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장
“저희 아이가 큰 폐를 끼쳤네요. 오늘은 시간이 늦었으니 이만 가보겠습니다. 제대로 된 사과는 내일 다시 하죠.”
‘일단 데리고 가서 제대로 씻겨야지. 깔끔해진 모습을 보면 이 사람도 좋아할 거야.’
강가을의 진심 어린 사과에 이수현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곤 집사에게 분부했다.
“댁까지 모셔다드리도록 해.”
이에 집사가 젠틀하게 강가을을 에스코트했다.
비록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였지만 집사는 직접 차량까지 배치해 강가을과 한이쁨을 강씨 가문 저택으로 데려다주었다.
한편, 소식을 접하고 내려온 강씨 가문 집사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강가을이 쥐도 새도 모르게 나간 것도 놀라운데 저 안고 있는 동물의 정체는 설마... 여우?
“가을 아가씨, 이건...”
이씨 가문의 경호원들을 보낸 집사는 강가을과 그 품에 안긴 여우를 번갈아 바라보다 얇은 잠옷 차림인 걸 발견하곤 일단 부랴부랴 안으로 들였다.
거실에 들어서니 강현우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2층 계단에서 강우진도 머리를 쏙 내밀었는데 강가을의 품에 안긴 동물을 발견하곤 바로 목소리를 높였다.
“야, 너 그거 뭐야? 우리 집엔 털 달린 짐승은 출입 금지야!”
중2병인 건지 관종인 건지 하루 종일 날뛰는 그를 힐끗 바라보던 강가을이 진지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럼 넌 이 집에 어떻게 있는 건데? 너도 엄밀히 따지면 머리털 달린 짐승이잖아?”
여전히 멍한 표정의 강우진과 달리 눈치 빠른 강현우가 먼저 웃음을 터트렸다.
한참 뒤에야 또 한 방 먹었음을 알아차린 강우진의 얼굴이 시뻘개졌다.
“너 진짜...”
“할아버지 주무시는 시간 아닌가?”
하지만 강가을의 한 마디에 결국 목구멍까지 올라온 화를 꾹 참았다.
아무리 철부지라지만 적어도 이 집안에서 건드리면 안 되는 존재가 누군지는 잘 알고 있었으니까.
저녁 10시 뒤에는 소란을 일으키지 말 것, 이 집안의 규칙 중 하나인 데다 일찍 잠자리에 드는 강성진을 깨워봤자 좋은 소리를 들을 리가 없기 때문이었다.
“흥!”
홱 돌아선 강우진이 다시 방으로 올라가고 그제야 강현우를 향해 고개를 돌린 강가을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전에 기르던 여우인데... 이사한 걸 알고 여기까지 왔나 봐요.”
멈칫하던 그녀가 말을 이어갔다.
“이 아이가 지낼 집은 따로 알아봐 뒀어요. 여기서 하룻밤만 지내고 내일 바로 내보낼게요.”
행여나 민폐가 될까 조심스러운 표정에 강현우의 가슴이 욱신거렸다.
지금까지 키워왔다면서 굳이 따로 집까지 구한 걸 보면 전에 있던 집에서 동물을 기르는 걸 반대한 게 분명하고... 진짜 집으로 들어온 지금도 여전히 눈치만 살피는 동생을 보고 있자니 안쓰러우면서도 한씨 가문 사람들에 대한 증오가 불타올랐다.
그 사고만 없었다면 남 부럽지 않게, 아니 고생이라는 건 모르면서 최고의 사랑을 받으며 자랐어야 할 아이인데 도대체 어떤 삶이 저 아이를 이렇게 만든 걸까 싶어 안타까웠다.
“여긴 네 집이야. 네가 기르고 싶다면 그렇게 해도 돼.”
한 발 앞으로 다가선 강현우가 싱긋 미소 지었다.
부드럽지만 단호한 말투에 강가을이 흠칫했다.
“털 달린 동물은 안 된다고...”
“네가 말했잖아. 강우진도 이 집에서 사는데 여우라고 안 될 건 뭐야?”
방금 전 강가을이 했던 말을 인용한 강현우가 우아한 손길로 한이쁨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여전히 망설이는 듯한 눈치에 강현우는 다시 한번 단호하게 말했다.
“걱정하지 마. 오빠가 있잖아. 오빠는 영원히 네 편이야.”
순간 마음속 한구석이 따뜻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낯설지만 나쁘지 않은 가슴이 간질간질한 기분이었다.
무의식적으로 고맙다고 하려던 강가을은 오빠한테는 고맙다는 말은 필요 없다던 강현우의 말을 떠올리곤 고개를 끄덕였다.
“네.”
한이쁨을 품에 안고 방으로 돌아온 뒤에야 강가을은 자신이 줄곧 미소를 짓고 있음을 인지했다.
얼마만에 이렇게 웃어보는 건지 생각도 나지 않을 지경이었다.
한이쁨도 그런 주인의 모습이 낯선지 호기심 어린 얼굴이었다.
그러자 미소를 지운 강가을이 짐짓 엄한 목소리로 물었다.
“함부로 뛰쳐나오지 않기로 했잖아. 너 하마터면 여우 구이가 될 뻔했어. 알아?”
그녀의 말을 알아들은 듯 품에서 뛰어내린 여우는 빙빙 돌며 머리로 등에 멘 가방을 가리켰다.
‘주인이 이사했으면 나도 따라는 게 당연한 거 아니야?’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괜히 코웃음을 친 강가을이 여우의 가방을 풀어 헤쳤다. 안에 든 물건을 확인한 그녀는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가방에는 한이쁨이 먹을 통조림 캔과 부적을 쓰는 종이, 붓 등이 들어있었다.
교통사고를 당하고 한동안 한이쁨을 챙기지 못했지만 착한 여우는 주인이 부적 쓸 재료가 부족할까 걱정되었던 모양이었다.
그런 한이쁨의 머리를 쓰다듬은 강가을은 종이를 서랍에 넣었다.
사부님에게서 술법을 배운 뒤로 강가을은 한씨 가문 사람들 몰래 따로 월세방을 얻었었다. 그녀가 이런 걸 배운다는 걸 숨기기 위함이기도 했고 그녀의 개인 물건을 따로 두기 위해서였다.
‘그 덕분에 그 집안 물건은 하나도 안 챙겨 나왔지. 어차피 중요한 건 거기 없으니까.’
이 집에서 자리를 잡으면 한이쁨을 만나러 가려 했는데 마음 급한 한이쁨이 먼저 여기까지 찾아왔을 줄이야. 게다가 다른 집으로 들어가기까지.
“에휴.”
한숨을 내쉰 강가을은 늦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일단 욕실로 들어가 꼬질꼬질한 한이쁨을 깨끗이 씻긴 뒤에야 여우를 침대 위로 들였다.
어제 너무 많은 일이 있어서일까?
조금 늦게 눈을 뜬 강가을은 일단 동화 속 공주님 방 같은 인테리어에 흠칫하다 한참 뒤에야 현실을 인지했다.
‘아, 여기가 이제 내 방이지.’
온갖 핑크로 점철된 방에 적응하려 애쓰던 그때, 밖에서 누군가의 비명이 들려왔다.
“어머! 이게 뭐야? 여우잖아! 집사님!”
“여우? 여우가 왜 여기 있어! 얼른 잡아요!”
순간 번쩍 정신이 든 강가을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텅 빈 방, 그리고 1층에서 들려오는 비명, 한이쁨이 또 사고를 친 게 분명했다.
‘내가 이 자식을 그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