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장
10년간 재벌가에서 산 짬밥으로 김수영은 그 동안 강가을이 한씨 집안에서 제대로 된 대접을 못 받고 자랐음을 확신했다.
‘열등감 덩어리로 몰아야 해. 어떻게든.’
역시나 그녀의 말에 바로 넘어간 강우진은 혐오 가득한 시선으로 강가을을 바라보았다.
“정말 대단하다. 그게 아줌마랑 무슨 상관인데! 이제 겨우 첫 날이야. 앞으로 정말 볼 만 하겠네! 너 정말 재수...”
“강우진.”
재수없다는 말을 채 내뱉기 전에 위압감 넘치는 목소리가 그를 제지했다.
단 세 글자였지만 강우진의 입을 막기엔 충분했다. 고개를 돌려보니 어느새 웃음기 사라진 강현우의 얼굴이 보였고 강우진은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섰다.
그렇다고 강가을을 향한 증오와 경멸이 줄어든 건 아니었지만 말이다.
강우진이 자기 편임을 확신한 김수영은 더 당당하게 나서며 모함을 당했다는 설정을 이어갔다.
“그렇게 못 믿으시겠으면 제 방 뒤져보시든가요! 전 당당합니다! 비록 가사 도우미로서 평생 다른 사람 집 살림만 해오며 살아왔지만 그 동안 남 부끄럽지 않게 살아왔어요.”
꽤 큰 소란에 어느새 별장의 집사들과 다른 고용인들까지 몰려들었다.
차마 앞으로 다가가지 못하고 먼 발치에서 바라보던 그들은 김수영의 말에 왠지 강가을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부잣집에서 자랐다더니... 역시 우리 같은 것들은 사람으로도 안 보시는 건가.’
인간으로서 제대로 된 대접도 못 받는다는 생각에 강가을에 대한 감정이 좋아질 리가 없었다.
한편, 역시 어딘가 달라진 그들의 시선을 느낀 강기태가 이 해프닝을 끝내려던 그때, 지금까지 가만히 있던 강가을이 문득 입을 열었다.
“전 아줌마가 돈을 훔쳤다고 한 적 없는데요?”
그녀의 말에 모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역시 가장 먼저 나선 건 다혈질 강우진이었다.
“아까 네 입으로 아줌마가 우리 집안 돈을 훔쳤다고 했잖아. 이제 와서 발 뺄 생각이야?”
그런 그를 힐끗 바라보던 강가을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난 아줌마가 이 집안의 재물운을 훔쳤다고 말했어.”
‘돈을 훔쳤다고 한 건 안서우 쪽이지. 그 말에 모두가 오해한 거고.’
“재물운을 훔치는 것과 돈을 훔치는 건 엄연히 다른 일입니다. 적어도 단순한 수색으론 증거를 찾을 수 없겠죠.”
‘그러니까 저렇게 당당한 거고.’
무슨 얘기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강우진은 그녀가 변명할 뿐이라고 생각했다.
“재물운을 어떻게 훔친다는 건데. 자꾸 그렇게 뻥 칠 거야?”
하지만 강현우의 경고 섞인 시선에 바로 입을 꾹 다물었다.
‘뻥이면 뭐 어때? 이 정도 뻥은 칠 수 있는 거 아닌가?’
이렇게 생각하면서도 너무나 차분한 강가을의 모습에 순간 이 모든 게 사실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솔직히 재벌가에서 사주, 점 같은 샤머니즘은 꽤나 유행이었다. 강성 그룹도 큰 프로젝트를 앞두고 풍수 전문가를 찾곤 했으니까.
그래서 아예 그런 것들을 믿지 않는 건 아니었지만 이제 겨우 소녀인 강가을이 이런 내용을 마스터했다는 게 믿기지 않을 뿐이었다.
‘설마... 사실인 건가?’
한편, 강가을은 사촌동생으로 보이는 강우진이 떠들든 말든 다시 김수영을 향해 돌아섰다.
다음 순간, 그녀의 손이 정원 한켠을 가리켰다.
“저기에 뭘 묻은 거죠?”
정원의 작은 화단이 있는 그곳은 일을 하면서도 김수영이 수도 없이 살피던 곳이기도 했다.
가뜩이나 당황한 상태던 김수영은 강가을이 가리키는 곳을 돌아본 순간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차디찬 식은 땀이 온몸을 적셨다.
‘그럴 리가 없어... 저 애가 그걸 알 리가 없어...’
김수영의 반응에 뭔가 확신이 든 강기태가 집사를 향해 말했다.
“가봐.”
가뜩이나 사실인지 아닌지 궁금했던 집사는 허락이 떨어지자 빠르게 화단 쪽으로 향했다.
다른 고용인들은 물론 강우진마저도 그의 뒤를 따랐다.
물론 강우진은 그곳에 아무것도 없다는 걸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강가을이 가리키는 화단을 살펴보던 집사가 작은 삽으로 화단의 흙을 퍼내기 시작했다.
이에 창백하게 질린 얼굴의 김수영은 다리까지 후들거리기 시작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모두의 시선이 화단 쪽으로 쏠려 그녀의 표정을 보고 있는 사람이 없다는 점이었다.
정기적으로 분갈이를 해주는 터라 흙을 파내는 건 별로 어렵지 않았다. 얼마 파지 않아 작은 구멍이 나왔고 삽 끝에서 바스락 소리가 들려왔다.
“찾았습니다!”
순간 비서의 눈동자가 산삼을 캐낸 심마니처럼 반짝였다.
그리고 잠시 후 화단에서 검은색 비닐봉투가 하나 나왔다. 겹겹이 쌓인 비닐봉투를 벗겨낸 순간, 종이 봉투에서 악취가 풍겨나왔다.
울렁거리는 속을 억누르며 종이마저 벗겨내려던 그때, 강가을이 말했다.
“잠깐.”
모두의 시선을 받으며 강가을은 어디에선가 꺼낸 부적을 종이 위에 붙였다.
그리고 놀랍게도 종이에 닿는 순간, 뭔가를 감싸고 있던 종이가 순식간에 낡은 종이로 변해버렸다.
비서의 시선에 강가을이 고개를 끄덕이고 그제야 장갑을 낀 집사가 조심스레 종이를 열어보았다.
종이 봉투 안에는 붉은색 종이가 하나 있었다. 보통 사찰에서 사주 팔자를 볼 때 쓰는 그런 종이인 듯 싶었는데 펼쳐 보니 역시나 사주 팔자 여러 가개 적혀있었다. 피로 적은 듯 검붉은 색을 내뿜는 종이가 바로 악취의 근원지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봉투에는 머리카락 몇 가닥과 기이한 부호가 그려진 부적도 담겨있었다.
일상생활에선 흔히 볼 수 없는 괴이한 느낌의 물건들, 게다가 방금 전 강가을이 했던 말까지.
모두들 이 물건의 정체를 눈치챘지만 그저 너무 터무니 없는 일이라 도저히 확신이 가지 않았다.
그중에서 가장 충격을 먹은 철썩같이 김수영을 믿고 있던 강우진이었다.
흔들리는 눈동자로 그녀를 바라보던 강우진이 말했다.
“아줌마...”
이 와중에도 김수영은 떨리는 입술로 변명을 이어갔다.
“제, 제가 묻은 거 아닙니다. 전 저런 물건 본 적도 없어요. 도련님, 아가씨, 제발 제 말 좀 믿어주세요.”
“그건...”
하지만 이번엔 강가을이 강우진의 말을 가로챘다.
“아줌마가 묻은 게 맞는지 아닌지는 별장 정원 cctv를 확인하면 알 수 있겠죠.”
정원 곳곳에 CCTV에 배치된 걸 확인한 그녀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재물운을 훔치는 부적은 반드시 주술의 의뢰인 즉 당신의 피로 써야 해요. 이 머리카락은 강씨 집안 사람들 거겠죠. 강씨 가문 사람들의 물건을 이용해 재물운을 훔치려 했던 거 맞죠?”
모든 것이 밝혀지자 한참을 부들거리던 김수영은 결국 털썩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 모습에 다들 저 봉투를 묻은 사람이 김수영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머리카락이야 이 집에서 도우미로 일하는 이상 충분히 챙길 수 있으니까 말이다.
어느 재수없는 이의 머리카락인지는 알 수 없지만.
“아, 아줌마가 묻은 거라고 쳐. 그게 정말 재물운을 훔칠 수 있는 건지는 모르잖아? 어쩌면...”
아직도 김수영의 편을 들려는 강우진을 향해 강현우는 매서운 눈빛을 날려주었다.
“닥쳐. 또다시 입 함부로 놀려봐. 그땐 경고로 안 끝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