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화
승원 대군이 겁먹은 얼굴로 말했다.
“아니... 됐다...”
형제들 중에서 전승군의 전투력과 무공이 가장 뛰어났고 수단이 가장 잔혹했다.
누구든 그에게 찍히기만 하면 결국 두들겨 맞았고 얼굴을 못 알아볼 정도로 망가뜨리기 전까지는 절대 포기하지 않았다.
승원 대군은 냅다 삼십육계 줄행랑을 쳤다.
“이리 오세요.”
전승군은 그의 멱살을 잡고 끌어당겼다.
“형님, 형님 살려주세요.”
혼비백산한 승원 대군이 애원하는데도 태자는 천천히 차를 마시면서 다정하게 말했다.
“나도 방법 없다. 죽기를 기다려, 그냥.”
이번에는 승명 대군에게 부탁했다.
“다섯째야, 나 좀 살려줘.”
승명 대군은 못 들은 척하면서 고개를 숙여 차를 마셨다.
‘저도 셋째 형님의 상대가 아닙니다. 알아서 살아남으십시오...’
“제발요. 형님, 살려주세요. 얼굴만은 때리지 말아요. 시키는 거 뭐든지 다 할 테니까 제발 살려줘요, 형님.”
전승군이 주먹으로 얼굴을 때리려 하자 놀란 나머지 아무 말이나 내뱉었다.
태자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방금 네 입으로 시키는 거 뭐든지 다 하겠다고 했다?”
전승군도 손을 멈추고 경멸스러운 눈빛으로 겁에 질린 승원 대군을 보고는 의자에 던져버렸다.
일련의 동작이 물 흐르듯 자연스러워 승원 대군은 멍하니 넋을 놓았다.
이 상황에서도 형제들에게 놀아났다는 걸 모른다면 그동안 황자로 헛되이 산 거나 마찬가지였다.
“최근에 남원군 댁의 둘째 딸 신옥혜와 가깝게 지낸다고 들었다. 오늘 대감 어르신의 생신을 축하하러 가는 김에 아바마마를 대신해 살펴봐야겠다. 괜찮은 사람이면 너희에게 혼인을 내리도록 아바마마께 아뢰겠다.”
태자는 웃으면서 진짜 목적을 말했다.
‘이건 강제 혼인이잖아.’
승원 대군이 분노를 억누르며 말했다.
“저는 동의...”
동의하지 않는다고 말하려던 찰나 태자가 말을 가로챘다.
“혼인하거나 셋째와 한판 붙거나 알아서 선택해.”
풀이하자면 아내를 맞이하거나 얼굴이 엉망이 되도록 맞거나 둘 중 하나 선택하라는 뜻이었다.
승원 대군은 말을 잇지 못했다.
‘오늘 아예 밖에 나오질 말았어야 했어.’
남원군 저택은 경성의 북쪽에 위치해 있었고 기다린 길 양쪽에는 고관대작들의 저택이 웅장하게 늘어서 있었다.
북진국 경성에서 세력이 있는 자들은 남쪽과 북쪽에서 살았다.
남쪽은 대군 저택이 즐비했고 북쪽은 권문세가와 조정의 대신들이 모여 살았다. 조금이라도 신분이 낮으면 남쪽과 북쪽의 문턱조차 넘을 수 없었고 동쪽에서 평민들과 함께 살아야 했다.
오늘 북쪽 대로에 붉은 융단이 깔려 있었고 요란한 꽹과리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남원군 부친의 회갑연에 황제가 직접 안부를 묻고 태자와 황자를 보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조정의 대신들은 항상 소식에 예민했다. 마음속으로는 날이 갈수록 몰락하는 남원군 저택을 깔보면서도 선물 가득 들고 웃는 얼굴로 축하하러 왔다.
남원군 저택의 문 앞에 마차와 말이 끊임없이 드나들었다. 손님을 맞이하는 청지기들은 얼굴에 경련이 일어날 정도로 웃었지만 그래도 감히 게을리하지 못했다.
저택의 대청에 귀한 손님들이 가득 모였다.
남원군 부친이 화려한 옷을 입고 지팡이를 짚은 채 웃는 얼굴로 가운데 자리에 앉아 있었다.
수많은 손님들이 다가와 인사하면서 선물을 바쳤다. 온갖 아첨과 칭찬에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그나저나 남원군 나리는 왜 안 보이시는 겁니까?”
누군가 웃으며 묻던 그때 대청 밖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남원군께서 마님과 아씨들을 데리고 인사드리러 오셨습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얼굴에 붉은 윤기가 감도는 남원군이 아름다운 소실 홍씨, 그리고 예쁜 딸 셋을 데리고 들어왔다.
그 모습에 사람들이 몰래 웃었다.
남원군 저택은 음기가 강하고 양기가 약하기로 소문이 자자했다. 대체 무슨 저주에 걸리기라도 했는지 남원군은 첩이 많은데도 자식이라곤 딸뿐이었다.
그에게는 딸만 일곱이었다. 셋째 딸 신경혜만 정실부인이 낳은 딸이었고 나머지는 모두 서녀였다. 칠공주나 낳았는데도 아들 하나 없었다.
현재 맏딸은 이미 시집가서 아이를 낳았고 막내딸은 아직 10살도 되지 않았다.
함께 축하하러 온 이들은 둘째, 넷째, 다섯째 딸이었는데 나이도 비슷했고 혼담을 오가야 할 나이였다.
원래는 사내가 나서야 했지만 남원군 댁에 아들이 없어 어쩔 수 없이 딸들을 내세운 것이었다.
“아버지, 만수무강하십시오.”
남원군이 방석에 무릎을 꿇고 아버지에게 절을 올렸다.
“아버님의 장수와 건강을 기원합니다.”
소실 홍씨도 딸들과 함께 절을 올렸다.
남원군 부친의 입이 귀에 걸릴 지경이었다.
“너희들의 효심을 아니 어서 일어나거라.”
일가족이 부축을 받으며 일어섰다.
남원군 부친이 손녀들에게 물었다.
“셋째는 어디 갔어? 사람을 보내 데려오라고 했는데 왜 아직도 도착하지 않은 거야?”
신경혜는 유일한 적녀였고 진무군 댁과 혼약이 있었다. 비록 어릴 때부터 팔자가 좋지 않아 저택에서 키우지 못했지만 혼약을 생각해 그래도 비교적 중시하고 있었다. 하여 회갑연 전에 남원군에게 특별히 시골에 가서 데려오라고 당부했다.
남원군 부친이 언급하지 않았더라면 친아버지인 남원군마저도 10여 년 전에 버린 적녀가 있다는 사실을 잊었을 것이다.
소실 홍씨의 얼굴이 굳어지더니 남원군을 살짝 꼬집었다. 그러자 남원군이 재빨리 설명했다.
“아버지, 보름 전에 이미 사람을 보내 데려오라고 했습니다. 길에서 시간이 지체되어 아직 경성에 도착하지 못한 듯합니다.”
“그렇게 오래 걸렸다고?”
남원군 부친이 얼굴을 찌푸리며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소실 홍씨가 덧붙여 말했다.
“아버님께서 이해해주십시오. 경혜는 어릴 때부터 시골에서 자라 성격이 거칠고 우리 집안 사람들과 정도 없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데리러 가서 본인도 싫었을 것입니다. 제가 아랫것들에게서 들었는데 경혜가 시골에서 자유롭게 사는 데 적응되어 저택으로 돌아오기 싫어한다고 하더군요. 오는 길에 몰래 도망쳐서 찾느라 시간이 한참 걸렸다고 들었습니다...”
남원군 부친의 얼굴이 점점 어두워졌다.
“그게 정말이야? 괘씸한 것 같으니라고.”
‘팔자가 좋지 않아 시골에 보냈으면 집에 얌전히 있기나 할 것이지. 사람을 보내 데리러 갔는데도 도망을 쳐? 시골에서 자라 왈가닥이 다 됐구나.’
둘째 딸 신옥혜가 웃으면서 말했다.
“할아버지, 화내지 마세요. 경혜가 말을 듣지 않으면 데려와서 잘 가르치면 됩니다.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전 항상 할아버지를 존경해왔습니다. 생신을 기쁘게 보내시고 만수무강하세요.”
듣기 좋은 말에 애교까지 더해지니 남원군 부친은 입이 귀에 걸렸다.
“우리 신씨 가문의 여식은 이래야지.”
남원군 부친이 이어 말했다.
“경혜가 돌아오면 좀 신경 써서 잘 가르치도록 해. 시골 왈가닥의 나쁜 버릇을 집으로 가져와 다른 자매들을 망치지 않도록.”
“알겠습니다.”
남원군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소실 홍씨는 웃으며 대답하면서 속으로는 무척이나 의기양양해 했다.
‘신경혜 그년 이젠 뼈도 못 추릴 정도로 죽었겠지? 가르치라고? 저승에 가서 단명한 네 어미에게 가르쳐달라고 해.’
“큰일 났습니다, 대감 어르신.”
그때 머슴이 허둥지둥 뛰어 들어오자 남원군의 표정이 급변했다.
“왜 이리 호들갑을 떠는 것이냐?”
“셋... 셋째 아씨가... 시신을 끌고 왔습니다.”
머슴이 바닥에 털썩 주저앉으며 소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