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금, 다이아몬드 혹은 다른 값비싼 물건을 가져다준다면 원하는 거로 바꿔줄게요.”
하선아는 반짝반짝 빛나는 눈으로 신이 나서 말했다.
“물 있어요?”
남자의 목소리가 한층 가라앉았다.
“생수? 정수물? 밀크티? 음료수? 맥주도 가능하니까 뭐 마시고 싶어요?”
“물이면 돼요.”
깨끗한 물로 한시라도 빨리 말라비틀어진 입술을 적시고 싶었다.
이곳의 생수에는 이미 기생충이 생겨 마실 수 없다.
공간을 자유자재로 드나드는 하선아와 달리 서준수는 물건만 옮길 수 있다.
하선아는 서둘러 주방으로 가서 남자를 위해 국화차를 텀블러에 담아 각설탕까지 몇 개 집어넣었다.
“지금이 몇 시인데 아직도 꾸물거리고 있어? 얼른 가서 소 밥 주지 못해?”
잠옷 차림으로 뛰어나오는 하선아를 보자 이현숙은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시계를 확인하니 벌써 9시가 넘었다. 워낙 남존여비 사상이 강한 할머니인지라 아들마저 딸을 한 명만 낳으면서 세 식구에 대한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래서인지 큰아버지 댁의 자식들을 더욱 편애했다.
“여자는 키워봤자 소용없어. 돈도 못 벌고 어차피 시집가는 순간 남남과 마찬가지야. 대학교에 보내려고 뒷바라지해준 게 무색할 정도지. 공부가 가당키나 하냐고 누누이 얘기했는데 차라리 그 돈을 저축이나 할걸. 나중에 네 사촌 동생이 결혼할 때 보태면 얼마나 좋아?”
이현숙은 하선아의 뒷모습을 빤히 쳐다보았고, 집안일을 도와주기 싫어서 꾀부리고 다시 방으로 돌아가 잠을 잔다고 생각했다.
하선아는 텀블러를 공간에 넣었지만 남자는 가져가지 않았다.
“저기요?”
게다가 그를 불러도 묵묵부답했다.
남자가 얘기하길 종말이라고 했는데 설마 그녀의 공간만 찾아내고 좀비에게 죽임을 당한 건 아니겠지?
머릿속에는 다이아몬드와 금을 거저 줘도 안 가져간다는 말만 계속 맴돌았다.
...
황폐한 도심에서 가끔 좀비들이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서준수는 어깨를 다쳐 옷에 선혈이 낭자했고 어느새 딱딱하게 말라 있었다.
이내 잔뜩 경계하는 눈빛으로 폐허를 바라보았고, 짙은 안개에 하늘이 가려져 사방이 어두컴컴했다.
한때 번화했던 도시는 엉망진창이 되어 좀비들의 천국으로 변했다.
현재 그가 있는 곳도 좀비에게 점령당했다. 도처에서 시체의 악취가 났고, 언제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르는 굶주린 좀비를 항상 대비해야만 했다.
갑자기 좀비가 튀어나와 공격하자 서준수는 단숨에 머리를 잘라냈다. 다만 등에 생긴 상처를 건드린 탓에 욱신거리는 통증이 느껴졌다.
물과 음식을 보충하고 나니 체력이 많이 회복되었다.
돌로 뒤덮인 거리에 폐차들이 즐비해 있었고, 갈라진 땅속에서 잡초들이 자라났다. 그리고 길가에는 고물이 가득했다.
밤이 되면 좀비들이 기승을 부리기에 날이 어두워지기 전에 숨을 장소를 빨리 찾아야만 했다.
“대장님, 저는 여기까지인가 봐요. 만약 제가 죽으면 대신 가족을 돌봐주세요. 아들이 아직 어리거든요.”
남자가 무기력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랫동안 물을 마시지 않은 탓에 입술이 갈라져 피가 났다.
“그게 무슨 헛소리야! 널 찾아낸 이상 여기서 죽게 내버려 두는 일은 없어.”
서준수는 인상을 찌푸렸다. 공간에서 남은 음료를 꺼내 먹여주려고 했는데 김이 모락모락 나는 국화차를 발견하게 되었다.
아마도 그 여자가 준비해준 듯싶었다. 우선 부하를 구하고 금은방에 가서 금을 가져다주기로 했다.
이내 고민하다가 방금 구한 수정구슬을 공간에 넣어두었다. 어쨌거나 에너지 결정체인지라 그녀도 흡수할 수 있을 것이다.
공간을 드나든다는 자체가 초능력자를 의미하므로 충분히 소화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얼른 물 마셔.”
서준수는 차마 국화차를 가져가지는 못하고 아까 마시다 남은 음료수 반병을 꺼냈다.
비록 어디서 구한 건지 알 수 없지만 이정오는 목이 마른 탓에 조심스럽게 한 모금 마셨다.
“너무 맛있어요.”
하선아가 산 이온 음료는 청량하고 시원한 느낌이며 그들의 세계는 존재하지 않았다.
“음료수는 어디서 구했어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깜짝 놀란 얼굴로 물었다.
“당장 설명하기는 힘들어. 어쨌든 앞으로 식량은 구할 수 있을 거야.”
이정오는 두 눈에 생기가 감돌았고, 서준수의 말이라면 철석같이 믿었다.
그 여자는 분명 금이나 다이아몬드, 수정구슬도 괜찮다고 했다.
방금 수정구슬 하나를 공간에 넣어뒀는데 그녀가 받았는지 모르겠다.
하선아는 감쪽같이 사라진 음료수를 발견하고 남자가 가져갔다고 확신했다. 하지만 메추리알처럼 생긴 이 초록색 구슬은 뭐지?
게다가 고약한 악취까지 스멀스멀 풍겼다.
“이게 뭐예요?”
“수정구슬이에요. 좀비의 뇌에서 분리해냈죠. 당신도 초능력자이니까 수정구슬을 흡수하면 체내의 에너지가 증폭할 거예요.”
남자의 목소리는 전보다 훨씬 좋아졌고 한층 밝아졌다.
“좀비의 뇌에서...?”
하선아는 겁에 질려 수정구슬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좀비라면 인간의 머리에서 분리했다는 뜻과 다름없는데...
평화로운 시대를 사는 인간으로서 어찌 이해가 가겠는가? 한 마디로 사람의 뇌를 헤집었다는 뜻인가?
“과연 제가 사용할 수 있을까요? 차라리 금이나 주세요.”
이내 어이없는 말투로 말했다.
“이 공간은 너무 작아요. 능력치를 끌어올리면 크기도 확장이 가능할 거예요.”
서준수가 반박했다.
“그래야 더 많은 금과 다이아몬드를 찾아서 넣어두죠. 박물관에 있는 골동품도 옮겨올게요. 물과 식량을 제외하고 내가 사는 세계에서 갖고 싶은 물건은 전부 가져다줄 수 있어요.”
...
종말을 겪은 세상에서 식량 부족과 식물 돌연변이, 불안정한 토지, 그리고 수질 오염은 곳곳에 존재했다. 따라서 현재 그들에게 제일 필요한 건 음식이다.
“좋아요. 수정구슬은 어떻게 흡수하죠?”
하선아가 초조하게 물었다.
그러고 나서 조심스럽게 바닥에 떨어진 초록색 구슬을 집어 들었다.
머릿속으로는 공간이 넉넉해야 금을 두둑이 담을 수 있다는 남자의 말이 문득 떠올랐다.
다만 흡수하기 전에 흐르는 물에 한 번 헹궈야 할 것 같았다.
“입으로 삼키면 가장 좋은데 정 힘들면 터뜨려도 흡수가 가능해요.”
‘이럴 수가...’
“일단 알겠어요.”
하선아는 공간에서 나와 호스를 들고 수정구슬을 박박 씻었다.
그러나 손에서 자꾸 이상한 냄새가 나는 듯싶었다.
‘터뜨리라니? 장난해?’
말랑말랑한 촉감은 젤리를 연상케 했고, 만약 좀비의 뇌에서 분리했다는 소리를 듣지 않았더라면 그러려니 했을 것이다.
이내 고민하다가 수정구슬을 터뜨렸고, 초록색 안개가 뭉게뭉게 피어오르며 대부분 에너지가 증발했다.
그녀가 흡수한 건 극히 일부분에 불과했으나 냄새 때문에 머리가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체질을 개선해서 더욱 강한 육체로 만들어줄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