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화
차 안.
손세준은 안전벨트를 풀고 뛰쳐나가려다 누군가가 먼저 나선 걸 보고는 빠르게 안심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대표님의 지시대로 권해솔 씨의 집까지 찾아오길 참 잘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저희가 나설 타이밍은 없네요.”
손세준은 말을 뱉고 나서 바로 후회했다. 룸미러로 강재하의 얼굴이 어둡게 가라앉는 걸 봐버렸기 때문이다.
권해솔은 집으로 들어간 전, 갑자기 뒤로 돌더니 분노의 감정을 가득 담아 강현수에게 중지를 치켜들었다.
그러고는 머리칼을 멋있게 휘날리며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임유승, 당장 이거 안 놔?! 이건 나랑 권해솔 사이의 일이야. 네가 뭔데 나서!”
강현수는 임유승에게 단단히 잡힌 채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곧 결혼한다는 양반이 이래도 돼? 전 약혼녀한테 아직 미련 있다는 기사라도 나고 싶어? 그걸 원하는 게 아니라면 아무 말도 하지 말고 이만 집으로 돌아가.”
임유승의 경고에 강현수는 그제야 이성이 돌아온 듯 차량 쪽으로 걸어갔다.
권설아는 그 뒤를 따라가려다가 뭔가 생각난 듯 가방에서 청첩장을 꺼내 들었다.
“이거 나랑 현수 오빠 결혼식 청첩장이에요. 언니한테 대신 전해주세요.”
그녀는 임유승에게 청첩장을 건네준 후 바로 다시 강현수에게로 뛰어갔다.
임유승은 손에 들린 청첩장을 보고는 권해솔이 안쓰러워 깊은 한숨을 한번 내쉬었다.
“해성시에는 갑자기 왜 왔어?”
권해솔이 컵에 물을 따라주며 임유승에게 물었다.
“갑자기라니. 곧 개강이잖아. 미리 와서 적응 좀 해야지.”
사실 임유승은 권해솔보다 한 학년 아래인 후배였다. 그래서 원래부터 두 사람은 함께 졸업하는 게 불가능했지만 임유승은 거기에 더해 집안 사정으로 1년을 휴학하는 바람에 권해솔이 학업을 마치고 졸업할 때 그는 2년이나 더 기다렸어야 했다.
그리고 지금은 또 졸업 논문 과제가 많이 어려운 탓에 1년이 더 연기되었고 말이다.
“너도 진짜 대단하다. 대학원도 갈 생각인 거지?”
권해솔은 졸업을 그렇게도 어려워하면서 대학원까지 생각하는 그가 대단한 걸 넘어서 경이로울 지경이었다.
“난 좋아. 여기 있으면 채영이도 볼 수 있고.”
임유승은 정채영 생각에 기분이 좋은지 금세 얼굴이 풀어졌다.
“근데 오늘은 너 보러 온 거야. 네가 전에 부탁했던 7년 전의 자료를 전해주려고.”
7년 전 그날, 권해솔은 대학교 합격 통지서를 소중히 품에 안은 채 세상을 다 가진 듯한 기분으로 막 개발한 공원에 있는 호숫가를 걷고 있었다. 이제 드디어 권씨 가문을 탈출할 수 있게 된다고 생각하니 발밑에 구름이라도 둥둥 떠 있는 것 같았다.
그렇게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기쁨을 한껏 만끽하고 있는데 갑자기 누군가가 뒤에서 그녀를 퍽 하고 호숫가로 밀어버렸다.
호숫가 바로 옆을 거닐고 있었던 터라 그녀는 뭘 잡아볼 새도 없이 그렇게 호수에 빠지고 말았다.
그리고 그녀가 그렇게도 소중하게 품에 넣었던 합격 통지서도 떠밀려진 충격으로 함께 호수에 떨어졌다.
보통 사람 같았으면 어떻게든 발버둥 치며 빨리 나오려고 했을 텐데 권해솔은 물속을 두리번거리며 합격 통지서부터 찾았다. 그때는 그게 더 중요했으니까.
그런데 아무리 발버둥을 쳐봐도 합격 통지서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고 설상가상으로 하늘에서는 굵은 빗방울들이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게다가 이제는 슬슬 손과 발에 힘이 풀리기 시작하며 시야가 어둡게 변하는 듯한 느낌도 들었다. 의식을 잃기 직전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때 기적적으로 누군가가 손을 뻗어왔고 그녀는 흐려가는 의식을 간신히 부여잡으며 물 밖으로 구해졌다.
“솔아... 솔아!”
권해솔은 임유승이 큰 소리로 부르며 팔을 흔들고 나서야 상념에서 빠져나왔다.
“응? 뭐라고 했어?”
임유승은 열댓 장의 사진을 테이블 위에 펼쳐놓으며 다시 말을 이었다.
“네가 호수에 빠졌던 그 공원 말이야. 그때는 막 개발됐던 때라 CCTV가 얼마 없었지만 그래도 범인의 뒷모습이랑 옆모습은 찍혔어.”
“그때 조사했을 때는 CCTV를 누군가가 일부러 고장 냈다고 했는데?”
“내가 누구냐? CCTV 영상 복구하는 건 일도 아니지.”
임유승은 얼른 칭찬하라는 듯 입꼬리를 한껏 올렸다.
하지만 권해솔은 못 들은 척 그의 말을 가볍게 무시했다.
“날 구해줬던 남자가 찍힌 영상은?”
“그건 아직 복구 중이야. 시간이 오래되기도 했고 그 영상은 고장이 좀 심하게 나서 시간이 조금 더 걸려야 해. 미안...”
임유승이 풀이 죽은 얼굴로 말했다.
“뭐가 미안해. 네 덕에 누가 날 밀었는지는 확실히 알게 됐는데.”
권해솔은 말을 하며 영상 속의 땋은 머리 여자아이를 가리켰다. 그녀는 본가에서 근무하던 도우미의 딸이었다.
고작 도우미의 딸을 여태 기억하고 있었던 건 그녀가 권설아와 꽤 많이 친했었기 때문이다.
둘이 친해지게 된 건 여자아이가 허락도 없이 도우미 방에 살고 있는 걸 권설아가 알아버린 뒤부터였다.
여자아이는 당시 권설아에게 딱 걸리고는 바로 무릎을 꿇었다. 제발 권태산에게 얘기하지 말아 달라면서 말이다.
권설아는 눈치도 빠르고 말발도 좋은 아이가 꽤 마음에 들었는지 정말 아무런 얘기도 하지 않았고 그 뒤로 갑자기 친하게 지냈다.
“얘도 나랑 같은 대학교에 합격했었어.”
“흠, 그렇다면 이 여자애가 널 질투해서 밀어버렸을 수도 있겠네. 아니면 권설아가 뒤에서 시켰던지.”
“직접 물어봐야지. 무슨 이유에서 날 밀었는지.”
사람 찾는 건 임유승의 전문분야가 아니었기에 권해솔은 흥신소에 의뢰했다. 물론 어디까지나 7년 전의 일이라 그들이 정말 찾아줄 거라는 기대는 크게 없었다.
사실 권해솔은 자신을 밀어버린 사람이 누군지 당시에 이미 어느 정도 짐작을 했다. 하지만 그때는 마땅한 증거가 없어 뭐라 얘기를 할 수 없었다.
게다가 그때는 범인보다는 자신을 구해준 사람을 찾는 것에 더 혈안이었으니까.
“그럼 나머지 영상도 부탁해.”
임유승은 권해솔이 그때의 일에 얼마나 진심인지 잘 알고 있기에 쓸데없는 장난은 치지 않았다.
“당연한 소리를. 내가 다 복구해줄 테니까 넌 걱정하지 말고 이 오빠만 믿어!”
그 시각, 강현수는 권설아와 함께 차 안에서 서로의 손을 꽉 맞잡고 있었다.
“설아야, 내일부터는 우리도 정정당당하게 손을 잡고 거리를 활보할 수 있어.”
말은 이렇게 했지만 사실 강현수는 결혼식이 그다지 설레게 느껴지나 하지는 않았다.
분명히 오래 고대해왔던 날인데 막상 그 날이 내일로 닥쳐오자 이상하게 흥미가 뚝 떨어졌다.
“오빠, 언니랑 오빠네 삼촌 일은 너무 걱정하지 마. 강 대표님이 어디 보통 사람이야? 불순한 목적을 가지고 다가오는 사람쯤은 금방 알아챌 거야.”
권설아의 말에 강현수는 원래는 별생각이 없었다가 아무래도 권해솔에 관해 삼촌과 한 번쯤은 얘기를 나눠봐야 할 것 같아 얼른 집으로 향했다.
집 거실에 들어선 그는 강재하에게 전화를 걸려다가 마침 소파에 앉아있는 그를 보고는 잘됐다는 얼굴로 다가갔다.
“마침 잘됐네요. 삼촌, 할 말이 있어요.”
강재하의 바로 옆에 서 있던 손세준은 불과 몇 시간 전에 강현수가 권해솔에게 달려들던 꼴을 두 눈으로 직접 봤었던 터라 그의 등장에 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물론 강현수가 어떤 말을 하며 왜 권해솔에게 달려들었는지는 거리가 멀어서 듣지 못했다.
강재하는 신문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해.”
강현수는 강재하와 그다지 친한 편이 아니라 그가 평소에 어떤 생각을 하고 있고 어떤 걸 좋아하는지 같은 건 거의 모르고 있지만 그래도 피로 연결된 한 가족이었기에 그가 아무런 관계도 없는 타인보다는 조카인 자신을 더 믿을 거라고 생각해 천천히 말을 늘어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