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장
강현우의 목소리에 백수영은 겨우 이성의 끈을 다시 잡을 수 있었다. 찬물이라도 맞은 듯 정신이 번쩍 든 그녀는 그 자리에 우뚝 멈춰섰다.
같은 시각, 밖의 소란에 강기태 역시 밖으로 나왔다.
“무슨 일이야?”
강기태는 강성 그룹 대표로서 여러 매체에 얼굴을 드러낸 인물이라 백수영도 단번에 그를 알아볼 수 있었다.
강가을이고 뭐고 일단 이곳에 온 목적부터 해결하자는 생각에 백수영은 미소로 응했다.
“강 대표님, 안녕하세요. 저 한스 건축 한성태 대표 와이프 백수영이라고 해요. 집에 계셨어요? 다행이네요.”
백수영과 강가을을 번갈아 바라보던 강기태가 무표정한 얼굴로 물었다.
“안녕하십니까. 무슨 당부하실 말이라도 있으셔서 오신 건가요?”
태어날 때부터 모든 걸 가지고 태어난 그는 딱히 모르는 사람에게 예의를 차리는 타입이 아니었으나 눈앞의 여자가 강가을을 지금까지 키워준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최대한 친절하게 응했다.
‘기껏해야 가을이 잘 부탁한다는 말이나 하러 온 거겠지.’
하지만 앞뒤 사정을 알 리가 없는 백수영은 어딘가 겸손하게 들리는 목소리에 바로 의기양양해졌다.
‘강성 그룹 대표가 나한테 당부할 게 있냐고 물었어. 우리 한스 건축을 인정해 준 거야!’
강현우, 강가을에게 화가 났던 것도 잠시 새침한 표정을 짓던 백수영이 옆에 서 있던 한여름을 옆으로 잡아당겼다.
“당부할 일, 있죠. 대표님, 저희 딸 한여름입니다.”
“안녕하세요.”
한여름도 질 세라 인사를 건넸다.
“그게... 이번 해성시 홍보대사는 이례적으로 명문고 학생들 8명을 선발해 홍보 영상을 찍는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 최종 리스트는 강성 그룹이 정한다면서요. 그게... 여러 원인으로 인해 제 딸이 억울하게 자신의 자리를 빼앗겼습니다. 그래서 저희 딸이 받았어야 했던 그 자리 되찾기 위해 온 겁니다. 강성 그룹이라면 그 정도 부탁 들어주는 건 일도 아닐 테니까요.”
이에 강기태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홍보대사 거이라면 부사장인 강기성이 맡아서 하는 일이라 딱히 관심을 두지 않았었다. 게다가 강기성은 이런 일에 사사로운 청탁이 오고가는 걸 질색하는 성격, 하지만 하필 이런 부탁을 하는 쪽이 강가을을 키워준 이들이라 왠지 난처해졌다.
‘그래. 들어주자. 가을이를 지금까지 키워준 값이라 치지 뭐.’
생각 끝에 강기태는 기꺼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한 번 알아보겠습니다. 그런데 자기 자리를 빼앗겼다고? 따님 대신 홍보대사가 된 사람이 누군지 제가 한 번 알아보겠습니다.”
“한가을이에요.”
백수영이 바로 대답했다.
“뭐라고요?”
휴대폰을 꺼내려던 강기태는 순간 잘못 들었나 싶어 멈칫했다.
“한가을이라고요.”
백수영은 아예 손가락으로 강가을을 가리키며 말했다.
“쟤가 한 짓이에요. 우리 집에서 입양한 애인데 그 동안 저희 집안에서 얼마나 말썽을 피웠는지 몰라요. 성격은 엉망에 거짓말은 또 어찌나 잘하는지. 친부모가 이 저택의 고용인으로 일할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네요. 저도 이렇게까지 말하고 싶진 않은데요. 인성은 타고 난다는 말이 맞긴 한 것 같아요. 제가 아무리 가르쳐도 이 모양인 걸 보면...”
백수영은 강가을을 향한 모욕을 이어갔고 강현우의 표정은 점점 더 어두워졌다.
‘가을아, 너 도대체 그 동안 어떻게 지낸 거야.’
한편, 집사도 아주머니도 입이 떡 벌어질 지경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대표님 앞에서 아가씨 욕을 하다니. 정말 미친 건가?’
이런 모욕이야 뭐 매일 같이 들어왔던 말이니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도 있었지만 친아버지 앞에서 이런 말을 들으니 왠지 화가 밀려왔다.
이제 겨우 찾은 가족, 이제 드디어... 좀 행복해질 수 있나 싶었는데.
‘왜, 왜 날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는 거야. 이런 말 해봤자 자기 얼굴에 침뱉기라는 걸 정말 모르는 건가?’
강가을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알고 있어. 그냥 그것보다 사람들이 날 전부 싫어하게 하는 게 더 좋을 뿐이야.’
어렸을 때 학교 선생님이 지나가듯 하는 칭찬에도 백수영은 어떻게든 그녀를 깎아내리곤 했다.
강가을이 나쁜 아이, 나쁜 학생이여만 친딸인 한여름이 더 돋보일 수 있을 테니까.
기억이 생길 때부터 이런 말을 들어온 강가을은 이미 이런 모욕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쉴새없이 떠드는 목소리에 결국 참다 못한 강가을이 소리쳤다.
“닥쳐!”
“닥쳐!”
소리를 지른 건 강가을뿐만이 아니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무섭게 가라앉은 강기태가 부들거리고 있었다.
가뜩이나 차갑고 엄해 보이는 인상의 사람이 소리까지 지르니 순식간에 기가 눌린 백수영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우리 강씨 집안 딸입니다. 혼내도 제가 혼내니 외부인은 왈가왈부하지 마시죠. 집사님, 내보내세요!”
갑자기 바뀐 태도에 당황해 정작 ‘강씨 집안 딸’이라는 말을 듣지 못한 백수영은 따져 묻기 위해 앞으로 다가갔지만 집사는 젠틀하지만 단호하게 그들을 내보냈다.
쫓기듯 나가는 두 사라을 바라보던 강기태가 물었다.
“전에도 저런 식이었니?”
하지만 괜한 질문이라는 생각에 곧 입을 꾹 다물었다.
다른 사람 앞에서도 이 모양인데 외부인이 없는 집에서는 오죽했을까?
그래도 나름 부잣집에 입양되어 부족한 것 없이 자랐을 줄 알았는데...
생각할 수록 화가 치민 강기태는 강현우에게 분부했다.
“기성이한테 연락해. 오늘 부로 한스 그룹과의 모든 프로젝트는 취소다.”
어차피 강가을을 키워준 은혜를 갚는다는 생각으로 먼저 제안했던 프로젝트로 수익 배분까지 최대한 저쪽 뜻에 맞춰주었다.
아니, 한스 그룹을 더 큰 기업으로 만들어줄 생각도 있었다.
딸을 키워준 기업이 한미한 가문인 건 싫었으니까.
하지만 지금까지 강가을을 이런 식으로 대했다는 걸 안 이상 더 이상 특별 대우는 해줄 수 없었다.
어느새 평소처럼 생글거리는 얼굴을 회복한 강현우는 바로 휴대폰을 꺼냈다.
“네.”
한편, 이 모든 걸 멍하니 지켜보던 강가을의 입가에 흐릿한 미소가 실렸다.
‘오빠도 아빠도... 전에 있던 집과는 다른 것 같아. 다행이야...’
강씨 가문 저택 대문 앞.
영문도 모르고 쫓겨난 백수영, 한여름은 어리둥절할 따름이었다.
‘아니, 도대체 왜 갑자기 화를 내는 거지? 잠깐, 아까 강씨 가문 딸이라고 했었나? 누가?’
집사는 여전히 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두 사람을 바라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생각보다 멍청하군. 아가씨를 키웠다는 이유만으로 어마어마한 이득을 챙길 수 있었을 텐데... 보아하니 아직까지 아가씨가 우리 가문 딸이라는 것도 모르는 눈치야.’
강씨 가문의 집사로서 그는 최대한 젠틀하게 그들에게 힌트를 주기로 했다.
“저희 대표님께서 18년 전 딸아아를 잃어버리셨죠. 오늘이 바로 그 따님이 집으로 돌아오시는 날입니다. 그러니 아가씨를 모욕하는 이들을 집에 들일 순 없으시겠죠. 그러니 이만 가보세요.”
말을 마친 집사가 저택으로 들어가고 남겨진 한여름과 백수영은 여전히 멍한 표정이다.
한여름의 팔을 붙잡으며 부들거리는 다리를 진정시킨 백수영이 먼저 입을 열었다.
“여, 여름아. 저 사람이 지금 뭐라고 한 거야? 뭐? 아가씨? 누가?”
한여름도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믿을 수 없었다. 아니, 믿고 싶지 않았다.
“잘못 들은 거겠죠.”
‘한가을이 강씨 가문 딸일 리가 없잖아.’
한편, 천천히 고개를 돌려 딸을 바라보다 결국 다리에 힘이 풀려 털썩 주저앉은 백수영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끝이야! 우린 이제 끝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