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화
심진우의 술기가 확 깼다.
“너희들 뭐 하는 거야! 내가 누군지 알아?”
강재혁이 뼈마디가 선명한 손을 가볍게 흔들자 몇 명의 경호원들이 심진우를 끌고 밖으로 나갔다.
“주다인! 너 뭐 하냐? 어서 와서 나 좀 구해줘!”
주다인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순식간에 병원 복도는 고요해졌다.
과장은 주다인을 한 번 쳐다보며 한숨을 쉬고 실망 가득한 표정으로 자리를 떠났다.
구경하던 사람들도 하나둘 흩어져 갔다.
모든 것이 없었던 것처럼 원점으로 돌아갔지만 오직 주다인의 발만은 바닥에 달라붙은 듯 움직일 수 없었다. 온몸이 안팎으로 얼어붙은 듯 차가웠다.
“괜찮아요?”
머리 위로 남자의 낮고 매력적인 목소리가 흘러내렸다.
주다인이 고개를 들자 가늘고 깊은 눈을 가진 남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그녀는 갈라진 입술을 살짝 떼며 말했다.
“아까 일... 고마워요.”
강재혁은 주다인의 얼굴을 바라보며 눈빛에 알 수 없는 감정이 스쳤다.
“저기... 몇 살 이이에요?”
주다인은 멍하니 잠시 망설였다.
“저... 저요?”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25세예요.”
주다인은 잠시 망설이 다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런데... 왜 제 나이를 물어보신 거죠?”
“고아예요?”
강재혁은 그녀의 말을 가로막으며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주다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어떻게 그걸 아세요?”
그녀는 머릿속을 빠르게 굴리며 강재혁과의 기억을 찾아보았지만 전혀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분명 처음 만난 사람이었다.
강재혁은 얇은 입술을 단단히 다문 채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더니 명함 한 장을 꺼내 천천히 주다인에게 건넸다.
“제 연락처예요.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연락해요.”
말을 마치고 난 그는 주다인을 유심히 바라보다가 자리를 떴다.
주다인은 그가 사라질 때까지 멍하니 서 있었다.
얼마 후, 그녀는 손에 든 명함을 내려다보았다.
강재혁, 강성 그룹 대표님이었다.
“...어디서 들어본 이름 같은데.”
주다인은 어디서 들어본 이름인지 생각해보려 했지만, 머릿속이 혼란스러워 포기하고 명함을 주머니에 넣은 채 사무실로 돌아가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선생님, 정말 떠나시는 거예요?”
보조 의사가 달려와 애처로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 약은 대체 무슨 일이었던 거죠...”
“누군가가 바꿔치기한 모양이야.”
주다인은 책상 위 사진액자를 박스에 넣으며 보조 의사에게 위로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
“괜찮아. 이 일의 진상을 어떻게든 밝혀낼 거야. 넌 열심히 일해서 조기 전임되는 게 목표야.”
말을 마치고, 수납 박스를 안은 채 사무실을 나섰다.
집에 도착하니 시계는 이미 새벽 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문을 열자마자 소파에 앉아 있는 심진우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의 얼굴은 마치 엎질러진 먹물처럼 어두컴컴했다.
주다인의 미간이 한껏 일그러졌다.
“우린 이미 헤어졌어. 누구 맘대로 들어온 거야? 이건 불법 침입이야!"
“그만해!”
심진우가 고개를 들며 이를 악물고 말했다.
“이런 밀당 말고는 할 말이 더 없는 거야?”
주다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나한테 바라는 게 뭐야? 거짓말만 일삼는 전 남자 친구한테 무슨 말을 하길 원하는데?”
심진우가 벌떡 일어나며 눈을 더욱 가늘게 떴다.
“아까 그 남자 누구야?”
“몰라.”
“몰라?”
심진우의 목소리가 몇 옥타브나 올라가며 관자놀이에 핏줄이 불거졌다.
“모르는 사람이 널 도와줬다고?”
“네 맘대로 생각해. 나 피곤해. 제발 우리 집에서 나가!”
완전히 폭발한 심진우는 몇 걸음 앞으로 나가 주다인의 손목을 잡아챘다. 주다인이 들고 있던 물건들이 탁 하고 바닥에 떨어졌다.
“주다인! 너 나랑 헤어진 게 저 남자 때문이지? 이런 젠장... 너 바람까지 피워?”
그의 손은 철제 집게처럼 주다인의 손목을 옥죄었는데 힘이 너무 세 그녀의 손가락 끝이 저릿저릿해질 정도였다.
“네가 그렇게 더러운 년이었어? 남자 없으면 못 살겠어? 나한테는 결혼 전엔 동거 안 한다고 고상한 척하더니, 밖에서는 음탕하게 굴고 다니는 거야?”
익숙하면서도 낯선 이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며, 주다인의 가슴이 격하게 요동쳤다.
종일 쌓여왔던 감정이 한순간에 용암처럼 분출하기 시작했다.
서러움, 분노, 비통함이 뒤엉켜, 목을 조르는 거대한 손처럼 그녀의 숨통을 막아왔다.
더는 참을 수 없었다.
주다인은 온몸의 힘을 모아 심진우의 손아귀를 벗어났다.
“심진우! 네가 무슨 자격으로 나에게 따져? 도대체 우리 둘 중에 누가 먼저 잘못한 거야? 내가 바람 피웠다고? 처음부터 거짓으로 시작한 너보다는 낫지!”
“너!”
이 말들이 심진우를 완전히 격분시켰다. 그는 갑자기 손을 들어 올리더니 주다인의 얼굴을 향해 거세게 내리치려 했다.
주다인의 심장이 멎는 듯했고 자기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하지만 예상했던 고통은 찾아오지 않았다.
주변은 고요했고, 주다인은 간신히 고개를 들고 움직이며 천천히 눈을 떴다.
심진우의 손은 공중에 멈춘 채 내려오지 않고 있었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 남자는 천천히 손을 내렸다. 마치 자신의 화를 억누르는 듯 숨을 크게 내쉬었다.
“다인아, 우리 둘 사이좋게 지내면 안 될까?”
그의 목소리는 부드러워졌다.
“전에 일은 내 잘못이었어. 널 속인 건 잘못이었지만 나도 나름의 사정이 있었어. 이제 네가 다 알았으니 내가 전에 모자란 부분 다 보상해줄게.”
함께한 3년 동안, 두 사람 사이에 갈등이 있을 때마다 심진우가 조금만 말을 부드럽게 하면 주다인은 반드시 마음이 풀렸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주다인의 눈에는 실망이 가득했고 마치 낯선 사람을 보듯 그를 바라보았다.
“심진우, 내가 너를 다시 믿을 것 같아? 3년이란 시간 동안 진실을 말할 기회는 얼마든 있었어. 하지만 넌 그러지 않았지. 잘 들어. 오늘부터 네 입에서 나오는 말은 단 한 마디도 믿지 않을 거야. 그 가식적인 모습 집어치워. 보기만 해도 속이 역겨우니까.”
심진우가 간신히 유지해오던 온화한 가면이 순간 찢어져 버렸다.
그는 몸 옆에 내리뜨린 손을 꽉 쥐어 뼈마디에서 우두둑 소리를 냈다.
“그리고, 당장 나가지 않으면 경찰에 신고할 거야!”
주다인의 얼굴은 차가운 빙판처럼 심진우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며 흔들리지 않았다.
심진우는 자존심이 상한 듯 그녀의 코를 가리키며 목이 터지도록 소리쳤다.
“좋아! 주다인, 방금까진 내가 너에게 준 마지막 기회였어! 네가 기회를 못 잡은 거니 후회하지 마!”
문을 쾅 닫으며 사라진 심진우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주다인은 불을 켜지도 않은 채 소파에 홀로 앉아 있었다.
얼어붙은 손가락을 꼭 쥐었다 폈다 하며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겨우 진정할 수 있었던 그녀는 휴대폰을 꺼내 예전부터 친분이 있던 의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선생님, 오늘 당직이시죠? 오늘 발생한 그 의료 사고 관련 기록을 좀 확인해주실 수 있을까요...”
주다인은 간단하게 자신의 사정을 설명했고 유 닥터도 기꺼이 도와주겠다고 답했다.
이번 통화가 오늘 하루 유일한 위안이 될 것 같았다.
주다인이 화면을 끄려던 찰나 갑자기 뉴스 알림이 화면 위로 떴다.
[송글 그룹 대표님 부인, 최근 자선 파티에 참석.]
주다인이 기사를 열어보자 우아한 한 부인의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이건...?’
주다인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서둘러 사진을 확대해 보았다.
부인의 얼굴을 자세히 살펴본 그녀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렸다.
‘이 송글 그룹 사모님이... 왜 이렇게 나랑 닮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