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장
별장을 빠져나온 강가을은 강씨 가문 저택이 아닌 전에 구했던 월세방으로 향했다.
30평 정도 되는 빌라, 2년 전부터 강가을이 대부분 시간을 보내는 곳이었다.
파티션으로 두 공간으로 나뉜 거실 중 절반은 한이쁨의 구역으로 작은 텐트 안에는 그의 장난감으로 가득했다.
그리고 아늑한 침실과 긴 책상 두 개가 있는 서재, 책상 위에는 온갖 조각상들과 점술에 사용되는 도구들, 부적을 쓰는 노란색 종이 등이 가득한 이곳이 바로 강가을만의 아지트였다.
집으로 들어간 강가을은 일단 대충 짐부터 챙기기 시작했다.
송하윤의 지혜를 되찾기로 한 이상 여러 가지로 준비할 게 꽤 많았다.
이때 그녀의 휴대폰이 울렸다.
청하교 교주라고 뜨는 액정을 바라보던 강가을이 전화를 받았다.
수화기 저편에서 어르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을아, 전에 얘기했던 건 고민해 봤어? 경성 불교 대학원 강사 자리 말이야. 너 경성대 가고 싶다며. 불교 대학원에서 강사로 일하면 수능 점수가 부족해서 특별 전형으로 들어갈 수 있어. 솔직히 내 생각엔 너라면 굳이 대학교를 가야 하나 싶다. 여기서 강사로 2년만 일하면 명예 강사로 임명도 될 텐데...”
숨도 안 쉬고 말을 내뱉는 청하교 교주 이태석의 말을 듣고 있던 강가을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특별 전형 아니어도 경성대 붙을 수 있거든요. 경성에 갈지 해성시에 갈지 아직 안 정한 게 문제죠.”
전에 경성대를 지망으로 했던 건 어디까지나 한씨 가문과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가고 싶어서였는데 지금 이 상황에선 굳이 해성시를 떠나야 하나 싶기도 했다.
강가을이 해성시에 남을 생각이란 말에 이태석이 껄껄 웃었다.
“해성시 좋지. 풍수적으로 아주 좋은 도시야. 해성대에는 내가 따로 언질을 주도록 하마. 그럼 경성 불교 대학원 쪽은 내가 거절하는 걸로 하지. 그런데 말이야. 너 그냥 우리 청하교에서 일할 생각은 없니? 네 실력이면...”
또 끝도 없는 잔소리의 서막에 강가을은 다급하게 거절했다.
“싫어요. 전 공부할 거예요.”
그러자 이태석은 아쉬운 듯 한숨을 내쉬었지만 곧 다시 말을 이어갔다.
“참, 우리 사찰에 평안 부적이 다 떨어졌어. 언제 다시 납품할 거야? 가격은 한 장당 30만 원으로 하지...”
비즈니스 얘기에 강가을의 눈에 순간 힘이 들어갔다.
남은 종이 수를 확인한 강가을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20장 정도 드릴게요.”
20장이면 600만 원, 기부금 절반을 떼어내도 300만 원을 남길 수 있지만 한씨 가문의 양육비를 갚으려면 아직도 갈 길이 멀었다.
‘부적만 파는 걸로는 안 되겠어.’
...
그렇다. 강가을의 다른 정체는 바로 도사. 불교에는 산, 의, 명, 상, 복 다섯 가지 술법이 있는데 그중에서 부적술은 산술의 한 가지로 다섯 가지 술법 중 가장 신비롭고 어려운 술법이기도 했다.
사부님의 가르침을 받아 다섯 가지 술법을 모두 섭렵한 강가을이 가장 자신 있는 것이 바로 부적술이었다.
종이에 그리는 부적이 바로 가장 기본 부적이고 오늘 아침 이수현에게 주었던 옥패 부적이 바로 그 고급 버전, 그리고 최고의 경지에 오른 자만이 이루는 것이 바로 허공 부적, 즉 허공에 대고 부적을 그리는 술법이었다.
한편, 부적지를 펼친 강가을은 붓에 주사를 묻혀 그림을 그려나가기 시작했다. 강가을이 기를 집중해 단번에 부적을 그려내자 순간 종이에 기묘한 빛이 담겼다.
이렇게 평안 부적 하나를 완성한 강가을은 15분도 안 되는 사이에 단번에 20장을 그려냈다.
청하교에 줄 평안 부적을 그린 강가을은 어제, 오늘 그녀의 편을 들어준 오빠와 아빠를 떠올리곤 최상급 원석을 집어 들어 호신 부적을 조각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오후 내내 오피스텔에서 시간을 보낸 강가을은 하늘이 어두워진 뒤에야 짐과 한이쁨을 챙겨 강씨 가문 저택으로 돌아왔다.
2층으로 올라간 강가을이 방문을 열고 짐들을 내려놓으려던 그때, 탁탁탁 소리와 함께 누군가 다가왔다.
먼저 방에 있었던 강지우가 잔딱 화난 얼굴로 그녀를 밀어냈다.
“여긴 내 방이야! 나가!”
당황한 강가을이 방을 다시 살폈다.
‘내 방 맞는데...’
이때 부랴부랴 달려온 김영애가 강지우를 꾸짖었다.
“강지우, 버릇없게 굴지 말라고 했지! 얼른 언니한테 사과해!”
“엄마! 이 방은 나한테 줄 거라고 했잖아요! 이게 뭐예요! 약속도 안 지키고! 몰라! 여기가 내 방이라고요!”
강지우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통에 강우진을 비롯한 다른 아이들까지 우르르 방에서 나왔다.
그제야 강가을은 어제부터 있었던 방 소동의 전말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었다.
‘애초에 이 방은 자기 딸한테 줄 생각이었네?’
딸 때문에 자신의 속내를 그대로 들킨 김영애가 어색하게 웃으며 설명했다.
“그게... 지우가 워낙 저 방을 좋아해서. 전에는 네가 돌아올 거란 생각은 전혀 못 했으니까 그냥 언젠가 주겠다고 한 것뿐이야.”
“가을이가 있든 없든 저 방은 우리 가을이 방입니다.”
이때 복도 다른 끝에서 강현우의 목소리가 울렸다.
평소처럼 온화한 미소를 띄고 있긴 했지만 김영애 모녀를 바라보는 눈빛은 왠지 서늘했다.
“숙모도 아시잖아요?”
‘설령 가을이가 영원히 이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해도 저 방은 그 누구에게도 넘기지 않았을 거야. 주제도 모르고..’
“그게...”
김영애가 당황하자 이번엔 강우석이 나섰다.
“형, 엄마가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고. 그냥 어디까지나 방일 뿐이잖아요. 저 방 딱 봐도 어린 여자애 방이잖아요. 지우한테 딱일 것 같은데 그냥 물려주면 뭐 어때서요.”
그리곤 불만 어린 시선이 강가을을 스쳤다.
“어린애랑 방 뺏는 거 창피하지도 않나.”
‘꼭 내가 불청객이 된 것 같네?’
이렇게 공격당한 이상 가만히 있을 강가을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오빠 말은 지우가 이 방이 마음에 든다는 이유로 양보해야 한다 이거야? 내가 지금 얘랑 방 빼앗기를 하는 거라고?”
“상황이 그렇잖아.”
강우석이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번에 국립박물관에 새 청자가 들어왔다던데. 난 그게 그렇게 마음에 들어. 그게 갖고 싶은데 박물관 측을 설득해 줄 수 있겠어? 그것만 해주면 이 방 지우한테 양보할게.”
“뭐?”
“왜? 안 돼? 마음에 들면 다 가질 수 있을 것처럼 얘기하더니? 지우는 되고 난 안 된다 이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