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강기태의 컵 주위에 흐른 물기가 방금 전 그 소리의 주인이 강기태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한참 뒤에야 강우진을 바라보던 강기태가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가을이는 내 딸이야. 내 딸이 네 누나가 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는 거냐?”
방금 전까지 제멋대로 날뛰던 강우진도 기가 눌린 듯 고개를 숙였다.
“큰아빠, 그게 아니라...”
한편, 그 모습을 흐뭇한 얼굴로 바라보던 강현우가 안서우에게 말했다.
“서우야, 너 지금까지 이 집에서 지내면서 구박받은 적 있어?”
당황하던 안서우는 안색이 창백해지더니 다급하게 부인했다.
“아니. 오빠, 오해야.”
“그럼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
여전히 생글생글 웃고 있는 모습이었지만 강현우의 목소리에는 왠지 모를 힘이 담겨있었다.
그 기에 눌린 건지 고개를 푹 숙인 채 아무 말도 못하던 안서우는 몰래 입술을 깨물었다.
이때 김영애가 나서 조금 어색해진 분위기를 중재했다.
“내 생각이 짧았네. 그깟 방 하나 때문에 이게 무슨 일이래.”
“네, 숙모 생각이 짧으셨네요.”
강씨 가문의 장손으로서 강현우는 숙모에게도 팩폭을 이어갔다.
“가을이 제 동생이에요. 다른 사람들이 쓰던 방을 내주는 건 좀 아니지 않나요?”
그리곤 강가을의 어깨를 확 끌어안았다.
“제 여동생이 그런 꼴을 당하는 건 못 봅니다.”
그의 말에 안서우의 표정은 더 어두워졌다.
‘뭐야. 난 방을 내주는 게 당연한 거고 내가 쓰던 방을 쓰는 건 격에 맞지 않는단 말이야? 지금 나 차별해?’
“그래, 현우야. 내 실수야. 내가 다시 준비할게.”
방금 전까지 어딘가 서늘하던 표정의 강현우는 곧 화사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수고해 주세요.”
그리고 모두를 향해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럼 전 서우한테 정원 구경 좀 시켜줄게요.”
말을 마친 그가 강가을의 손목을 끌고 집을 나서고... 두 사람이 나가자 거실의 분위기는 다시 무거워졌다.
잔뜩 억울한 표정의 김영애가 뭐라고 변명이라도 해보려던 그때, 집사가 강성진에게 말했다.
“회장님, 한성태 대표 부인인 백수영 씨가 만나뵙길 원하십니다.”
한성태? 모두들 동시에 강가을을 떠올렸다.
그 집에서 딸을 데리고 온 게 방금 전인데 뭐가 부족해서 여기까지 달려온 걸까 싶었다.
“가을이 만나러 온 걸까요? 하긴 지금까지 키운 딸을 보내려니 얼마나 아쉽겠어요.”
신이현은 이렇게 말하며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아까 보니까 짐도 없는 것 같던데... 짐 보내주려고 온 건가? 하긴 거기도 나름 부잣집인데 딸을 맨몸으로 내보냈겠어?’
하지만 집사는 잠깐 망설이다 말했다.
“그게... 이현 사모님을 만나러 오신 거라던데요.”
“나요?”
신이현의 입꼬리가 살짝 떨려왔다.
‘가을이가 아니라 나라고?’
...
같은 시각.
강씨 가문 저택의 정원은 전형적인 유럽식 스타일로 복고 분위기의 울타리에는 장미가 흐드러지게 피어있었고 푸르른 잔디가 유난히 찬란하게 자란 모습이었다.
강현우의 뒤를 따르며 정원 이곳저곳의 소개를 듣던 강가을은 방금 전 거실에서 자신의 편을 들어주던 강현우의 모습을 떠올리곤 묘한 감정에 휩싸였다.
그리고 한참이 지나서야 문득 말했다.
“고마워요.”
멈칫하던 강현우는 돌아서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오빠한테 고맙다는 말 하는 거 아니야.”
어딘가 멍한 표정, 강현우의 손길에 흐트러진 머리, 귀여운 모습에 강현우의 미소는 더 짙어졌다.
그가 입을 열려던 그때, 마침 휴대폰이 울렸다.
발신인을 확인한 그는 강가을에게 마음껏 돌아보라고 한 뒤 정원을 나섰다.
여기저기 둘러보던 강가을의 시선이 정원 구석에서 밴치를 닦고 있는 아주머니에게로 향했다.
50대 중반의 평범한 여성, 거리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아줌마였지만 특별한 능력을 가진 강가을에겐 달랐다.
저 거뭇한 기운, 분명 악행을 저지른 이에게서만 느낄 수 있는 기운이었다.
지금까지 강가을은 길가에서 이런 사람을 봐도 모르는 척 지나치곤 했다. 괜히 건드렸다가 그 살이 본인에게로 돌아올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대로 둔다면 강씨 집안의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칠 수가 있다는 생각에 강가을은 아주머니에게로 다가갔다.
걸레를 손에 쥔 채 어색한 손놀림으로 의자를 닦는 여자의 표정은 어딘지 모르게 멍해 보였고 시시때때로 힐끗힐끗 눈치를 살피기도 했다. 그러다 강가을을 발견한 여자는 귀신이라도 본 듯 기겁하며 일어서더니 꾸벅 인사를 올렸다.
“아, 아가씨.”
“절 아세요?”
이제 집에 온 지 30분째, 그녀의 얼굴을 알아보는 것이 신기했다.
“아, 집사님께서 미리 사진을 보여주셨거든요. 무례를 범하는 일은 없어야 하니까.”
여자는 아부섞인 미소를 지으며 설명했다.
‘그런 배려를 해주었다고? 생각밖인데?’
“그런데 무슨 일로 여기까지 오신 건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강가을을 향해 여자가 먼저 질문했다.
강가을이 물으려던 순간, 정원 대문쪽에서 익숙한 실루엣이 보였다.
백수영과 한여름, 그 두 사람 역시 집사 곁을 지나다 정자에 서 있는 강가을을 발견하곤 눈이 휘둥그레졌다.
“네가 왜 여기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