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장
부부가 서로 팽팽히 맞서고 있을 때 신지수가 모퉁이를 돌아서 걸어 나와 두 사람 앞에 멈추어 섰다.
신강욱과 노수정은 동시에 깜짝 놀라며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물었다.
“지수야... 언제부터 거기 있었어?”
“아까부터 쭉.”
신지수는 미소를 살짝 지었다.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으로 웃고 있는 그녀는 왠지 모르게 쌀쌀맞고 거리가 느껴져 속내를 알기 어려웠다.
신강욱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다시 말해서 두 사람이 했던 말을 전부 다 들었다는 뜻인데...
노수정이 이를 악물더니 이판사판으로 밀어붙였다.
“지수야, 엄마가 할 말이 있어.”
“네, 얘기하세요.”
신지수는 귀를 후비적거리며 준비됐다는 제스처를 취했다.
신강욱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고, 노수정을 끌어당겨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무슨 말 하려고? 이참에 딸이랑 아예 등을 돌릴 생각이야?”
노수정은 울컥하는 마음에 되받아쳤다.
“어차피 이 지경까지 왔으니 툭 까놓고 얘기하는 것도 나쁘지 않죠.”
“지수야, 윤아는 네 여동생이야. 오늘 연회에 참석한 사람들한테 네 정체를 밝힌 자체만으로 윤아에게 불공평한 일이지. 앞으로 분명 가짜라고 조롱받기 마련일 텐데 어렸을 때부터 금지옥엽으로 자란 아이가 어찌 이런 서러움을 견뎌내겠어?”
서사를 장황하게 늘어놓는 노수정을 보자 신지수가 그녀의 말을 끊었다.
“요점만 얘기해줄래요?”
“네 동생이 육서진을 좋아하는 건 모두가 공공연한 사실이야. 둘은 소꿉친구로 함께 자라 허물없이 지내는 사이였어. 남들 보기에 그야말로 천생연분이라고. 그러니까 오늘 어르신이 제안한 혼사는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으면 좋겠어.”
단지 신윤아가 좋아한다는 이유로 그녀에게 양보하라는 건가?
신지수는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러나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웃다가 어느새 눈물이 흘러내렸다.
전생의 속상했던 순간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고 감당하기 힘든 일, 버림받은 일들이 물밀듯이 밀려와 그녀를 순식간에 덮쳤다.
신지수는 마치 고장 난 인형처럼 입꼬리는 올라갔지만 눈물을 펑펑 쏟았다. 이내 자조적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엄마, 만약 저도 좋아한다면 어떡하실래요?”
신씨 가문에 돌아온 이후로 노수정은 그녀의 입에서 아직 엄마라는 소리를 들어보지 못했다.
심지어 연회에서 엄마라고 불러줬으면 좋겠다는 말에도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이제 드디어 소원을 이루었지만 이런 상황에서 듣게 될 줄이야!
참 아이러니했다.
노수정은 패닉이 왔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이 어디 있겠는가? 비록 두 딸을 사랑하지만 지금은 갈팡질팡하는 마음에 서로에게 너무 미안했다.
결국 얼굴을 가리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신강욱은 한숨을 내쉬더니 아내를 품에 안고 신지수에게 말했다.
“지수야, 엄마가 다른 뜻이 있는 건 아니야. 그냥 못 들은 척하고 신경 쓰지 마.”
상처는 이미 생겼는데 이제 와서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할 수 있을까?
과연 불화가 생기고 나서도 못 들은 척하면 해결이 될까?
신지수는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차가운 눈물을 닦아냈고, 조금 전 연약했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그리고 다시 고집스럽고 쌀쌀맞은 표정으로 돌아왔다.
“걱정하지 마세요. 어르신이 얘기한 혼사는 절대로 승낙하지 않을 거예요. 물론 육서진과 결혼하는 일도 없을 것이고.”
이 말을 끝으로 뒤돌아서 자리를 떴다.
노수정의 울음소리가 더욱 커졌다.
신강욱은 짜증이 난 탓에 저도 모르게 쏘아붙였다.
“당신이 원하는 대로 된 거 아니야? 대체 왜 울어?”
“이게 내 탓이에요?”
노수정이 그의 품에서 벗어나 고개를 들며 버럭 외쳤다.
“당신도 속으로 똑같은 생각 했잖아요!”
“그래도 대놓고 얘기하면 어떡해? 진짜 말이 안 통하는군!”
“그게 무슨 소리죠? 똑바로 얘기해요!”
20년 넘게 서로 사랑하던 부부가 이토록 심하게 다툰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
한편, 육씨 가문도 싸움이 벌어졌다.
영문도 모른 채 결혼하게 생긴 육서진은 생각할수록 화가 나서 참다못해 불만을 늘어놓았다.
“할아버지, 어떻게 저랑 상의도 없이 신씨 가문과 혼담을 꺼낼 수 있죠? 그것도 그런 여자한테!”
“어떤 여자?”
육상철이 차를 한 모금 마시며 물었다.
“그...”
육서진은 신지수의 이름조차 언급하고 싶지 않았다. 연회에 다녀와서 머릿속에 남아 있는 건 아리따운 얼굴과 열받게 하는 말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