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bfic
더 많은 컨텐츠를 읽으려면 웹픽 앱을 여세요.

제9장

출국 날짜가 이틀밖에 남지 않은 상황에서 온서빈은 심유정은 물론 심유정의 모든 친구의 연락처를 삭제하고 차단했다. 어차피 심유정이 좋아하는 사람은 그가 아니었고 친구들이 인정하는 상대도 송성진이었기 때문에 그가 출국하면 이 모든 사람과 더 이상 연락할 필요가 없었다. 친구들을 삭제한 후 심유정을 위해 들어갔던 단톡방에서도 모두 탈퇴했다. 그녀와 관련된 모든 것을 정리한 온서빈은 바삐 짐을 싸기 시작했다. 5년 동안 이곳에서 살았기에 짐을 싸는 데 제법 힘이 들었다. 다행히 심유정은 아침 일찍 로펌에 새 사건이 들어왔다며 서둘러 문을 나섰고 덕분에 짐을 꾸릴 시간이 생겼다. 여행 가방을 문 앞에 놓고 모든 준비를 마치자 심유정도 마침 문을 열고 들어왔다. 들어오자마자 문 앞에 쌓여 있는 여행 가방을 본 그녀는 불길한 예감이 치밀어 올라 그에게 물었다. “어떻게 된 거야?” 온서빈은 심유정이 일찍 돌아온 것에 다소 의아했지만 여행 가방을 보면서 태연하게 아무 이유나 둘러댔다. “오래된 물건이 많아서 바꾸려고. 다 버릴 거야.” 그녀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흘깃 쳐다보다가 이내 다시 시선을 돌렸다. 다른 일 때문에 이 시간에 돌아온 심유정은 말하자니 다시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말투엔 다소 걱정하는 기색이 숨겨져 있었다. “왜 날 삭제했어?” 그녀의 연락처를 지웠다는 사실을 이렇게 빨리 알 줄은 몰랐던 온서빈은 휴대폰을 꺼내 계정에 로그인하며 놀란 척 대꾸했다. “엇, 내 계정이 왜 로그아웃됐지?” 심유정이 보는 앞에서 다시 로그인한 그는 다소 미안한 표정으로 심유정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것 때문에 친구가 다 지워졌나 보네. 내 계정이 해킹당했어.” 티가 나는 연기 때문인지, 아니면 그의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건지 심유정은 온서빈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러면 지금 내가 보는 앞에서 다시 날 추가해.” 그녀는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고 그의 앞에 서 있었다. 온서빈은 어쩔 수 없이 휴대폰을 들어 그녀가 내민 QR코드에 갖다 댔고 미처 스캔하기도 전에 심유정의 휴대폰이 울렸다. 화면에 ‘성진’이라는 이름이 뜨는 순간 그도 재빨리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전화를 받고 상대가 무슨 말을 했는지 온서빈은 심유정의 표정이 살짝 바뀌는 것을 보았다. “성진아, 진정해. 내가 금방 갈게.” 말을 마친 그녀는 다시 뒤돌아 서둘러 문밖으로 걸어 나갔다. 온서빈은 담담한 표정으로 친구 추가 페이지를 닫은 뒤 휴대폰을 넣으려는 순간 뉴스 알림이 떴다. [송성진 표절] 송성진은 최근 몇 년간 전국 규모의 신인 공모전에 참가해 우승을 거머쥐며 주목받던 신예 주얼리 디자이너였는데 이제 와서 당시 인기를 끌던 우승 디자인이 표절이었다는 게 밝혀졌고 공교롭게도 그가 표절한 디자인은 온서빈의 것이었다. 송성진이 급하게 심유정에게 전화를 거는 것도 당연했다. 심유정은 전 여자 친구이자 변호사였기에 가장 빨리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을 거라 생각했겠지. 하지만 안타깝게도 디자이너에게 표절은 치명적이었고 송성진은 스스로 함정을 판 것과 다름없었다. 딱히 자신과 상관도 없는 일이라 온서빈은 앱을 열어 내일 런던으로 가는 비행기 티켓을 구매했다. 이제 모든 준비가 끝났으니 내일 바로 떠나기만 하면 된다. 다음 날 아침에 돌아온 심유정은 급한 표정으로 아침을 먹고 있는 온서빈을 보며 한참을 망설이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서빈아, 성진이가 며칠 전에 공개한 디자인 시안이 표절로 밝혀졌어. 원작을 보니까 네가 5년 전에 인스타에 올린 ‘러브’ 시리즈던데 표절이 아니고 협업이라고 입장 밝혔어. 인스타 올라서 글 한 번만 올려주면 안 돼? 한 번만 도와줘.” 5년 전 주얼리 디자인을 그만두기로 결심했을 때 그는 공개했던 ‘러브' 시리즈를 마무리하기 위해 며칠 연속 밤을 새웠고 당시 그녀는 주얼리 디자인이 그렇게 좋으면서 왜 포기하는지 물어봤다. 온서빈은 자신의 커리어가 그녀만큼 중요하지 않다고 답했다. ‘러브' 시리즈는 둘이 만난 후 처음 출시한 컬렉션으로 그녀를 위해 디자인했고 그녀를 위해 마침표를 찍었다. 심유정은 ‘러브' 시리즈가 온서빈에게 큰 의미가 있다는 것을 가장 잘 알고 있으면서도 송성진을 위해 이런 부탁을 하고 있다. 원작자에게 표절한 사람을 위해 해명해 달라니. 우스꽝스러운 상황에 정말로 웃음이 터져 나온 온서빈은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봤다. “진짜 내가 글을 올려주길 바라?” 심유정은 그를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온서빈은 그녀의 진심을 알아챘다. 그녀는 온서빈이 송성진을 도와주길 바랐고 온서빈이 자신을 거절하지 않을 거라고 확신했기 때문에 제안했다. 온서빈이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가장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의 담담한 눈빛을 보며 심유정은 다시금 죄책감을 느꼈고 고민 끝에 그에게 보상을 해주기로 했다. “전에 해외여행 가보고 싶다고 하지 않았어? 글 올리고 나서 우리 같이 가자, 응?” 그렇게 말하며 결심을 드러내듯 온서빈이 보는 앞에서 직접 호주행 티켓 2장을 구매했다. 그런데 결제가 끝나자마자 송성진의 전화가 다시 걸려 왔다. “유정아, 누가 내 주소를 공개했는지 지금 집 앞에 엄청 많은 사람이 몰려들고 있어. 나 너무 무서워!” 전화기 너머로 울먹이는 목소리가 들려왔고 송성진이 사람들에게 둘러싸였다는 말을 듣자마자 심유정은 순식간에 당황하며 온서빈에게 꼭 해명해달라는 마지막 충고를 할 겨를도 없이 다시 황급히 문밖으로 향했다. 온서빈은 아무 말 없이 문으로 사라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며 잡지 않았다. 얼마 후, 그는 천천히 아침 식사를 마치고 설거지를 한 뒤 휴대폰을 꺼내 5년 동안 접속하지 않았던 인스타에 로그인해서 송성진의 해명 게시물을 태그해 글을 올렸다. [협업이 아닌 표절입니다.] 게시물을 올린 뒤 일어날 난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유심칩을 꺼내 부러뜨린 뒤 쓰레기통에 던지고 일어나 방으로 돌아가서 짐을 챙겨 나왔다. 마지막으로 집을 한 번 더 둘러본 후 그는 돌아서서 밖으로 나가서 택시를 부른 뒤 곧장 공항으로 향했다. 이번엔 그 누구를 위해서도 멈추지 않을 거다.

© Webfic, 판권 소유

DIANZHONG TECHNOLOGY SINGAPORE PTE. LT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