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화
양지안이 이렇게 솔직하게 인정하자 손윤서의 얼굴은 완전히 굳어졌다.
그전까지만 해도 오해가 있을 거로 생각했지만 인제 보니 어머니의 말이 모두 사실이었다.
진태웅이 결혼하자마자 다른 여자와 바람을 피운 건 둘째치고 자신의 가족을 그렇게 대하는 것은 정말로 그녀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두 사람이 어떤 관계든 상관없이 지금 나랑 돌아가서 민준이한테 사과해요. 옛정을 생각해서 다른 책임은 묻지 않을게요.”
손윤서의 차가운 목소리와 단호한 눈빛에 진태웅은 마음이 움찔하더니 저도 모르게 비웃으며 말했다.
“내가 네 마음속에는 그런 사람이었네. 나더러 사과하라고 하기 전에 먼저 돌아가서 그 두 사람이 무슨 짓을 했는지 물어봐.”
진태웅의 태도에 손윤서는 잠시 망설였다. 어머니의 성격을 잘 아는 그녀는 어쩌면 정말로 무슨 오해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진태웅을 막아선 채 그의 앞에서 직접 오향은에게 전화했다.
처음엔 오향은이 얼버무리며 말을 안 하려 했지만 진태웅이 옆에 있다는 걸 알자 어쩔 수 없이 옥패를 빼앗은 자초지종을 털어놓았다.
오향은이 가볍게 말했지만 손윤서는 그때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대충 짐작할 수 있었고 머리가 아팠다.
그 옥패는 진태웅 부모님의 사랑 증표이자 그의 어머니가 남긴 유일한 유품으로서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엄마랑 민준이는 그 옥패가 당신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몰라요. 게다가 물건은 아직도 당신에게 있잖아요. 어쨌든 손찌검해서는 안 돼요. 특히 어른에게는 더더욱 안 되죠.”
어머니가 잘못한 건 알지만 손윤서는 속이 편치 않았다. 진태웅은 아무런 손해도 보지 않았는데 어머니는 맞았으니 말이다.
양지안은 더는 듣고 싶지 않았다.
“사실도 안 따지지 않는데 무슨 말을 더할 수 있겠어요? 윤서 씨네 가족들은 정말 특이하네요. 말도 함부로 하고 다른 사람의 물건을 마음대로 빼앗더니 인제 와서는 또 뻔뻔하게 따지려 들려고 하다뇨. 이제 진태웅 씨는 제 남자예요. 체면을 남기고 싶다면 앞으로는 우리 앞에 나타나 시끄럽게 굴지 마세요.”
양지안의 카리스마 넘치고 차갑고 도도한 기세 때문에 손윤서는 압박감을 느꼈다.
“지안 씨 남자라고요? 만약 두 사람이 오래전부터 사귄 게 아니라면 접촉한 시간이 길지 않을 건데 이런 말을 하기엔 이르지 않아요? 옷차림으로나 분위기로나 일반 집안에서 태어난 사람이 아닌 것 같은데 결정하기 전에 잘 생각해보세요. 옆에 있는 이 남자는 결코 단순하지 않아요.”
지난 3년 동안 진태웅은 집안일에 충실하고 무던하며 사회생활이 없었던 사람이었다. 더 직설적으로 말하면 성과도 없이 나약하고 소심한 남자였다.
하지만 이틀 동안의 접촉으로 손윤서는 이 남자가 음흉하고 비열한 면도 가지고 있었다는 걸 발견했다.
“태웅 씨, 우리 가요. 이런 여자랑 말 섞을 필요 없어요.”
양지안은 더는 손윤서를 상대하지 않고 진태웅와 팔짱을 끼고 안으로 들어갔다.
손윤서의 옆을 지나갈 때 그녀는 의도치 않게 주머니에 넣고 있었던 새로 발급받은 혼인 신고서를 슬쩍 드러냈다.
손윤서는 사진 속 환하게 웃으며 행복해하는 두 사람을 똑똑히 보았다.
‘진태웅이 정말 이 여자와 결혼했어?’
순간 손윤서의 심장이 멈춘 듯했고 이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방금 자신에게 버림받은 이 남자가 다른 여자와 결혼했고 그녀의 외모조차 자신보다 뛰어났다.
‘어떻게 이럴 수가? 정말 내가 틀렸던 걸까? 진태웅에게 내가 몰랐던 장점이 있었던 걸까?’
하지만 손윤서는 바로 이런 생각을 털어버렸다. 그녀는 진태웅과 이혼한 걸 후회하지 않았지만 이혼하자마자 다른 여자와 결혼 사실에 대해 굴욕감과 배신감이 들었다.
뒤에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자 손윤서는 이를 악물고 잠시 머뭇거리다 돌아섰다.
“방금은 연기처럼 보이지 않았죠? 앞으로 손윤서 씨가 또 찾아와 귀찮게 하면 언제든지 전화 주세요. 협력 사이인 만큼 태웅 씨를 위해 고민을 해결해주는 건 내 의무예요.”
방 안에서 양지안은 눈을 가늘게 뜨고 웃었다가 다시 원래의 활발한 성격을 회복했다.
진태웅은 그녀에게 물을 한 잔 따라주며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연기가 좀 과장됐지만 꽤 괜찮았어요.”
진태웅은 그녀더러 아내의 역할을 오래 하게 할 생각은 없었다. 이혼한 그 날부터 그는 손윤서와의 모든 관계를 끊으려 했다.
“내일 시간이 있어요? 시간이 되면 나와 함께 자선 파티에 참석해 줘요. 나 혼자서는 감당하기 힘들 거 같아요.”
식사할 때 양지안은 이 일을 말했었다. 양정국의 건강이 아직 회복되지 않아 그녀가 대신 파티를 주최해야 했다.
“네. 그럴게요.”
양지안이 방금 도움을 주었으니 진태웅은 이 작은 부탁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내일 데리러 올게요.”
양지안을 보낸 후 진태웅은 간단히 씻고 침대에 누웠다.
다음 날 아침.
다시 아파트 단지의 숲으로 간 진태웅은 늘 훈련하던 자리에서 오늘의 운동을 시작했다.
“후...”
일련의 동작을 마친 진태웅은 탁한 숨을 내쉬며 가볍게 숨을 골랐다.
그의 경지는 정체되어 오랫동안 진전이 없었고 돌파하려면 외부의 힘이 필요했다.
땀을 닦던 중 진태웅은 어제 만난 그 노인도 운동하는 걸 발견했다. 오늘은 옆에 20세 좌우의 여자도 있었다.
동작으로 보면 전통적인 무술 같지 않았고 오히려 태극권과 비슷하지만 유연함이 부족해 이상해 보였다.
진태웅이 노인을 보자 노인도 동작을 멈추고 말했다.
“젊은이, 일찍 일어났군. 요즘 젊은이들은 이런 끈기가 부족해. 기초가 약한 것 같은데 나랑 같이 운동할 생각 없나? 한 달이면 한 단계 업그레이드될 거야.”
노인이 껄껄 웃으며 말하자 옆에 있던 여자는 진태웅을 힐끗 쳐다보고는 시선을 돌렸다.
“어르신, 마음은 고맙습니다만 제 체질에 어울리지 않는 것 같네요. 저는 먼저 가볼게요.”
진태웅은 정중히 거절하고는 아침을 사러 정문 쪽으로 향했다.
“할아버지, 이 사람을 아세요?”
진태웅이 멀리 떠나자 서연주가 호기심에 물었다.
노인은 고개를 저었다.
“어제 이사 온 젊은이야. 네가 열흘 넘도록 한 번도 나와 함께 나오지 않으니 다른 젊은이를 찾아 적적한 마음을 달래야 하지 않겠어?”
노인의 투정 어린 말투에 서연주는 바로 달라붙어 애교를 부렸다.
“회사에 일이 얼마나 많은지 할아버지도 아시잖아요. 이제는 매주 한 번씩 꼭 와서 할아버지와 함께할게요! 제자를 받는 건 그만 하세요. 태극권을 한 번 하면서 땀투성이가 된 사람이 할아버지의 코치를 받으면 아마 병원에 실려 갈 거예요.”
진태웅은 그들이 자신에 관해 얘기하는 걸 전혀 알지 못했고 알더라도 개의치 않았다.
강가에서 저녁까지 기다렸을 때 양지안이 약속대로 왔다. 두 사람은 함께 파티 장소로 향했다.
주차할 때 양지안이 말했다.
“이따가 제가 조금 바쁠 수도 있으니 태웅 씨는 먼저 편하게 둘러보세요.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드릴게요.”
두 사람이 주차장을 떠나자 빨간색 스포츠카가 그 옆에 멈췄는데 차 안에는 손윤서와 신우빈이 있었다.
손윤서는 무심코 익숙한 뒷모습을 스쳐보다가 표정이 굳어졌다.
‘방금 들어간 저 사람... 진태웅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