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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장

고연화는 눈을 휘둥그레 뜬 채 자기 위에서 한 손으로 팔굽혀펴기하는 남자를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그녀의 입은 허태윤의 또 다른 굵직한 손에 막힌 상태였다. 그는 방금 이불을 잡아당겨 두 사람의 머리만 밖으로 드러낸 채 몸을 아예 가려 버렸다. ‘서로를 마주 본 채 가까워졌다 멀어졌다 하는 것이 마치....’ 고연화는 마음이 살짝 술렁였다. 이런 뭔가를 떠올리게 하는 동작을 보게 된 그녀는 더는 참을 수 없어 남자의 큰 손을 힘껏 밀쳐냈다. "아저씨, 지금…." 허태윤이 마침 팔굽혀펴기의 '팔굽히기' 자세라, 그녀의 귓가에 대고 속삭이며 경고했다. "프라이드를 가지고 석 달 동안 열심히 임무를 완수하겠다고 하지 않았어요? 지금 이것도 그쪽이 협조해야 할 일이니 함부로 움직이지 마세요!" 고연화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잠시 뒤 그녀는 방 문 앞의 기척을 예민하게 눈치챘다. 허 여사가 문을 살짝 열고 그 틈새로 몰래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 거였구나!’ 문득 깨달은 고연화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제가 아저씨 동작에 맞춰 소리라도 지를까요?” 허태윤이 잠시 멈칫하더니 차가운 눈동자를 가늘게 뜨고 물었다. "할 줄은 알아요?" 고연화가 단호한 눈빛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허태윤의 눈가에 놀리는 듯한 기색이 물들었다. "한 번 해볼까요?" 고연화가 숨을 크게 들이쉬고는 연기하기 시작했다. "여보, 화이팅! 고! 고! 화이팅! 화이팅, 화이팅! 하나, 둘, 셋, 넷! 둘, 둘, 셋, 넷! 셋, 둘...." 허태윤의 눈가에 서렸던 장난스런 기색이 싹 사라졌고, 이마에는 실핏줄이 툭 튀어나왔다. 그는 또다시 그녀의 입을 꾹 틀어막았다. 고연화는 눈살을 찌푸렸다. "음음음...." 입이 꽉 틀어막혀 미처 내뱉지 못한 이런 억눌린 목소리가 오히려 더욱 상상을 불러일으켰다. 방 문 틈이 서서히 좁혀지더니 마침내 닫혔다. 허 여사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몸을 돌려 자리를 떠났다. 고연화가 또다시 남자의 손을 밀쳐내고는 기분 나쁘다는 듯이 말했다. "아저씨네 할머니가 이미 갔으니 일어나도 돼요, 아저씨!" 허태윤은 이불을 걷어 올리고 벌떡 일어나 방금 벗은 셔츠를 주워 들고 다시 껴입었다. 고연화는 일어나 앉아 침대 머리에 기댄 채 건들건들 휘파람을 불어댔다. "아저씨는 나이도 많으면서 복근 여덟 쪽을 유지할 수 있다니, 자기 관리가 매우 철저하네요!" 허태윤의 몸이 흠칫 굳었다. ‘나이가 많다고? 저 여자는 도대체 내 나이가 몇 살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계속 쳐다보면 내 몸을 탐내는 거라고 생각할 거예요." 고연화는 침을 삼키고 입을 닦아내며 말했다. "단순히 아저씨 복근이 탐나는 것뿐이에요. 다른 부위는 제 스타일이 아니에요!" "그래요?" 허태윤이 침대 머리맡으로 다가가 손을 뻗어 고연화의 턱을 잡고 물었다. "어떤 스타일을 좋아하는데요?" 고연화는 어쩔 수 없이 고개가 들린 채였다. "멍뭉미 타입이요. 귀엽고 말 잘 들으면서도 저를 누나라고 불러주는 사람이요!" 허태윤은 하찮다는 듯 피식 웃었다. "그런 자도 남자라고요?" 고연화가 칫 소리를 내며 물었다. "그럼 아저씨는 어떤 타입을 좋아하는데요?" 허태윤은 대답하지 않았다. 고연화가 눈썹을 꼼틀대며 물었다. "제가 맞혀 볼게요. 아저씨는 섹시한 타입을 좋아하죠?" 허태윤은 그녀를 흘겨보며 몸을 살짝 숙였다. "아무튼 침대 위에서 파이팅을 외쳐대는 그쪽 같은 타입은 아니에요!" 그는 말을 마치자마자 싸늘하게 그녀의 턱을 놓아주고는 몸을 돌려 욕실로 들어갔다. 고연화는 입을 삐죽거렸다. ‘오늘 허 여사가 집에 있으니 아저씨는 틀림없이 방에서 잘 거야.’ 비록 허태윤이 그녀에게 관심 없다는 것을 알지만, 그와 함께 한 방에서 밤을 보내는 것은 여전히 불편하게 느껴졌다. 허태윤이 욕실에서 나왔을 때 고연화는 이미 침대머리에 기댄 채 잠이 들었다. 그녀의 손에는 절반쯤 하다만 게임 화면이 켜진 휴대폰이 들려있었다. ‘저도 아직 젖살이 빠지지 않은 애송이 주제에 제 분수도 모르고 멍뭉미 타입을 찾는다고?’ 허태윤이 눈을 가늘게 뜬 채 다가가 그녀의 휴대폰을 집더니 화면을 잠그고는 침대 머리맡에 던져두었다. 그녀에게 별 신경 쓰고 싶지 않았던 그는 오늘 제 잘못으로 그녀를 다치게 한 일이 떠올라 이불을 잡아당겨 덮어 주었다. 그런 뒤, 허태윤은 몸을 돌려 소파로 향했다. **** 고연화가 이튿날 깨어나 보니 허태윤은 방에 없었다. 그녀는 일자리도 잘려 일찍 출근하지 않아도 되는지라 나른하게 침대 머리맡에 기댄 채 휴대폰 뒤적이고 있었다. 문득 카카오톡 친구인 [윤호철] 이 긴급 소식을 보내왔다. [보스, 화가 청하의 작품을 발견했습니다! 위치 (등봉 경매장), 빨리 오세요!] 고연화는 어두워진 표정으로 곧바로 침대에서 내려와 나갈 준비를 했다. 고연화는 아래층으로 내려와 외출하려던 차에 방금 주방에서 나오던 허 여사와 마주쳤다. 고연화는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할머님, 일찍 일어나셨네요." 허 여사는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애도 참, 그냥 할머니라고 불러." 그녀를 대하는 노부인의 태도가 어제와는 다른 것 같았다. 고연화가 그 말대로 바로 호칭을 바꾸었다. "할머니." "그래. 그렇게 불러야 친해 보이지!" 허 여사는 그제야 웃으며 그녀를 이끌고 자리에 앉았다. "자, 이 할미가 너를 위해 끊인 아침 식사다!" 그 모습을 본 허씨 가문 도우미들 모두가 깜짝 놀랐다. ’여사님이 설마 갓 시집온 작은 마님을 위해 직접 음식을 만들다니, 그야말로 천지개벽할 노릇이구나!’ 고연화는 시간이 급했지만 어르신의 마음을 거절하기 어려워 죽을 먹을 수밖에 없었다. "고마워요, 할머니. 참 맛있어요." 허 여사는 싱글벙글 웃으며 그녀가 먹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입맛에 맞으면 많이 먹어!" 죽에는 임신에 좋은 보양식이 많이 들어있었다. 허 여사는 증손이 빨리 생기길 바랐다. 이때 허윤진이 하품을 하며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할머니, 일어나셨네요!" 허 여사의 표정이 문득 엄해졌다. "윤진아, 마침 잘 왔어. 와서 네 올케에게 사과해라!" 허윤진이 깜짝 놀라서 허 여사를 바라보았다. "할머니? 지금… 저더러 사과하라고요? 저 여자가 저를 괴롭혔다고요!" 허 여사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허윤진! 이 집에는 네 시중을 드는 도우미뿐만 아니라 오래된 다른 도우미들도 있단다! 내가 이미 알아봤는데, 분명 네가 먼저 연화에게 더러운 물을 뿌려 연화가 반격했던 거더구나.” 고연화는 얌전히 죽을 먹으면서 고개를 들어 찔리는 구석이 있어 기가 죽은 허윤진을 바라보았다. 허 여사는 이미 허윤진을 고연화 앞으로 끌고 왔다. "내가 너에게 실망하지 않게 빨리 사과해!" 허윤진은 마음속으로는 불만스러웠지만 감히 할머니의 말을 거역하지는 못했다. "미… 미안해….” "응, 괜찮아." 고연화는 살짝 웃으며 이미 비운 죽그릇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할머니, 저는 볼일이 있어 먼저 가볼게요." 허 여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래. 조심해서 다녀와." 고연화가 나간 뒤 허윤진은 분한 마음에 울음을 터뜨렸다. "할머니! 왜 제 편을 들지 않고 고연화 편을 드세요. 흑흑흑….” 허 여사가 엄하게 다그쳤다. "할미는 누가 옳으면 누구 편을 들 뿐이야! 그리고 저 애는 네 올케니 앞으로 함부로 이름 부르지 마!" 허윤진은 납득할 수 없었다. "하지만 오빠는 그녀를 좋아하지 않을 거예요. 오빠가 결혼하고 싶은 사람은 분명 강...." 허 여사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입 닥쳐라! 앞으로 강씨 성을 가진 그 여자를 다시는 언급도 하지 마라!" 허윤진은 할머니가 이렇게 화내는 모습을 거의 본 적이 없어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 등봉 경매장. 신양그룹 회장 윤호철은 고연화 곁에서 따라가며 상황을 보고했다. "보스, 청하의 작품 <가을 안행도>입니다! 한 외국 상인이 이곳에 가져와 경매에 올렸는데, 경매 시작 가가 십억 원이랍니다!" 청하는 고연화 친어머니의 필명이었다. 그동안 모두가 그녀의 어머니가 이미 세상을 떠났다고 말했지만, 그녀는 어머니의 사망 증명서를 찾지 못했다. 다른 단서 없이 어머니의 행방을 알아내려면 세계 각지에 널려 있는 어머니 작품에서부터 알아볼 수밖에 없었다. 고연화가 물었다. "호철아, 우리 장부에 대략 얼마나 있지?" 윤호철이 곧장 대답했다. "유동 자금은 백억 원 정도입니다. 나머지 돈은 모두 몇몇 공사비로 빠져있고요.” "충분해.” 고연화는 막 경매장에 들어가려다가 허태윤의 차가 들어오는 것을 보게 되었다. ‘저 아저씨는 웬일로 왔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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