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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장

하준이는 할머니를 싫어했고 고모도 싫어했다. 그래서 고모와 할머니가 엄마에게 핀잔을 주자 바로 소윤정의 편에 서서 엄마를 옹호했다. ‘나는 사나이니까 엄마를 보호해야 해. 이준 아저씨가 말한 것처럼 남자답게 엄마 앞에 서서 엄마를 사랑하고 지켜줄 거야.’ 누군가 엄마의 험담을 하니 하준이가 용감하게 나서야 할 때였다. 아들의 활약에 소윤정은 마음이 따뜻해졌다. 소윤정은 아들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가슴의 온기를 느꼈다. 예전 같으면 최성훈의 입장을 고려하여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못 들은 척 조용히 돌아서서 자리를 떴을 것이다. 저들 모녀가 소윤정을 지적하도록 내버려두고. 하지만 조금 전 하준의 변호가 그녀에게 용기를 주었다. 그리고 이미 최성훈과 이혼하기로 결심한 상태였기 때문에 더 이상 최씨 집안의 횡포를 참을 필요가 없었다. “하준이의 말이 맞아요. 바이러스성 감기는 예방할 수 없어요. 바이러스는 보이지도 만질 수도 없으니까요.” 이는 소윤정이 처음으로 대꾸한 말이었다. 온몸으로 귀부인 같은 자태를 풍기는 여현아는 소윤정이 대꾸할 줄은 꿈에도 생각 못 했다. 그녀는 소윤정의 표정에 깜짝 놀랐다. 여현아는 울렁거리는 가슴을 느끼며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한동안 그녀는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다. 거만한 태도에 익숙했던 최지민은 소윤정이 대꾸하는 말을 듣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소윤정 씨, 애를 어떻게 교육하는 거예요? 아이가 어른에게 이렇게 버릇없이 말하는데 말리지도 않아요?” 최지민은 진작부터 하준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빠와 할아버지가 저 애를 좋아하지 않았다면 소윤정, 네깟 게 어떻게 여기서 살 수 있겠어!’ 게다가 저 천한 것이 최지민이 독차지하던 최재용과 최태수의 사랑을 빼앗아 버렸다. 그래서 최지민은 소윤정이 더욱 미워졌다. 그로 인해 하준이의 변호를 마주한 최지민은 화가 치밀어서 아이를 때리고 싶은 마음마저 들었다. 최지민이 하준이를 겨냥하는 것을 본 소윤정은 곧바로 방어 태세를 취했다. “나는 지민 씨의 새언니잖아요. 지민 씨가 나한테 그렇게 대하니까 어린아이가 당연히 따라 할 수밖에 없죠.” 소윤정의 말투는 온화하고 부드러웠다. 그녀의 얼굴에는 옅은 웃음기가 담겨있었다. 그 모습을 보더니 최지민은 더욱 화가 치밀어 올랐다. “소윤정, 너... 반항하는 거야 뭐야? 이게 무슨 태도야!” “엄마! 저 뻔뻔한 년 좀 봐. 드디어 본색을 드러냈어.” 여현아는 최지민을 흘긋 쳐다보더니 다시 시선을 돌려 소윤정을 바라보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왜? 옛 연인이 돌아오니 뒷배가 생겨서 그래?” 소파에 앉아 있던 강수아는 손을 뻗어 일어선 최지민을 끌어당기며 말했다. “지민아, 화내지 마. 어머님도 화내지 마세요. 몸이 상하기라도 하면 어떡해요. 저런 사람은 상대할 가치도 없어요.” 최지민의 입에서 더 이상 좋은 말이 나올 리 없다는 걸 알았던 소윤정은 허리를 굽혀 아들의 앳된 얼굴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하준아, 올라가서 잠시 혼자 놀 수 있지?” 소윤정은 어른들 사이의 갈등에 아이를 끌어들이고 싶지 않아 도우미를 시켜 아이를 데리고 올라가게 했다. “그럼 엄마는요?” 소윤정은 간신히 미소 지으며 아이의 작은 볼을 꼬집었다. “엄마는 좀 있다가 올라갈게.” 하준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하준이는 엄마를 지켜야 해서 올라가기 싫어요.” 속 깊은 하준의 말은 따뜻한 물줄기처럼 그녀의 가슴속에 흘러들어 마음을 따스하게 녹여주었다. 소윤정의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 그녀는 두 손으로 아들의 얼굴을 감싸며 위로했다. “하준아, 걱정하지 마. 엄마가 해결할 수 있는 일이야. 엄마를 믿어.” 하준은 엄마의 자신만만한 눈빛을 보고 믿기로 했다. “그럼 난 위에서 엄마를 기다릴게요.” 아들과 도우미가 위층으로 올라가는 것을 눈으로 배웅한 소윤정은 그제야 소파의 세 여자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소윤정은 최성훈을 사랑했기에, 이 집안의 모든 것을 소중히 여겼다. 그래서 최씨 집안 사람들의 모든 횡포를 묵묵히 견뎌냈다.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최성훈을 사랑하지 않기로 결심하고 이혼하기로 했으니, 더는 두 여자의 행동을 밑도 끝도 없이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아가씨. 아가씨가 다른 사람과 호텔 방에 들어갈 때 찍힌 사진, 누가 막아줬죠?” 조금 전까지만 해도 의기양양했던 최지민은 바람이 빠진 풍선처럼 순식간에 풀이 죽었다. 최지민은 소윤정을 독기 서린 눈빛으로 노려보면서 더 이상 입을 놀리지 못했다. 조금 전의 오만함은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여현아가 입술을 움직여 무슨 말을 하려는 찰나 소윤정이 한발 앞서 입을 열었다. “어머님, 저와 송이준 씨는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남 보기에 부끄러운 일은 한 적 없어요.” “아드님이 이혼당하는 꼴을 보고 싶다면 먼저 성훈 씨의 의견부터 물어봐야죠!” 소파에 앉은 세 여자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세 여자는 지금껏 소윤정의 이런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마치 다른 사람이라도 된 것 같아 모두 아연실색했다. 그들이 어떻게 반격해야 할지 생각났을 때 소윤정은 이미 허리를 곧게 펴고 계단을 올라가고 있었다. ... 소윤정은 위층으로 올라가자마자 최성훈의 서재로 들어가 곧장 프린터기로 향했다. 그리고 자신의 컴퓨터를 켜고 프린터에 연결한 소윤정은 가장 원하는 것을 출력했다. 이혼 합의서. 소윤정은 자신의 이름을 또박또박 서명했다. 서명을 마친 후 펜 뚜껑을 닫는 동안 소윤정은 자신의 서명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5년 동안,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쏟아부었지만, 최성훈의 눈길 한 번 받지 못했다. 자신에게 속한 게 아닌 것은 아무리 손에 꽉 쥐어도 아주 잠시 손에 머물 뿐이었다. 긴 한숨을 내쉰 소윤정은 이혼 합의서를 눈에 잘 띄는 곳에 놓고 노트북을 품에 안은 채 서재를 나섰다. 그리고 침실로 돌아가 짐을 쌌다. 최씨 별장은 정원이 여러 개 있고 5층짜리 타운 하우스로 이루어진 규모가 큰 별장이었다. 평소에는 다 같이 살지 않지만 저녁 식사는 함께 먹어야 했다. 최태수는 시끌벅적한 분위기를 좋아해서 그런 규칙을 세웠다. 최씨 집안 사람들은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저녁 식사 자리에 꼭 나왔다. 소윤정이 하준을 데리고 소담 정원에 도착했을 때, 그녀와 하준을 제외한 모든 가족은 이미 그곳에 와있었다. 최태수는 그녀가 하준을 데리고 오는 것을 보고 서둘러 하준에게 손짓했다. “하준아, 증조할아버지한테 와.” 하준은 소윤정의 손을 놓더니 뒤뚱뒤뚱 증조할아버지에게 달려갔다. “증조할아버지, 안녕하세요.” 최태수는 말랑말랑 솜사탕 같은 증손자를 보며 활짝 웃었다. “어이구, 우리 귀한 증손자가 가장 귀엽네. 증조할아버지는 너만 보면 너무 기쁘단다.” “자, 증조할아버지가 뽀뽀해 줄게.” 하준이는 얌전히 서서 최태수의 뽀뽀를 받았다. 소윤정은 일일이 인사드렸다. “할아버님, 아버님, 어머님. 저 왔어요.” 최태수는 그녀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앉아라!” 최재용도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서 앉아.” 여현아는 소윤정을 못마땅하게 바라봤지만 최태수의 면전에서 소윤정을 트집 잡는 것도 어려웠기에 마지못해 대답했다. “응.” 최성훈도 그 자리에 있었다. 코트를 벗은 그는 검은색 바탕에 파란색 줄무늬 셔츠만 입고 소매를 걷어 올려 탄탄한 팔뚝을 드러냈다. 근육질의 팔뚝은 아름다운 라인을 자랑했다. 최성훈은 네크라인의 단추를 채우지 않아 정교한 쇄골의 일부가 어렴풋이 보였다. 소윤정이 다가오는 것을 본 최성훈은 얼굴을 굳혔다. 그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양미간을 찌푸렸다. 최성훈의 옆에는 강수아가 앉아 있었다. 소윤정에 걸어오는 것을 보며 강수아는 최성훈 쪽으로 몸을 기울여 그의 귀에 무언가를 속삭였고 그 덕에 최성훈의 입꼬리가 슬며시 말려 올라갔다. 강수아가 그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도우미는 최지민의 옆쪽에 소윤정의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소윤정은 아랑곳하지 않으며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고 자리에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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