으로 발탁되는 인원은 딱 한 명뿐이었고, 송미연과 고연화 중에서 결정됐다.
고연화는 대충 어떻게 된 일인지 알 것 같았다.
……
고연화는 팀장 사무실의 문을 두드리기 전, 송미연이 사무실 안에서 팀장을 달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모부, 화내지 마세요. 컴퓨터는 꼭 고쳐질 거예요! 다 그 고연화 때문이에요, 출근 시간에 게임을 하고…”
진 팀장이 버럭 짜증을 냈다.
“그 망할 고연화는? 왜 아직도 안 와?”
고연화는 노크를 한 뒤 문을 열었다.
“팀장님, 부르셨습니까?”
진 팀장은 고연화를 보자마자 욕설을 퍼부었다.
“고연화, 무슨 낯짝으로 여기를 와? 출근날에 감히 이 시간에 출근을 해? 어제도 무단결근하더니, 이게 네 업무 태도야?”
안으로 들어간 고연화는 침착하게 설명했다.
“죄송합니다, 팀장님. 어제 결혼을 하느라 못 왔고 오늘 아침에는 문제가 생겨서 늦었습니다.”
진 팀장은 고연화의 핑계에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결혼? 네가 정말로 결혼을 하는 거였으면, 경조사 휴가 신청할 줄 모르는 거야? 회사가 네 집 안방인 줄 알아? 오기 싫으면 안 오고 늦고 싶으면 늦고, 게임하고 싶으면 게임하는 곳인 줄 알아?”
고연화는 몹시 공손한 태도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처음 결혼해 본 거라 경험이 없어서요. 다음에는 꼭 미리 신청하겠습니다.”
“…”
옆에 있는 송미연도 가만히 듣고 있을 수가 없었다.
“고연화 씨, 정말 뻔뻔하시네요. 무단결근한 거면 한 거지 결혼 같은 핑계를 어떻게 그렇게 쉽게 나와요? 거짓말을 해도 좀 제대로 하든가요!”
지금 이 순간, 사무실의 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A 회사의 대표 조공성은 범상치 않은 분위기의 한 남자가 함께 입구 쪽에 서 있다가 마친 진 팀장의 말에 대답한 고연화의 말을 듣게 됐다.
허태윤은 두 눈을 가늘게 떴다.
계속해서 고연화에게 욕설을 퍼부으려던 진 팀장은 입구에 있는 두 사람을 보고는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나 굽신대며 그들을 맞이했다.
“아이고, 조 대표님. 두 분 언제 오셨습니까? 이쪽으로 들어오세요…”
따라서 시선을 옮겼던 송미연은 조 대표 옆에 서 있는 잘생긴 남자를 발견하고는 순간 두 눈이 번쩍 뜨였다.
딱히 관심이 없었던 고연화는 흘깃 고개를 돌려 쳐다보다 그만 얼어붙었다!
이상한 아저씨였다.
왜 어딜 가나 저 아저씨가 있는 걸까!
A 회사의 대표 조공성은 엄숙한 얼굴로 물었다.
“부진아, 방금 전에 왜 그렇게 시끄러웠던 거야? 듣자 하니 회사 시스템이 전면 마비가 됐다던데, 어떻게 된 일이야?”
식은땀을 줄줄 흘리던 진 팀장은 고연화를 가리키며 말했다.
“… 조 대표님, 회사에 새로 온 인턴이 출근 시간에 게임을 하는 바람에 회사 시스템에 바이러스가 침입했습니다. 지금 회사 기술팀에서 급히 수리 중입니다…”
조공성이 버럭 화를 냈다.
“뭐라고? 이런 인턴을 뒀다가 뭐 하려고? 정직원으로 전환할 생각이야?”
진 팀장은 연신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조 대표님, 당장 해고하겠습니다!”
목적을 달성한 송미연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허태윤의 온기 하나 없는 눈빛으로 고연화를 슥 쳐다봤다. 그의 시선이 특별히 더 고연화에게 머물러 있지는 않았다.
마치 모르는 사이인 것처럼 허태윤이 입을 열었다.
“조 대표님, 보아하니 제가 올 타이밍이 아니었나 보군요. 이렇게 된 거, 다음에 다시 오도록 하죠.”
“허 대표님, 정말 죄송합니다. 못난 꼴을 보였군요…”
조공성은 한껏 미안한 얼굴을 했다. 이 어마어마한 거물을 데리고 오기 위해 얼마나 큰 공을 들였는지는 아무도 모를 것이다. 만약 오늘 이대로 간다면 다음에 다시 데려오려거든 훨씬 힘들었다!
그때, 고연화는 사무실 입구에서 불안하게 안을 쳐다보는 장아영을 발견했다.
별안간, 이번 새로운 프로젝트는 장영이 처음으로 팀을 이끌고 만든 계획안이라는 게 떠올랐다. 만약 이대로 물거품으로 돌아가게 된다면 분명 앞으로 중임을 맡기 어려울 것이다.
수습 기간 동안, 장아영은 늘 그녀를 잘 챙겨줬었다.
“허 대표님!”
고연화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이미 등을 돌렸던 허태윤이 걸음을 멈췄다.
고연화가 그에게로 다가갔다.
“허 대표님의 시간은 귀중하시다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말이 있지 않습니까? 이왕 오기까지 했는데, 이대로 아무것도 안 하고 그냥 가버렸다가 정말 좋은 프로젝트를 놓치게 된다면 그거야말로 진정한 시간 낭비가 아닐까요!”
허태윤은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
“지금 딱히 보여줄 수 있을 만한 게 없는 걸로 아는데요?”
고연화가 장담하며 말했다.
“커피 한 잔의 시간을 주시면 반드시 새 프로젝트의 계획안 PPT를 허 대표님 앞에서 보여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조공성과 진 팀장은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고연화를 쳐다봤다. 그런 고연화를 송미연은 업신여기듯 눈을 흘겼다. 전문 기술팀도 골머리를 앓고 있는데 고연화가 고칠 수 있다니?
허세도 저런 허세가 없었다!
발버둥을 치며 그걸로라도 속죄하려는 건가?
잠시 침묵하던 허태윤의 무표정한 얼굴에 흥미가 생겼다.
“젊은 사람이 도전 정신이 뛰어나군요. 조 대표님, 이왕 온 김에 목도 마른데, 커피 한잔 얻어 마시고 가도 되겠죠?”
곧바로 정신을 차린 조공성이 얼른 지시했다.
“뭘 멍하니 있어? 가서 허 대표 커피 내와!”
“네!”
송미연은 허태윤과 접촉할 수 있는 기회를 잡기 위해 씰룩대며 커피를 타러 갔다.
자신의 자리로 돌아온 고연화는 USB 하나를 컴퓨터에 꽂았다.
장아영이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다가왔다.
“연화 씨, 뭐 하는 거예요? 진짜로 컴퓨터 고칠 줄 알아요?”
고연화는 잔뜩 집중한 얼굴로 마우스를 움직이며 대답했다.
“백신 프로그램 설치 중에요!”
그 대답에 장아영은 기운이 빠진 듯 한숨을 쉬었다.
“그… 연화 씨, 소용없어요! 기술팀 직원이 그러는데 이번에는 해커가 무언가 목적을 가지고 공격한 거라 백신 프로그램으로는 소용이 없대요!”
고연화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장아영에게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시도 한번 해보죠. 혹시 성공할지도 모르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