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기껏 대학교까지 뒷바라지했더니 도심에서 일자리를 찾기는커녕 시골로 내려와 농사나 짓는 게 말이 돼?”
이현숙이 씩씩거리며 말했다.
“그게 뭐 어때서요? 대도시는 스트레스가 얼마나 심한지 모르죠? 월세만 해도 50만 원이 넘는데 당연히 집이 더 낫죠.”
“낫기는 개뿔! 돈을 벌어야지, 무슨 헛소리하는 거야!”
“엄마! 목소리 좀 낮춰요. 선아가 밤새 기차 타고 와서 피곤할 텐데 더 자게 내버려 둬요.”
한편, 방에 있는 하선아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몇 년 전, 자그마한 3차원 공간을 넘나들기 시작하면서 치트키일 거라는 기대와 달리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도 물건을 보관할 수 있는 용도를 제외하고 그녀에게 아무런 편리함을 가져다주지 못했다.
집으로 돌아갈 때 캐리어 하나만 챙겼고, 월세방의 물건은 전부 이 공간에 옮겼기에 택배비는 절약했다.
하지만 지금은 보관했던 물건 중 일부가 감쪽같이 사라졌다. 옷이랑 생필품은 남아 있지만 간식거리와 특산품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요구르트와 음료수도 마찬가지였다. 어쨌거나 공간 자체는 움직이지 않았기에 보관한 물건을 잃어버릴 일이 없겠지만 음식류만 쏙 빠졌다.
여태껏 이런 상황을 겪은 적은 처음이었다.
물건이 발이 달린 것도 아니고, 과연 가능한 일인가 싶었다.
곧이어 공간에서 처음 보는 물품을 발견했다.
‘이게 뭐지?’
너덜너덜한 남자 옷과 녹슨 칼이라니?
이내 그녀가 산 초코 쿠키를 집어 들었는데 절반밖에 없었고 음료수도 반병 정도 남아 있었다.
누군가 훔쳐 먹은 흔적이 역력했지만 범인은 오리무중이었다. 게다가 먹다 남은 걸 돌려주는 심보는 뭐냐는 말이다.
누더기를 보는 순간 하선아는 공간을 오염시킨다는 생각에 휴지통에 던져 버렸다.
도둑이라도 들었나 싶었지만 자신을 제외하고 이 공간에 접근 가능한 사람이 도통 짐작이 안 갔다.
...
서준수는 벌써 5일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다행히 일반인을 능가하는 체력 덕분에 굶어 죽지 않고 지금까지 버텼다. 극심한 탈수 증상에 입술이 건조해져 어느새 갈라 터졌다.
비록 안색은 어두웠지만 이목구비가 또렷했고, 눈빛은 칼날처럼 날카로웠다.
그가 사는 네오 행성은 1년 전에 대폭발이 일어나면서 음식들이 유통기한이 지나서 식용이 불가했다.
결국 배를 채우기 위해 사냥을 나왔다가 다치게 되었고, 죽음을 받아들이는 순간 초능력을 각성했다. 다만 현시점에서 공간 이동은 큰 매리트가 없었다.
지금 어디서 물품을 구하냐는 말이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이 공간에는 무언가 있었다.
곧이어 여자들이 쓸 법한 물건을 발견하고 어리둥절했다. 샴푸, 린스, 여성복, 여성화, 생리대까지...
그중에서 간식 꾸러미와 물을 발견하고 꺼내려고 했지만 진짜 손에 닿을지 몰랐다.
과자 포장을 보자마자 왠지 익숙한 느낌이 들었고, 곰팡이 흔적도 없이 깨끗한 상태였다.
하지만 너무 오래 굶어서 많이는 먹지 못하고 몇 개만 뜯어서 나머지는 다시 돌려주었다. 그리고 유일하게 가진 보따리도 공간에 남겨두었다.
비록 초능력을 각성한 이유와 물건의 출처를 알 수 없지만 결국에는 살아남을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이때, 화가 난 듯한 여자의 목소리가 얼핏 들렸고 통통 튀는 말투는 애교가 묻어났다.
“대체 누가 내 물건을 훔친 거지?”
그제야 머릿속으로 문득 떠오른 생각이 있었는데 아마도 타인의 공간에 접근하는 초능력을 각성한 듯싶었다.
서준수는 어이가 없었다.
“미안해요. 여기 어떻게 들어왔는지 모르겠지만 배가 너무 고팠어요. 그동안 아무것도 못 먹어서 음식에 손을 댔는데 원하면 수정구슬을 줄게요.”
‘수정구슬이 뭐지?’
하선아가 눈살을 찌푸렸다.
공간을 맴도는 중저음은 귀호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만 살짝 갈라져 있었다.
하선아는 목소리가 좋은 사람에게 호감을 느꼈기에 금세 화가 사르르 풀렸다.
서로의 얼굴이 보이지 않아도 목소리는 들렸고, 게다가 같은 공간에 접속할 수 있었다.
“배고픈데 밥을 못 먹었다니? 돈이 없어요?”
하선아가 궁금한 얼굴로 물었다.
비록 그녀도 피차일반에 집도 시골에 있지만 적어도 끼니 걱정은 안 했다.
어렵사리 대학교에 합격해서 대도시로 진학한 기쁨도 잠시, 남들이 한 달에 생활비로 60만 원을 받을 때 고작 10만으로 버텨야 했기에 알바와 학업을 병행했다.
게다가 미술 전공인지라 취직이 쉽지 않고 생계유지가 힘들어서 마지못해 고향으로 돌아왔다.
“돈?”
남자는 우스갯소리라도 들은 듯싶었다.
“우리한테 돈은 무용지물이죠. 금이 빵 쪼가리 하나보다 값어치가 없어요. 만약 음식을 구해준다면 금은보화를 잔뜩 챙겨줄게요.”
이내 농담조로 말을 이어갔다.
그가 사는 행성에는 금이 도처에 널렸고 식량이야말로 제일 귀했다. 심지어 수정구슬도 흔쾌히 내놓을 수 있다.
“정말요? 잘됐네요. 어떤 음식이 먹고 싶어요?”
하선아가 신이 나서 말했다.
대체 어디서 온 사람이지? 돈이 있어도 밥 사 먹을 곳이 없다니!
결코 농담 같지 않은 하선아의 목소리에 서준수는 넌지시 물었다.
“음식이면 다 돼요. 원하는 게 뭐예요? 금? 다이아몬드? 수정구슬?”
‘수정구슬이 뭐지? 크리스털인가?’
하선아는 생각만 하고 차마 묻지는 못했다.
“아무거나! 그나저나 뭐 먹고 싶어요? 밥? 해장국? 오리구이? 샤부샤부? 통닭?”
그녀가 메뉴를 읊을 때마다 서준수는 자기도 모르게 군침을 삼켰다. 대체 얼마 만에 먹어보는 음식인가? 심지어 어떤 건 난생처음 들어 보았다.
“참, 과일도 있어요. 우리 집에서 사과, 딸기, 복숭아를 재배하거든요.”
서준수의 심장이 점점 떨리기 시작했다. 이런 것도 존재한단 말인가? 종말 이후, 모든 식물이 돌연변이를 일으키면서 식용이 불가할뿐더러 독소까지 생겼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해 독이 든 과일마저 섭취했다.
음식물은 둘째치고 식수 또한 오염되었다.
서준수는 어느새 입안에서 침이 고이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얘기했던 걸 전부 구할 수 있단 말인가? 그제야 여자는 본인의 시공간과 상관없는 사람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어쩌면 초능력을 각성하면서 그녀가 사는 다른 공간으로 접속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시공간을 뛰어넘는 소통이 가능했고 덕분에 살아남을 희망도 다시 생겼다.
“물 마시고 싶어요. 그리고 혹시 약도 있어요? 대신 수정구슬 줄게요.”
서준수가 물었다. 기지에는 아직 고열에 시달린 사람들이 많았다.
“약? 무슨 약이요? 돈이 많다는 사람이 약도 못 사요?”
하선아는 의문이 가시지 않았다.
“우린 현재 다른 시공간에 있어요. 여긴 종말이라 곳곳에 좀비일뿐더러 대부분 바이러스에 감염되었죠. 그리고 날씨는 극심한 더위와 추위 두 가지밖에 없죠.”
꽉 잠긴 목소리는 왠지 모르게 씁쓸하게 들렸다.
“그쪽이 말하는 금은 아무 데나 구할 수 있지만 거저 줘도 안 가져요. 오히려 유통기한이 지난 빵이 더 귀하죠.”
하선아는 깜짝 놀랐다. 무려 금이지 않은가? 어떻게 유통기한이 지난 빵보다 못하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