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화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코를 찌르는 소독수 냄새가 풍겨왔고 머리는 천근만근에 아랫배가 땅으로 꺼질 것처럼 너무 아팠다.
‘여긴... 어디지? 병원인가?’
겨우 눈을 떠보니 병원에서 자주 쓰는 하얀 벽이 보였다. 정신을 차린 유하연이 무의식적으로 손을 배에 갖다 댔다.
“왜? 아직도 아파?”
낮게 깔린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유하연의 몸이 그대로 굳었다. 시선을 돌려보니 역시나 유도경이었다.
슈트를 벗어 팔목에 건 유도경이 침대맡에 서 있었는데 창밖에서 날아든 햇살이 길고 웅장한 체격을 비추어 침대에 길고 큰 그림자가 비쳤다.
유도경이 허리를 숙이자 유하연은 그대로 그림자에 갇혀 숨이 올라오지 않았다.
“내가 너를 발견했을 땐 몸 아래쪽이 피바다였어.”
유도경이 사냥하러 나온 독수리처럼 음침한 눈빛으로 유하연을 바라보며 차갑게 쏘아붙였다.
“설명해야지.”
아랫배에 올려놓은 유하연의 손은 천근만근이라도 되는 듯 들어올리기 힘들었다. 유도경의 시선이 유하연의 정교한 얼굴에서 매끈한 몸매를 타고 평평한 아랫배까지 내려왔다. 차갑기 그지없는 시선이었지만 유하연은 온몸이 불에 활활 타는 것 같아 화들짝 놀라며 손을 거두더니 얼른 몸 아래로 숨겼다.
“나... 나도 몰라요.”
어떻게든 유도경에게 임신한 사실을 들키면 안 된다는 생각에 머리가 지끈거렸지만 아무것도 생각나는 게 없어 허리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눈빛만 봐도 유하연은 유도경이 그녀가 한 대답을 시원치 않아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손을 내민 유도경이 유하연의 턱을 꽉 부여잡으며 말했다.
“거짓말.”
“나... 거짓말... 한 적... 없어요...”
유하연은 발음이 새고 머리가 지끈거려 시선을 다른 데로 옮기며 유도경의 시선을 피했지만 유도경의 차가운 시선은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유하연을 마구 후볐고 이내 온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유도경이 화가 난 게 분명했기에 유하연은 마음이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상대를 화나게 한 대가가 무엇인지 그녀의 몸이 기억하고 있었다.
“날 봐.”
유하연이 도망가자 유도경의 눈빛이 점점 더 어두워졌다. 핍박에 이기지 못한 유하연이 남자의 시선을 마주하려고 손톱이 살을 파고 들어갈 때까지 으스러지게 움켜쥐며 애써 당황한 기색을 감췄다.
“난 정말 아무것도 몰라요.”
유하연이 턱에서 전해지는 아픔을 애써 참으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 피하려고 해도 피할 수 없는 이 상황과 고통으로 인한 생리적인 현상에 눈시울이 빨개지기 시작했고 속눈썹마저 촉촉해졌다. 이에 유도경이 멈칫하더니 유하연을 풀어줬다.
온몸에 힘이 풀린 유하연이 탈진하듯 침대에 쓰러졌다. 잠깐이었지만 유하연의 등에는 이미 식은땀이 올라와 있었다. 고비를 넘기긴 했지만 방심할 엄두가 나지 않았고 심장이 여전히 목구멍까지 차올라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유하연, 내게 거짓말한 후과가 뭔지 알 텐데.”
유도경이 오만한 표정으로 유하연을 내려다보며 느긋하게 경고하자 유하연이 고개를 살짝 숙였다. 가느다란 목이 앞으로 살짝 꺾이자 유도경이 손아귀에 넣고 마음껏 가지고 놀 수 있는 짐승이라도 된 것 같았다. 유하연은 유도경이 볼 수 없는 각도에서 입술을 꽉 깨문 채 목소리를 떨지 않으려고 힘썼다.
“알아요.”
“거짓말한 적 없어요.”
유하연이 말했다.
“난 정말 몰랐어요.”
그때 머리 위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너무 가볍고 빨라 유하연은 잘못 들은 게 아닌지 귀를 의심할 정도였지만 이내 너무 놀라 두 눈을 부릅뜨고 소리를 질렀다.
유도경이 유하연을 이불에서 끄집어내더니 번쩍 안아 들고 베란다로 향한 것이다. 유하연은 고개만 숙이면 입원 병동 아래를 지나가는 사람들이 보였고 16층밖에 안 되는 높이라 그중 누구라도 고개를 들면 유도경과 유하연이 무척 난처한 자세로 베란다에 서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뭐 하려고요?”
유도경의 온도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유하연은 겨우 잡고 있던 정신 줄이 곧 끊어질 것 같아 겁에 질린 채 소리를 지르며 다음 단계로 넘어가지 못하게 두 손으로 막았지만 그녀의 이런 노력이 유도경 앞에서는 그저 의미 없는 반항이었다. 이는 3년 동안 유하연이 뼈저리게 느낀 점이기도 했다.
유도경은 유하연이 발버둥 쳐도 아랑곳하지 않고 난간에 밀어붙이더니 손으로 가느다란 허리를 감쌌다. 그렇게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 사이 유하연이 입고 있던 환자복이 너무 커서 흘러내리며 하얀 어깨가 드러났고 겨우 팔뚝에 걸린 환자복 위로 촘촘하게 올라온 닭살이 보였다.
유하연은 너무 수치스러워 온몸을 웅크리며 옷을 도로 올리려 했지만 유도경에게 완전히 제압당해 조금도 움직일 수 없었다.
“유하연, 이건 네가 자초한 일이야.”
유도경은 반항할 힘을 잃고 모욕을 당하고 있는 유하연을 분노에 찬 눈빛으로 바라봤다. 뜨거운 온도가 맞닿은 살을 타고 유하연에게로 흘러들었지만 유하연의 몸은 오히려 점점 차가워지고 있었다. 겁에 질린 유하연은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애원했다.
“아... 안 돼요. 오빠, 이러지 말아요...”
하지만 유도경은 유하연의 허락을 받을 사람이 아니었고 마음 가는 대로 움직이는 사람이었다.
“하연아.”
병실 문이 밖에서 벌컥 열렸다. 수액을 들고 들어오던 강아람이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넋을 잃고 말았지만 유하연은 구명줄이라도 잡은 듯 불쌍한 눈빛으로 말했다.
“아람아...”
“유 대표님,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강아람의 목소리도 불안감으로 가득 차올랐지만 그래도 용기 내어 이렇게 말했다.
“하연이 몸 상태가 어떤지 잘 알잖아요. 지금은 도저히... 도저히 그... 그런 행위를 할 그게 못 된다고요.”
“생리 기간이기도 양이 많아서 몸조리가 필요해요.”
“생리 기간이라고요?”
깊이를 알 수 없는 까만 눈동자는 모든 진실을 드러낼 만큼 예리했다. 유하연은 강아람에게 불똥이라도 튈까 봐 자연스럽게 입술을 깨물었다.
“그래요. 유 대표님 몰랐어요?”
강아람이 의아한 표정으로 말했다.
“하연이 여기로 데려올 때 사타구니가 피범벅으로 되어있길래 다 아는 줄 알았는데.”
유도경이 그제야 시선을 거두며 유하연에게 물었다.
“생리 기간이면 말하면 되지 왜 입을 꾹 다물고 있었어.”
유하연은 유도경이 아직도 강아람의 말을 완전히 믿지 못했음을 알아챘다.
“나도 생리혈일 줄은 몰랐죠.”
유하연이 침착해지려고 애썼지만 아까 너무 놀랐는지 얼굴은 여전히 하얗게 질린 상태였다.
“몸이 좋지 않아서 그런지 처음으로 이렇게 많은 피를 흘렸어요.”
유도경은 유하연의 머리가 지끈거릴 때까지 유심히 바라보더니 손을 내밀어 유하연의 바지를 벗기려 했다.
“안 돼...”
놀란 유하연이 두 눈을 부릅뜨는데 마침 유도경의 핸드폰이 울렸다. 그제야 한시름 놓은 유하연은 유도경이 전화를 받는 틈을 타 몰래 뒷걸음질 쳤다.
“오빠, 나 너무 무서워.”
유채린이 걸어온 전화였는데 울먹이고 있었다.
“엄마랑 절에 와서 사주를 봤는데 스님께서 자식 복이 별로 없다고... 흑흑... 어떡해. 나 너무 무서워. 이러다 아이를 잃으면 어떡하지.”