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화
“선생님, 응급환자입니다. 교통사고를 당하셨고 상태가 위급합니다!”
주다인이 애인 심진우가 야근하면서 밥을 제때 먹지 않을까 걱정하던 중, 간호사의 급한 목소리가 밖에서 들려왔다.
“이분은 송글 그룹의 대표님이시고 사회적 영향력이 크신 분이에요. 병원 앞엔 이미 기자들이 모여들고 있어요.”
주다인은 즉시 생각을 정리하고 진지한 표정으로 수술실로 향했다.
“기자들은 신경 쓰지 말고 바로 수술 준비하세요!”
...
4시간 후, 주다인은 지친 몸을 이끌고 수술실을 나왔다. 마스크를 벗자마자 먼저 시간을 확인했다.
8시.
이 시간이면 심진우는 아직 회사에서 야근 중일 것이다.
운해시 3월의 밤은 여전히 칼바람이 살을 에었다.
그는 심진우가 좋아하는 야식을 산 후 서둘러 그의 회사로 향했다.
가까이 다가가기도 전에 안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비웃음이 섞인 목소리였다.
“진우 형, 진짜 대단해. 이렇게 오래도록 주다인이 형의 신분을 눈치채지 못하다니!”
‘신분?’
주다인은 문을 열려던 동작을 멈췄다.
사무실 안에서 심진우의 놀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바보 같은 여자일 뿐이야. 그런데 이상하네. 이렇게 오래됐는데 아직도 질리지 않아. 아마 아직 잠자리를 같이하지 않아서일 거야. 다 하고 나면 바로 차버릴 테지.”
“아, 그래도 처음에 한 내기가 내가 이긴 거 맞지? 너희 중에 누가 주다인이 꽤 어렵다 그랬어? 나는 딱 한 달 만에, 그냥 작은 선물 몇 번만으로도 개를 내게 홀딱 반하게 만들었잖아.”
자랑 섞인 목소리가 이어지자 친구들이 물었다.
“형, 그럼 주다인이 형이 심씨 가문의 아들이라는 걸 알면 어쩌려고 그래? 지난 3년 동안 일부러 가난한 척한 거잖아.”
“맞아, 다인 씨 이렇게 계속 너에게 돈을 쏟아부었는데, 네가 이 회사의 설계 도면원이 아니라 이 회사의 도련님이라는 걸 알면 미쳐 버리지 않을까?”
“하하하, 분명 펑펑 울 거야!”
계속되는 웃음소리가 주다인의 고막을 찔렀다.
그녀의 머릿속이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얼얼해졌고, 두피는 차갑게 저리며 마비된 듯했다.
‘심진우가... 심씨 가문의 아들이라고?
도대체 어떻게 그럴 수가.’
그녀는 흐릿한 정신으로 자신이 환청이 들렸다고 생각했다.
‘...농담인 거겠지?’
하지만 심진우의 말은 그 유일한 희망마저 산산이 조각 내버렸다.
“며칠 전에 다인에게 400만 원을 뜯어서 밥 한 끼에 다 써 버렸어. 좀 더 놀아보고 질리면 헤어질 거야. 그때가 되면 다인이 펑펑 우는 꼴 한번 봐.”
주다인은 다리가 후들거리며 한 발 뒤로 물러섰다. 머리가 지끈거리며 분노가 목까지 치밀었다. 그녀는 그만 웃어 버렸다. 웃기 시작하자 눈물까지 흘러내렸다.
정말로 바보 같았다.
대학 시절부터 만나 사랑해왔고 3년이라는 시간을 함께했는데도, 옆에 있던 사람의 진짜 얼굴을 몰랐다.
심씨 가문의 아들이라니.
이 얼마나 고귀한 존재인가.
고귀해서 남의 진심을 짓밟아도 되고, 고귀해서 거짓으로 웃음거리가 된 내기를 완성할 수 있다는 건가...
주다인의 가슴은 갑작스럽게 칼에 찔린 듯 아파와 움직일 수 없었다.
그렇다면 그녀의 사랑은 대체 무엇이었던 걸까...
그렇게 많은 시간을 바쳤던 것은 대체 무엇 때문이었던 걸까...
3년 동안, 그녀는 죽어라 일하고, 죽어라 야근을 했다. 그가 편하게 대학원을 다닐 수 있도록 말이다. 가장 힘들었던 때는 하루에 세 가지 아르바이트를 뛰어야 두 사람의 생활비와 학비를 감당할 수 있었다. 심진우의 월세조차 그녀가 냈다.
그녀는 아껴가며 조금씩 모은 돈으로 심진우가 가장 좋아하는 신발과 시계를 사줬다. 그가 남들 앞에서 자존심이 상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알고 보니 전부 거짓이었다!
주다인은 가슴을 움켜쥔 채 숨이 막힐 듯한 고통에 휩싸였다.
그녀는 살짝 열린 문 사이로 소파에 앉아 비웃는 표정을 지은 심진우를 바라보았다. 보온통을 쥔 손가락이 점점 힘을 주더니 결국 온몸이 떨릴 정도로 강하게 움켜쥐었다.
한참을 지나서야 그녀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얼어서 감각이 없어진 손으로 휴대폰을 꺼내 녹음 버튼을 눌렀다.
사무실 안에서의 대화는 계속되었고, 한 마디 한 마디가 주다인의 피투성이가 된 심장을 후벼 파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더욱 무정하게 말할수록 그녀는 오히려 더욱 냉철해졌다.
그들의 대화가 다른 주제로 넘어갈 때쯤 주다인은 떨리는 손으로 녹음을 저장했다.
마지막으로 힘없이 풀린 다리를 겨우 움직이며 한 걸음 한 걸음 자리를 떠났다.
집에 돌아온 주다인은 소파에 앉아 있었다. 창백한 얼굴 위에 유일한 색채는 핏발이 선 그녀의 두 눈뿐이었다.
거실 창문이 닫히지 않아 차가운 바람이 들어오고 있었지만 그녀는 전혀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눈빛은 생기를 잃은 듯 퀭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문밖에서 갑자기 문고리 돌아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심진우가 그녀의 집에 와서 거실의 차가운 바람을 느끼며 몸을 움츠렸다.
“다인아, 이렇게 추운데 창문을 안 닫고 있었어?”
그는 발코니로 가서 창문을 닫은 후, 여전히 따뜻한 미소를 머금고 주다인 곁으로 다가와 평소처럼 그녀를 다정하게 끌어안았다.
“오늘 병원 바빴어? 왜 저녁 안 가져왔어?”
주다인의 송장 같던 눈동자가 흔들렸다. 조금 전 들었던 그 지르는 듯한 목소리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며 이미 무감각해졌던 마음이 다시 욱신거렸다.
그녀는 손바닥을 꽉 움켜쥐고서야 눈앞에 고인 눈물이 흘러내리는 걸 막을 수 있었다.
“난 갔었어.”
그녀의 목소리는 마치 사포에 갈린 듯했다.
단 네 글자만으로 심진우의 미소는 얼어붙었다.
그는 어색하게 주다인을 놓아주며 눈앞에서 스쳐 지나간 불안을 숨기려는 듯 앞에 있던 유리잔을 집어 들었다.
“언제 갔었는데... 나는 몰랐네?”
주다인은 목구멍까지 차오른 쓰라림을 삼키며 휴대폰을 꺼냈다. 단순한 동작 하나가 온몸의 힘을 빼는 것 같았다.
그녀는 휴대폰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녹음 파일을 재생했다.
“형 진짜 대단하다. 이렇게 오래도록 주다인이 형의 신분을 눈치채지 못하다니!”
웃음과 비웃음이 섞인 목소리가 확성기처럼 터져 나왔다.
주다인은 자해하듯 그 소리를 반복해서 들었다. 다시 처음으로 돌려놓고 듣고 또 듣고...
마지막에는 손이 떨려 휴대폰을 제대로 잡을 수 없을 지경이었다.
심진우의 얼굴은 창백해졌다.
“다인아, 내가 설명할게...”
“뭘 설명할 건데? 3년 동안 어떻게 날 속였는지 설명할 거야?”
주다인의 입술이 떨렸다.
“심진우... 아니, 송씨 가문 도련님.”
그녀는 피로 물든 눈으로 옆에 앉아 표정이 어두운 심진우를 바라보며 한 마디 한 마디를 내뱉었다.
“우리 헤어져.”
심진우는 손에 컵을 꽉 움켜쥐었는데 어두운 눈빛 속에서 감정을 읽을 수 없었다.
한참이 지나서야 그는 손에 들고 있던 컵을 내려놓았다. 마지막 가면도 벗어던진 듯 얼굴은 차갑게 식어 있어 낯설게만 보였다.
“그래, 내가 심씨 가문의 아들이야. 그게 어쨌는데?”
그는 주다인을 직시하며 속임수가 들통난 뒤의 당혹스러움이나 당황함이라곤 눈곱만큼도 없었다.
“그럼 네가 기뻐해야 하는 거 아니야? 이제 부잣집 사모님이 될 수도 있는데.”
주다인은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 속에서도 어이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내가 샴페인을 따며 축배라도 들어야 할까? 지난 3년 동안 네 손바닥 위에서 놀아난 걸 축하해?”
심진우는 이를 악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녹음이라는 확실한 증거 앞에서 어떤 변명도 무의미해 보였다.
하지만 그는 확신했다. 주다인이 그와 헤어지지 않을 거라고. 어차피 그녀는 자신을 그렇게 사랑했으니 말이다.
게다가 남자 친구가 재벌 상속자라는 걸 알게 된 여자가 헤어지겠다고 나설 리가 없지 않겠는가. 한심한 자존심일 뿐이다.
주다인은 그와 더는 말을 나누고 싶지 않아 직설적으로 말했다.
“심진우, 잘 들어. 이번에는 네가 날 놀린 게 아니라 내가 널 차버린 거야. 이 주다인이 심진우를 차버린 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