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장
고연화의 얼굴빛이 점점 자줏빛으로 변해갔다.
숨을 고른 허 여사가 그제야 다급히 말렸다.
"태윤아… 그만… 그만 멈춰라…….”
그제야 손에서 힘을 푼 허태윤이 고연화를 한쪽으로 내팽개치고는 할머니에게 다가가 물었다.
"할머니, 괜찮아요?”
허 여사는 힘없이 손을 저었다.
"괜찮아…. 조금 전... 내 목에 대추 씨 하나가 걸렸는데, 저 애가 하임리히법으로 나를 구했다. 바닥에 있는 저 대추 씨가... 바로 방금 뱉어낸 거야.”
흠칫 놀란 허태윤이 눈길을 돌려 바닥 위의 작은 대추 씨를 힐끗 쳐다보고는 또다시 고개를 돌려 고연화를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의 손에 의해 사정없이 바닥에 내팽개쳐진 고연화는 스스로 바닥에서 일어나 아픈 팔을 문질렀다.
그러고는 허 여사에게 다가가 설명했다.
"할머님, 저 과자는 제가 아침 대신 먹으려 구운 거예요. 저는 대추 씨째로 구워서 나는 약간의 쓴 향기를 좋아하기에 대추 씨를 제거하지 않았지만, 노인들이 드시기에는 안 좋아요. 할머님이 고초를 겪게 해서 매우 죄송해요."
그녀는 진심을 담아 허리를 굽혀 절하고는 다시 일어서서 허태윤을 바라보았다.
"아저씨… 크흠, 태윤씨, 아무래도 의사를 불러 할머님 상태를 살펴보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그녀는 말을 마치자마자 몸을 돌려 위층으로 올라가 방으로 돌아갔다.
허태윤은 고연화의 꼿꼿하고도 가냘픈 뒷모습을 지켜보며 마음이 복잡했다.
****
고초를 겪은 허 여사는 부축받아 방으로 들어가자마자 곧장 잠들었다.
오후에 가정전문의가 와서 허 여사의 몸 상태를 살피고 혈압을 재봤는데 큰 문제가 없다고 했다.
가정전문의가 나가자 이미 정신을 차린 허 여사가 입을 열었다.
"윤진아, 할미가 네 오빠랑 할 말이 있으니 너는 먼저 나가보거라.”
허윤진은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싶어 조금 내키지 않았지만, 허태윤이 엄한 눈빛으로 쳐다보자 순순히 나갔다.
방에 두 사람 외에 아무도 없게 되자 허태윤이 침대 옆으로 다가갔다.
"할머니, 또 어디가 불편하세요?"
키 크고 잘생긴 큰손자를 바라보던 허 여사가 푸근하게 웃으며 말했다.
"태윤아, 할미는 괜찮으니 걱정하지 말거라.”
"잘됐네요."
허 여사가 물었다.
"태윤아, 너랑 고연화씨는 어떻게 만난 거야?"
"우연이요."
허 여사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참 괜찮은 사람인 것 같더구나. 아주 마음에 들어."
허태윤의 눈빛에 놀란 기색이 살짝 비쳤다.
그가 눈을 가늘게 뜬 채 물었다.
"그녀가 방금 할머니를 구해줬기 때문에요?"
‘내가 돌아오기 전까지만 해도 할머니가 그녀에게 벌을 준 것으로 아는데 이젠 마음에 든다고?’
허 여사의 눈가에 기쁜 기색이 비쳤다.
"그 애는 어떤 일이 일어나도 당황하지 않았고, 나를 상대하면서도 기죽지 않고 침착했다. 너에게 오해를 받으면서도 울거나 원망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차분하게 다가와 나에게 설명하고 사과까지 했다. 아주 사리 밝고 사람이 괜찮구나."
‘하긴.’
허태윤은 자신이 홧김에 하마터면 그녀의 목을 부러뜨릴 뻔했다는 생각에 침묵했다.
"태윤아, 아직 그 애와 잠자리를 안 가졌지?"
뜻밖의 화제에 허태윤의 얼굴색이 굳어졌다.
허 여사가 놀리듯 말했다.
"서른이 다 된 나이에 뭐가 부끄럽다고.”
"태윤아, 네가 이번에 서둘러 결혼한 것이 고집불통인 네 할아버지 때문이라는 것을 알아. 그러나 할미는 네가 고른 색시가 마음에 드는구나. 결혼은 장난이 아니니 앞으로 너희 둘이 잘 살아보거라!"
허태윤은 할머니에게 뭐라고 변명하지 않았다.
허 여사가 또다시 말을 이었다.
"너희 결혼식 날, 할미가 네 할아버지 수술 때문에 외국에 있던 터라 참석하지 못했구나. 오늘 할미가 너희 부부의 견증인이 돼주는 것으로 대신 하마. 네 할아버지가 건강을 회복하고 돌아오면 손자를 안아 볼 수 있게 조금 뒤 아예 첫날밤을 치러라!"
허태윤은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할머니, 제 생각에 그런 일은…."
허 여사가 눈살을 찌푸렸다.
"네가 할미 말을 듣지 않으면 네 할아버지에게 네가 가짜 결혼을 해 네 할아버지를 속였다고 다 말하겠어! 네 할아버지 성질은 네가 잘 알지? 비록 이식 수술을 받았대도 화병이 나 또다시 쓰러질 거다!"
허태윤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할머니, 조금 뒤 저녁을 들여오라고 할게요. 먹고 푹 쉬세요."
허태윤은 이 말을 마치고는 몸을 돌려 자리를 떴다.
허 여사는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
"내가 이따가 살펴보러 갈 테니 할미를 실망시키지 마라!"
****
허태윤이 방으로 돌아와 보니 고연화가 책상 앞에 혼자 앉아 무언가 적느라 그가 들어와도 고개 한 번 들지 않았다.
그는 그녀의 뒤로 다가가 그녀가 적고 있는 것을 내려다보았다.
"숙제하는 중이에요?"
고연화는 열심히 적으며 불만을 토로했다.
"아저씨 가문의 규칙을 베껴 쓰는 중이에요! 지금이 어느 시댄데 아저씨 집안에는 아직도 문자화된 가문의 규칙이 있어요? 쯧쯧쯧, 구시대적 관습이야...."
허태윤은 손을 뻗어 그녀의 펜을 뽑아냈다.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을 테니 베껴 쓸 필요 없어요.”
고연화는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그럼 저는 씻고 잘게요!"
조금 전 목 졸려 죽을 뻔한 경험을 한 고연화는 자신과 허태윤 사이의 힘 차이를 더욱 확실히 느꼈다.
‘이 남자는 개미 한 마리를 죽이는 것처럼 손쉽게 나를 죽일 수 있어.’
그녀는 그가 두렵지는 않았으나, 안 좋은 자신의 처지를 더 어렵게 만들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앞으로 석 달 동안 허씨 가문에서 얌전히 지내야지. 적을 만들지 말고 될수록 이 남자와의 접촉을 피하면서 시간이 되면 짐을 싸서 떠나야지’.
자리에서 일어난 고연화가 가능한 한 허태윤과 거리를 벌리며 그를 에돌아 지나가려던 차에 팔이 덥석 붙잡혔다.
"아!"
그녀는 너무 아파 눈살을 찌푸렸다.
"뭐예요?"
허태윤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흘겨보았다.
"아픈 줄은 알아요?”
그의 큰 손이 마침 그녀의 팔에 난 상처를 건드렸다.
아까 허태윤에게 내팽개쳐졌을 때 그녀의 팔뚝이 탁자 모서리에 부딪혀 다쳤었다.
‘가능한 한 더 이상의 충돌은 피하고 싶었는데, 이 남자가 자꾸 빌미를 제공한단 말이야!’
고연화가 불쾌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저씨 때문에 다친 거예요!"
허태윤이 흠칫 놀라더니 붙잡은 손을 풀고 나지막하게 말했다.
"아래층에 내려가 가정전문의에게 상처를 치료받아요.”
"됐어요. 피부가 좀 벗겨졌을 뿐, 별일 아니에요!"
치료받고 싶은 마음이 없던 고연화는 그의 손을 뿌리치고 곧장 욕실로 들어가 샤워했다.
샤워를 마치고 나온 그녀는 이미 잠옷으로 갈아입고 잠자리에 들 준비를 했다.
"이리 와봐요!"
문득 남자의 목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
고연화가 쳐다보니 허태윤이 고양이처럼 나른하게 일 인용 소파에 기대어 있었다.
그녀는 다가가고 싶지 않았다.
"왜요?"
남자가 깎아지른 듯한 턱선을 뽐내며 턱으로 테이블 위의 약상자를 가리켰다.
"약 바르게요."
고연화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호의는 고맙지만 됐어요!"
허태윤이 눈을 가늘게 뜨고 뚫어지게 쳐다보며 말했다.
"당신이 올래요, 내가 갈까요?”
고연화는 너무 귀찮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저 남자가 침대 쪽으로 오는 것을 원치 않았다.
하여 눈 딱 감고 자리에서 일어나 남자 쪽으로 다가가 다친 팔을 그에게 내밀었다.
"발라요! 빨리!"
약상자는 도우미가 조금 전 가져다 놓은 것이었다.
허태윤의 말뜻은 그녀 스스로 상처를 치료하라는 것이었는데 그녀는 아마 그의 말뜻을 오해한 것 같았다.
그가 치료해 주겠다는 식으로 말이다.
‘나는 여태껏 한 번도 누구 시중을 들어준 적이 없다고. 앞으로도 없을 테고.’
그는 약상자를 열고 약을 꺼내 면봉에 약을 묻혀 그녀의 상처에 조심스럽게 발라주었다.
고연화는 사실 고의로 그에게 팔을 건넸다.
화풀이하기 위해서 말이다.
설마 이 남자가 직접 약을 발라줄 줄은 생각지도 못했기에 눈썹을 꼼틀대며 물었다.
"아저씨, 미안한 마음에 이러는 거예요?"
허태윤은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
"오늘은 내 잘못으로 그쪽을 다치게 했으니 당연히 책임져야죠. 그리고 우리 할머니도 너무 원망할 것 없어요. 여기 오래 머물지 않을 테니."
고연화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왜 원망하죠? 아저씨 할머니가 나쁜 사람도 아니잖아요!"
허태윤이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할머니가 가문의 규칙 베껴 쓰기 벌을 내렸는데도 나쁘지 않다고요?"
고연화가 입을 삐죽거리며 말했다.
"나쁜 사람이 가문의 규칙 베껴 쓰기 처벌만 내린다고요? 좋은 사람이니까 생각해낼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처벌이겠죠? 제가 예전에 만났던 나쁜 사람들은 모두…."
그녀는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허태윤이 가라앉은 눈빛으로 물었다.
"모두 어떤데요?"
‘말 실수했네.’
고연화는 친하지 않은 사람과 자신의 인생 경험을 공유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약 다 발랐죠? 그럼 저는 이만 자러 갈게요!"
약을 다 발랐는데도 허태윤은 그녀의 팔을 놓아주지 않았다.
고연화는 허태윤이 아직 우려되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해 다짐하듯 말했다.
"아저씨,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석 달 동안 아저씨에게 협조하겠다고 약속했으니 프라이드를 가지고 열심히 일해서 임무를 완수할게요. 아저씨의 여동생은 비록 매우 얄밉지만, 아저씨의 할머니는 단지 자세한 상황을 알지 못한 채 손녀를 보호하려는 마음이 간절했을 뿐이라 이해할 수 있어요. 그러니 할머님을 탓할 마음은 없어요.”
허태윤이 그윽한 눈빛으로 고연화를 바라봤다.
‘막무가내인 줄 알았더니 그래도 사리 밝은 편이네. 생긴 것도 귀엽고.’
고연화의 속눈썹은 길고도 짙었으며 위로 살짝 말려 올라갔다.
조그마한 얼굴은 앳된 티를 벗지 못해 아직 젖살이 남아있었으며 양쪽 볼에는 보조개가 폭 패여 있어 표정이 변할 때마다 생기가 흘러넘쳤다.
허태윤이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난 탓에 고연화는 깜짝 놀랐다.
"아저씨?"
남자의 긴 팔이 그녀의 허리 아래로 파고들어 예고도 없이 그녀를 번쩍 들어 안았다.
고연화는 혼이 쏙 빠진 표정이었다.
"아저씨, 또 뭐 하려는 거예요?"
그녀는 말을 마치자마자 침대 위로 훌쩍 던져졌다.
허태윤은 외투를 벗고 넥타이를 풀고 나서 셔츠 단추를 풀었다.
그 야성미 넘치는 동작이 매우 공격적으로 느껴졌다.
고연화가 막 일어나 도망치려던 차에 또다시 남자의 큰 손에 눌려 자리에 눕혀졌다.
그녀는 난생 처음으로 이렇게 가까이에서 남자의 목젖과 가슴 근육을 보게 되었다.
꽤 매력적이었다.
"아저씨, 신중하게 행동해요! 정신 차리세요. 저는 아저씨가 좋아하는 타입이 아니잖아요!"
허태윤은 두 팔로 고연화의 머리 양쪽을 짚고 버틴 채, 굶주린 늑대 같은 눈빛으로 그녀를 지극히 내려다봤다.
"내가 오늘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한 번쯤 함부로 굴고 싶다면요?"
남자의 건장한 신체가 어쩔 겨를 없이 덮쳐오자 고연화가 막 소리를 지르려는데 그만 입이 막혀 버렸다.
"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